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콘트랄토

독창적인 세련미 Sigrid Onegin (시그리드 오네긴)

정준극 2008. 2. 28. 14:25
 

▒ 독창적인 세련미 Sigrid onegin (시그리드 오네긴)

 

 

스웨덴의 스톡홀름 출신의 시그리드 오네긴(1889-1943)은 뮌헨, 밀라노,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러시아 남편인 작곡가 유진 오네긴과 더불어 음악공부를 했다. 원래 이름은 ‘엘리자베스 엘프리데 시그리드 호프만’이었으나 1911년 처음 콘서트에 데뷔할때는 릴리 호프만이라고 이름을 만들었다가 결혼후 시그리드 오네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191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카르멘으로였다. 이후 런던, 파리, 베를린, 비엔나, 뮌헨,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등 세계의 주요 오페라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메트로폴리탄에는 1922-24년의 두 시즌에만 출연하였다. 그는 1912년 슈투트가르트에서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세계초연에서 드리아드(Dryad)를 맡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는 뛰어난 콘트랄토이면서도 메조소프라노 역할까지 부담없이 맡아 찬사를 받았다.

 

아주체나

 

시그리드 오네긴은 슈만-하인크 이래 가장 세련되고 가장 훈련된 콘트랄토 음성을 지녔다. 때로는 슈만-하인크의 뜨거운 열정과 호소력있는 능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지만 실로 오네긴에게는 오네긴 특유의 진정함이 담겨있다. 한마디로 오네긴의 음성은 대리석과 같이 매끄럽고 차가우며 아름답다. 오네긴의 음성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금속과 같은 강렬한 힘이 있으면서도 벨베트와 같은 부드러움이 있다’고 말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음성에는 독창적인 유연성과 신축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예는 쇼펭의 A플랫 임프롬프투(Impromptu)에서 보여준 보칼리제(가사를 사용하지 않는 곡)이다. 이 곡은 오네긴을 위해 특별히 편곡된 것이다. 그보다 더 대단한 감동을 주는 것은 아르디티(Arditi)의 Leggiero invisible이다. 그가 남긴 음반중에서 최고의 레코딩은 마이에르베르의 예언자(Le Prophète)에서 O prêtres de Baal과 도니제티의 루크레지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중세서 드린디시(Brindisi)이다. 특히 브린디시에서 보여준 카덴짜(독창자의 기교를 나타내기 위해 붙인 장식음)는 누구도 따를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그는 음표와 음표 사이를 마치 현악기처럼 정확하고 쉽게 움직일수 있었다. 그의 음역은 3 옥타브에 가깝다.

 

델릴라

 

시그리드 오네긴은 스톡홀름에서 프랑스 아버지와 독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오네긴은 스웨덴 출신으로 분류할수 있지만 부모가 이혼한후 어머니를 따라 독일의 뷔스바덴(Wiesbaden)에 와서 살았으므로 독일 출신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는 어릴때부터 성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어떤 회사의 비서로 일하며 젊은 시절부터 생활을 꾸려 나갔다. 어느날 그는 유명한 마담 샤르르 카이에(Mme Charles Cahier)의 카르멘을 보고 비서생활을 그만두고 성악가의 길을 걷기고 결심했다. 이어 그는 슈팡겐베르크음악원(Spangenberg Conservatory)에 들어가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오네긴은 줄곧 우등생이었다. 이 음악원에서 그는 오이겐 보리소비츄 오네긴(Eugen Borisowitsch onegin) 남작을 만났다. 남작의 어머니 역시 소프라노로서 유명한 마누엘 가르시아의 제자였다. 남작은 피아니스트로서 시그리드의 연주회 반주를 맡아 하는등 후원자로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결국 첫 남편이 되었다. 오네긴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하여 붙여졌다. 그후 1912년 시그리드 오네긴은 슈트투가르트에서 카르멘으로 대망의 오페라 데뷔를 하였다. 몇주 후에는 세기적 테너 카루소의 상대역으로 카르멘을 공연하여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시그리도 오네긴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카루소는 오네긴에게 당장이라도 미국에 함께 가서 메트로에서 공연하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런 모험을 할수 없다는 남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슈트투가르트에서 계속 공부하여 활동했던 시그리드는 2년후인 1914년, 세계무대로의 진출을 결심하였다. 그의 목표는 메트로를 비롯한 미국의 무대였다. 그러나 마침 1차대전이 터지자 러시아인인 남편은 독일에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시그리드는 그런 남편을 숨겨주기 위해 2년동안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시그리드는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세계 최초의 크리소테미스, 마샬린, 체르비네타였던 마르가레테 짐스(Margarethe Siems)의 문하에 들어가 레슨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후인 1919년 첫 남편인 오네긴 남작은 세상을 떠났다.

 

카르멘

 

두 번째 남편 프릿츠 펜트졸트(Fritz Pentzoldt)를 만난 것은 뮌헨에서였다. 펜트졸트는 의사였다. 이때로부터 오네긴은 독일 전역을 다니면서 오페라 출연 이외에도 수많은 리사이틀을 가져 최고의 명성을 쌓았다. 그는 5백여 가곡을 악보 없이 아무 때서나 부를수 있으며 그것도 13개국어로 부를수 있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1922년, 그가 33세 때에 마침내 미국땅을 밟게 되었고 카네기 홀에서 유명한 레오폴드 스토크브스키의 지휘로 리사이틀을 가져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성공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해 가을 오네긴은 메트로에서 엘리자베트 레트버그(Elisabeth Rethberg)와 죠반니 마르티넬리(Giovanni Martinelli)의 파트너로서 암네리스를 맡아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그는 1938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미국을 계속적으로 방문하며 바그너 오페라 출연하는 한편 전미국 순회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독일에는 1920년부터 31년까지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앙상블 멤버로서 활동했고 1931년부터 4년동안은 취리히 오페라에 속하여 활동했다. 그리하여 1931년 이후부터 194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스위스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