비엔나의 궁전/슐로스 벨베데레

벨베데레(Belvedere) 궁전

정준극 2008. 2. 26. 10:52

벨베데레(Belvedere) 궁전

 

오베레 벨베데레의 장관 

                               

비엔나 제3구에 있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은 오이겐 공자의 여름 궁전이다. 오이겐 공자는 18세기에 레오폴드1세-요셉1세-카를6세를 거치면서 오스트리아를 위해 헌신한 위대한 장군이다. 벨베데레(bel+vedere)라는 단어는 이탈리아어로서 ‘아름다운 경치’(Beautiful View)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에 사용하는 단어이다.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지은 건물을 벨베데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언덕 위의 집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벨베데레라고해서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프란츠 베스트의 작품 '세상즐거움의 정원'

 

로마 바티칸궁전 옆에 있는 넓은 정원의 카지노 이름도 벨베데레이다. 바티칸은 언덕위에 세운 건물이다. 플로렌스에는 벨베데레 요새가 있다. 요새에 올라가서 내려다 보면 플로렌스의 강과 들이 한눈에 다가선다. 폴란드의 바르샤바에는 언덕 위에 벨베데레 궁전이 있다. Belweder라고 부른다. 인도 캘커타의 국립도서관 건물도 벨베데레라고 부른다. 역시 낮은 언덕 위에 있다.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맨션으로 사용했던 뉴욕 태리타운(Tarrytown)의  통일교회 건물은 벨베데레 에스테이트(Belvedre Estate)라고 부른다.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 영국 서리(Surry)의 대저택인 클레어몬트(Claremont)는 클레어몬트 벨베데레라고 부른다. 독일 포츠담에도 벨베데레 저택이 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는 명문 벨베데레 대학이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부근에는 거대한 벨베데레 농원(Belvedere Plantation)이 있다.

 

오베레스 벨베데레의 전시실

 

캐나다 알베르타주 에드몬튼에 있는 기차역의 이름은 벨베데레이다. 기차역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원의 경치가 아름답다. 독일 브루흐잘(Bruchsal)의 추기경이 사용하던 사냥궁전도 벨베데레라고 부른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글렌우드(Glenwood) 교외의 주택지도 벨베데레이다. 영국 리버풀의 여학교 이름은 벨베데레 아카데미이다. 프랑스 세르베르(Cerbere)에 있는 Hotel Belvedere du Rayon Vert는 아름다운 아르 데코(Art Deco)건물이다. 중국 베이징에 벨베데레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제2차 아편전쟁 때에 파손되었다. 이밖에도 세계에는 벨베데레라는 명칭의 건물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을 따라 올수는 없다. 벨베데레는 건물과 정원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은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 걸작이다. 

 

오베레스 벨베데레의 아름답고 정교한 정문


벨베데레는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벨베데레 가문이다. 8세기부터 내려온 이탈리아의 명문 귀족가문이다. 이밖에도 벨베데레라는 명칭은 거리, 극장, 호텔, 식당, 그리고 비행기나 선박에도 사용되었다. 브리스톨 벨베데레(Bristol Belvedere)는 브리스톨비행기회사가 제작한 헬리콥터 이름이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미국에서 방송된 시트콤의 주인공인 미스터 벨베데레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벨베데레 레코드는 유명 음반회사의 명칭이다. 보드카에 벨베데레라는 것이 있다. 고급 보드카이다. 미국 자동차회사인 플라이마우스(Plymouth)가 제작한 자동차 중에 벨베데레가 있다. 1951년부터 1970년까지 제작되었다. 벨베데레 필름(Belvederefilm)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비엔나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영화사의 명칭이다. 호주 TV의 ‘굿모님 오스트레일리아’의 호스트인 로버트 마스카라는 벨베데레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리버풀FC 축구팀의 홈구장은 벨베데레 스타디움이다. 짐바브웨 하라레(Harare)시 서부지역의 명칭도 벨베데레이다. 이렇게 살펴보다보면 한이 없다. 그래서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오베레스 벨베데레의 정원과 연못이 보이는 풍경


