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8구 배링

[참고자료] 중세의 마이스터징거 한스 작스

정준극 2010. 8. 31. 15:25

[참고자료]

중세의 마이스터징거

한스 작스(Hans Sachs)

 

뉘른베르크의 한스 작스 플라츠에 있는 한스 작스 기념상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er Meistersinger von Nürnberg)에 나오는 한스 작스는 실존인물이다. 1494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서 157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한스 작스는 명가수(마이스터징거)이면서 구전시인(Spruchdichter)이며 극작가였다.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된 한스 작스는 평범한 서민가정에서 태어나 모든 역경을 헤치고 성공한 자서전적인 인물이다. 한스의 아버지인 외르크 작스는 재단명장(裁斷名匠)이었다. 귀족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술로서 먹고 사는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한스는 뉘른베르크에서 라틴학교를 나온 후에 15세 때에 구두 만드는 도제(徒弟)로 들어가서 3년 동안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웠다. 그후 다른 도제들이 그런 것처럼 보따리를 하나 들고 유랑의 길을 떠났다. 이를 독일어로 게젤렌봔더룽(Gesellenwanderung)이라고 한다. 도제들이 겪어야 하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때에 그는 인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1세 궁정에서 지내면서 명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뮌헨으로 가서 7년동안 당대의 명가수인 린하르트 눈넨베크(Lienhard Nunnenbeck)의 문하에 들어가 노래공부를 시작했다. 한스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좋은 음성으로 눈부신 발전을 보다 몇 년 후에는 유럽에서도 손색없는 가수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한스 작스

 

1519년 그는 당시 17세의 아름다운 처녀인 쿠니군데 크로이처(Kunigunde Kreutzer)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곱 자녀를 두었다. 당시는 유아사망률이 높았지만 다행하게도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오래 살았다. 1560년 쿠니군데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젊은 과수댁인 바르바라 하르슈너(Barbara Harschner)와 재혼하였다. 한스가 명가수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는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1517)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한스는 마르틴 루터의 새로운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의 개혁사상은 한스의 작품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한스가 쓴 Die Wittenbergisch Nachtigall(1523: 뷔텐버그의 나이팅게일)라는 시는 마르틴 루터를 묘사한 것이다. ‘뷔텐버그의 나이팅게일’은 마르틴 루터의 별명이었다. 바그너사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직접 사용한 Wach auf, ruft uns die Stimme(깨어나라는 소리가 우리를 부른다)라는 노래가사도 한스가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쓴 시이다. 마르틴 루터의 유명한 찬송가인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내주는 강한 성이요)도 실은 한스 작스의 시를 인용한 가사라고 한다. 한스는 평생동안 6천여 작품을 썼다. 그중에서 4천편의 시는 노래로서 작곡되었다. 그리하여 한스 작스는 16세기의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서, 그리고 위대한 명가수로서 존경을 받았다. 한스는 1576년 1월 19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17세기가 되자 한스 작스에 대한 추억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일의 소설가 그림멜스하우젠(Grimmelshausen: 1610-76)이 한스 작스를 모델로 삼은 소설 Der abenteuerliche Simplicissimus(심플리시씨무스의 모험)를 내놓자 한스 작스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을 기본으로 하여 괴테와 빌란트(Wieland)가 시를 썼으며 이어 바그너가 저 유명한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소재로 삼았다. 오늘날 뉘른베르크에는 한스 작스 기념상이 있다. ‘한스 작스 플라츠’(광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장소에 있다. 뉘른베르크의 조각가인 요한 콘라트 크라우써(Johann Konrad Krausser)가 제작한 기념상이다. 뉘른베르크에는 ‘한스 작스 가쎄’라는 거리도 있다. 조각가 위르겐 베버(Jürgen Weber)가 제작한 Ehekarussel(에카루쎌: 결혼회전목마)이라는 분수의 모티브는 한스 작스의 Das bittersüsse eheliche Leben(쓰면서도 단 결혼생활)이라는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스 작스의 흉상은 뮌헨의 명예의 전당(Ruheshalle)에도 전시되어 있다.

 

한스 작스의 또 다른 초상화

 

한스 작스의 작품 중에서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Das Hofgesin der Venus(비너스의 신하: 사육제연극, 1517), Die Wittenbergisch Nachtigall(뷔텐버그의 나이팅게일: 시, 1523), Dialoge(대화: 단편, 1976에 발간), Schlaraffendland(바보나라: 코미디, 1530), Das Narrenschneiden(멍청한 양복장이: 사육제연극, 1534), Der schwangere Bauer(웃기는 농부: 사육제연극, 1544), Der Teufel mit dem alten Weib(악마와 늙은 마누라: 사육제연극, 1545), Der fahrende Schüller im Paradeis(파라다이스를 여행하는 학생: 사육제연극, 1550), Das Kälberbrüten(송아지: 사육제연극, 1551), Die ungleichen Kinder(닮지 않은 아이들: 드라마, 1553), Der Krämerskorb(장삿꾼의 바구니: 사육제연극, 1554), St. Peter mit der Geiss(양한마리를 데리고 있는 성베드로: 코미디, 1555)...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한스 작스 역의 베이스 테오 아담(Theo Adam)

 

알베르트 로르칭(Albert Lortzing)은 1840년에 ‘한스 작스’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1868년에 작곡한 것이다. 괴테는 1776년 Hans Sachsens poetische Sendung(시인으로서 한스 작스의 사명)이라는 시집을 냈다. 요한 루드비히 다인하르트슈타인은 1827년에 ‘한스 작스’라는 제목의 연극을 썼다. 독일 겔젠키르헨(Gelsenkirchen)의 시청은 ‘한스 작스 하우스’라는 명칭의 건물이다. 뉘른베르크에는 ‘한스 작스 김나지움’(고등학교)이 있다. 오버하우젠(Oberhausen), 바이에른, 쾰른, 베를린에도 한스 작스의 이름을 붙인 학교가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한스 작스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상당히 많이 있다. 비엔나의 배링에 있는 ‘한스 작스 가쎄’는 하나의 예이다. 브레멘의 오스터토르슈타인베그(Ostertorsteinweg) 38번지에 한스 작스의 기념상이 있다. 뉘른베르크시가 마련한 ‘한스 작스 상’(Hans-Sachs-Preis)은 1970년대 중반부터 시행하여 온 유명한 문학상이다. 1975년에는 핏체랄드 추크(Fitzgerald Kusz)가 받았고 1976년에는 프란츠 홀러(Franz Hohler)가 받았다.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