오이겐 공자는 1697년 비엔나 도심 동남쪽에 있는 넓을 땅을 사서 정원으로 꾸몄다. 오이겐 공자는 이 정원에 별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714년부터 별장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보통 운테레스(Unteres)라고 부르는 하(下)벨베데레(Lower Belvedere) 궁전이다. 처음 계획은 전적으로 정원용 빌라를 짓고 여기에 온실을 붙이는 것이었다. 오렌지온실을 만들고자 했다. 빌라 안에는 화랑(갤러리)을 만들어 그림을 걸어 놓고자 했다. 물론 적당히 거주할 공간도 만들기로 했다. 건축담당은 당대의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였다. 바로크 건축의 대가였다. 베니스 출신 조각가 조반니 스타네티(Giovanni Stanetti)가 합류하였다. 오이겐 공자가 베니스에서 직접 초청한 조각가였다. 조반니 스타네티의 솜씨는 ‘운테레스’의 곳곳에 스며있다. 특히 난간과 정원의 조각들은 조반니 스타네티의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2년후인 1716년 ‘운테레스’의 중앙 대리석 홀이 완성되었다. 중앙 대리석홀(Marmorsaal)의 위대한 천정화는 마르티노 알토몬테(Martino Altomonte)의 솜씨이다. 천정화에서는 위대한 오이겐 공자를 뮤즈들의 리더인 아폴로 신으로 묘사했다. 중앙홀에는 오이겐 공자를 신격화한 조각도 있다. 운테레스의 서쪽에는 대침실(Paradeschlafzimmer)이 있다. ‘낙원의 침실’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종종 오이겐 공자가 접견실로 사용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대식당이 있다. 귀빈들을 초청하여 작은 음악회도 열며 만찬을 즐기던 곳이다.

 

벨베데레 정원의 스핑크스

 

벨베데레의 정원은 베르사이유 스타일이다. 당시 비엔나는 프랑스 유행에 민감했다. 베르사이유의 정원을 설계했던 앙드레 르 노트르(Andre le Notre)의 제자인 도미니크 지라르(Dominique Girard)가 담당했다. 도미니크 지라르는 스승과 함께 베르사이유 정원의 설계에 참여했었다. 나무들을 다듬어 정렬하고 화단을 가꾸어 놓았으며 연못을 만들어 놓은 것, 정원에 님프와 여신들의 조각을 세운것, 그리고 나중에 건설된 상(上)벨베데레와 연결하기 위해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 등은 베르사이유 스타일이다.

 

벨베데레 정원의 분수들

               

보통 ‘오베레스’(Oberes)라고 불리는 상벨베데레(Upper Belvedere)는 1720-23년의 3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원래 아이디어는 단순히 정원을 중심으로 하여 운테레스에 대칭되는 적당한 모양의 별장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이겐 공자는 기왕에 집을 지으려면 여름 별장으로 사용코자 했다. 그렇게 하여 오베레스는 운테레스에 비하여 훨씬 대담한 규모로 만들어 졌다. 중앙의 대리석 홀(Marmorsaal)은 역사적으로 1955년 5월 15일 신생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출범시키는 조약이 서명된 뜻깊은 장소이다. 천정화는 거장 카를로 카를로네(Carlo Carlone)의 작품이다. 오베레스에 있는 채플의 중앙제단은 프란체스코 솔리메나(Francesco Solimena)의 솜씨이다.

 

오베레스 벨베데레 정면과 연못.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시즌에는 이 건물 앞에 시장이 들어선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는 1573년,  벨베데레 정원과 상하별장을 오이겐 공자의 후손으로부터 매입하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오이겐 공자의 여름 별장을 벨베데레 궁전(슐로쓰 벨베데레)이라고 처음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벨베데레 궁전은 합스부르크의 지원을 받아 더 확장되었다. 벨베데레 궁전은 1775년부터 요셉2세의 주관아래 제국미술전시장으로 이용되었다. 1806년에는 암브라스(Ambras)궁전에 있는 미술소장품들을 운테레스로 옮겼다. 이미 있던 요셉2세의 소장품과 암브라스 궁전에서 가져온 작품들은 1890년 프란츠 요셉 황제 때에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으로 이관되었다. 운테레스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사람은 사라예보에서 총탄에 숨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벨베데레는 2차대전중 심한 손상을 입었다. 유명한 ‘황금방’(Gold Cabinet)도 불탔다. 전후 모두 복구되었다. 현재는 건물의 표면 개장(改裝)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건물의 때 벗기기이다. 2008년 완료 목표이다. 여름 밤, 벨베데레의 정원에서 펼쳐지는 오색 조명의 향연은 필견의 사항이다.

 

오베레스 벨베데레와 정원 


1차대전이 끝난 후부터 벨베데레에는 오스트리아 회화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운테레스(하벨베데레)에는 중세 오스트리아 예술품(로마네스크 및 고틱 작품)과 바로크 작품(Maulbertsch, Messerschmidt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베레스(상벨베데레)에는 19세기 및 20세기 오스트리아 및 국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Amerling, Hausner, Hundertwasser, Klimt, Kokoscha, Romako, Schiele, Waldmuller 등의 작품과 Renoir, Monet등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오베레스 벨베데레에 전시되어 있는 클림트의 '키쓰'(일부) . 이 작품 하나만을 보기위해 벨베데레를 찾는 사람도 무척 많다. 유디트는 어디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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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의 오이겐 공자(Prinz Eugen von Savoy)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노이에 부르크앞에 세워진 기마상

 

오스트리아의 전래 민요에 '고귀한 기사'(Edler Ritter)라는 것이 있다.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가 1717년 오스트리아와 터키의 전쟁(1716-1718)에서 승리한 것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전체 9절로 되어 있는 서사시적인 가사인데 작자는 미상이다. 하지만 멜로디는 그 전부터 있었던 민요에서 따왔다. Als Churasachsen das vernommen 이라는 노래의 멜로디이다. 나중에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이 멜로디를 바탕으로 해서 '프린츠 오이겐 행진곡'을 작곡했다. 비엔나의 호프부르크앞의 드넓은 헬덴플라츠에는 두 개의  기마상이 있다. 하나는 사보이의 프린츠 오이겐 기마상이며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의 샤를르 대공 기마상이다. 노이에 호프부르크 건물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사보이의 프린츠 오이겐 기마상이다. 오이겐 공자는 1663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교회의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다가 당시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 잘못 보여서 어쩔수 없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오이겐 공자는 비엔나로 와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에 합류했다. 오이겐 공자는 1683년에 오토만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에 오스트리아를 위해 전투에 참여하여 뛰어난 전술과 용감함으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로부터 오이겐 공자의 이름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0년후인 1697년에 오이겐 공자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원수가 되었고 아울러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오토만과의 젠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오토만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


오이겐 공자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와 바바리아 연합군을 크게 무찔렀고 이어 1714년 라슈타트 평화조약을 주관하였다. 오이겐 공자는 이 시기에 대건축가인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에게 요청하여 하벨베데레를 건축토록하였다. 오이겐 공자는 1716-1718년의 터키 전쟁에 참가하여 페터봐르다인(Peterwardein) 근처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터키의 요새인 베오그라드 성채를 함락하였다. 하벨베데레 대리석홀 천정의 프레스코화는 이때의 전승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오이겐 공자는 1718년에 파사로비츠(Passarowitz) 평화협정을 이끌어낸 후 이제는 상벨베데레의 건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이겐 공자는 군인으로서도 뛰어 났지만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오이겐 공자는 레오폴드 1세, 요제프 1세, 샤를르 6세의 3대에 걸친 황제들에게 봉사하면서 이들의 자문관으로 큰 기여를 하였다. 오이겐 공자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총독을 지냈다. 오이겐 공자가 막대한 경비가 드는 벨베데레 궁전과 정원의 건축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오이겐 공자는 군인과 정치가이면서 대단한 예술 애호가였다. 그래서 많은 예술품들과 진귀한 서적들을 수집할수 있었다. 오이겐 공자는 당대의 지성인이라고 하는 볼테르, 몽테스큐, 라이브니츠(Leibnitz) 등과 교분을 가지며 지냈다.

 

이제 Der edle Ritter(고귀한 기사)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소개한다. 독일어의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Prinz Eugenius der edle Ritter, wollt dem Kaiser wiedrum kriegen Stadt und Festung Belgerad. Er ließ schlagen eine Brukken, daß man kunnt hinüberrukken mit der Armee wohl für die Stadt.

 

전체 9절로 된 이 노래의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귀한 기사 오이겐 공자, 베오그라드 시가와 요새를 황제에게 되찾아 주기 위해 군대가 시가지로 들어갈수 있는 다리를 놓도록 했다.

2. 다리가 완성되자 마차와 대포들이 다리를 건넜으며 젬린 근처에서 터키군의 진영을 발견했고 아군을 비웃고 조롱하던 적들을 모두 소탕하였다.

3. 8월 21일,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데 터키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적군은 아군보다 세배나 많은 10만명이었다.

4. 오이겐 공자는 참모들과 장군들과 야전군 사령관들을 만나서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적들을 공격토록 했다.

5. 오이겐 공자는 자정에 열두점이 울리면 모두 말에 올라타서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도 적들과 싸우라고 명령했다.

6. 모두들 즉시 말에 올라타서 손에 칼을 뽑아 들고 참호를 건너 숨소리를 죽이고 다가가서 일순간에 돌격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마치 근사한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7. 포병들도 마치 춤을 출 때 장단을 맞추듯 적진을 향해 우상숭배자들을 모두 쫓아버리기 위해 대포를 쏘아보냈다.

8. 오이겐 공자의 전술은 맞아들어갔다. 그는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 그는 장군들이나 야전군 사령관들과 함께 싸웠다. 루드비히 공자는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용감한 병사들이며, 형제들이여 용기를 가지고 적들을 무찌르라'

9. 앞에서 달려가던 루드비히 공자가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그를 사랑했던 오이겐 공자의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오이겐 공자는 루드비히 공자의 시신을 페터봐르다인으로 옮기도록 했다.

 

1686년 부다의 재탈환후 입성하는 오이겐 공자. 귤라 벤추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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