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수원

효행기념관(孝行記念館)

정준극 2009. 3. 18. 23:15

효행기념관(孝行記念館)

 


비엔나는 박물관의 도시이다. 유럽의 큰 도시들이 대개 그렇지만 비엔나는 특별히 박물관이 많다. 약 1백개가 넘는다.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이 있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장례박물관, 범죄박물관, 모자박물관, 담배박물관, 커피박물관, 굴뚝청소박물관, 대장장이박물관, 인체해부박물관까지 있는 것을 보면 과연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비엔나 사람들의 박물관 애호정신은 정말 알아 모셔야 할것이다. 무엇이든지 기념될만한 물건들이 있으면 한데 모아 정리하여 뮤지엄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정성껏 보살핀다. 그런 비엔나 사람과 박물관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일이 있다. 비엔나 사람의 박물관 자랑은 한도 끝도 없었다. 하기야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합스부르크 보물박물관 등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이다. 그러므로 공연히 시비를 붙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박물관들이 신통치 못한 한국이지만 그래도 자랑은 해야겠기에 생각다 못하여 한국에는 비엔나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효행박물관 및 효행기념관이 있다고 말하니까 자못 궁금했던지 그게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모르십니까?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죽도록 효도(Filial Duty)하는 것 말입니다’라고 대갈일성하고 효행박물관 및 효행기념관에 대하여 설명했다.


우선 효행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모에게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효행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한국 가정과 사회의 기본이 되어 왔다는 것을 말했다. 역시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식들이야 자라서 독립할 때까지 부모가 인간적으로 보살피는 것인데 자식들이 무슨 의무감으로 부모를 자기보다도 더 죽어라고 위할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녀들을 효행이라는 것으로 속박하면 자녀들의 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서양과 동양의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아무래도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효행에 대하여 이해가 더딘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서는 효도가 대단히 중요하며 다른 나라에 없는 효행박물관과 효행기념관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모두 수원이라는 도시에 있다고 말했다. 수원에는 효행공원이 있고 효원공원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수원대학교가 펼치는 단축 마라톤 대회는 효(孝)마라톤대회이며 수원시가 매년 시행하는 효행상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덧붙여 말했다.

 

 

효행   관은 수원 남쪽의 용주사에 있고 효행기념관은 수원 북쪽 지지대고개에 있는 효행공원 안에 있다. 팔달구 인계동의 경기도문화예술관 부근에는 효원(孝園)공원이 있다. 옛수원 중심지에 있는 화성행궁은 효의 표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모든 발단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다. 25세에 임금이 된 정조대왕은 어찌나 효심이 깊었던지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그리고 불행하게 살아온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효행을 벌였다. 정조대왕은 양주군 매봉산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현릉)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릉(顯陵)이라고 했으며 현릉 옆에 효찰(孝刹)로서 용주사를 건립했고 또한 수원에 역사적인 화성을 축성하였으며 화성행궁을 지었다. 정조대왕은 수도를 아예 수원으로 옮길 생각까지 했다. 수원 북쪽의 지지대고개에 소나무 지대를 조성한 것도 정조대왕이었다. 양주 매봉산에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던 자리는 현재 동대문구 서울시립대학교 자리이다. 용주사는 1790년에 완공했다. 비엔나에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이다. 만일 정조대왕이 모차르트와 친분이 있었다면 사도세자를 위해 레퀴엠(진혼곡)을 작곡해 달라고 의뢰했을 것이다. 그러면 모차르트는 사도세자를 위한 진혼곡을 죽어라고 완성했을 것이다. 이제 용주사에 대한 것은 나중에 설명키로 하고 우선 지지대고개의 효행기념관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자.


경기도 의왕에서 수원으로 넘어가는 구국도 1번길에 지지대고개라는 곳이 있다. 북수원 IC에서 가까운 곳이다. 이곳을 지지대(遲遲臺)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정조대왕이 서울에서 사도세자의 묘소를 가기 위해 수원으로 오면서 어서 성묘하고 싶은 생각에 일행들에게 ‘왜 이렇게 더디냐?’, 즉 ‘왜 이렇게 지지부진하느냐?’고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저 멀리 화산(花山)이 보이는 이곳 지지대고개를 더욱 뜻깊게 만들기 위해 소나무들을 심어 청청한 기상을 표현코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소나무 5백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했다고 한다. 지지대고개로부터 수원 방향으로 약 5km에 이르는 노송지대는 이렇게 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내탕금 1천량! 그거 혹시 저소득층 생보자들에게 줄 교부금 아니었나?

 

지지대고개의 노송

 

효의 도시임을 자처한 수원시는 1987년 지지대고개 일대에 효행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수원 시민들의 휴식과 산책을 겸한 가족 나들이 코스로 만들었다고 뽐내었다. 관리사무소를 설치했다. 2년후인 1989년 7월, 효행공원 안에 효행기념관을 오픈했다. 누군가가 효행기념관을 만들어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효에 대한 근본을 가르치도록 함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고 높은 분들은 마침 예산도 있는지라 그렇게 하자고 결재했을 것이다. 효행기념관이 건립되자 관리사무실을 별도로 설치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공무원들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내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물론 기념관이 설립되면 관리사무소가 필요하며 관리사무소가 생기면 인력이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은 특채하여 충원할수도 있고 본부(시청)에서 이런 저런 인력을 파견할수도 있다. 이건 어린아이들도 아는 3단논법이다.


효행공원에는 정조대왕 기념상이 세워져있다. 조각상은 효행공원이 완공되기 1년전에 건립되었다고 되어 있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 이미 정조대왕의 기념상부터 세웠던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기념상은 조각가 인찬주(安贊周)씨의 작품이다. 기념상 앞에는 커다란 돌거북이 두 마리가 있다. 그런데 서로 나란이 앉아 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어떤 의미로 거북이가 놓여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효행기념관은 아담한 단층 건물이다. 화분들이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호감을 준다. 효행기념관에는 정조대왕의 어진(御眞), 친필등 자료와 수원 화성에 대한 역사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정조대왕은 부모의 은혜 10가지를 경판처럼 판각케하여 후세에 효의 근본을 깨우치도록 했다. 이를 불설부모은중경(佛設父母恩重經)이라고 부른다. 정조대왕은 이 불경을 용주사에 하사했다. 용주사의 대웅보전 건물 옆에 있는 부모은중경탑에도 부모의 은혜 10가지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당대의 서예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씨가 쓴 글이다. 효행기념관에는 부모은중경의 내용이 병풍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부모의 은혜 10가지란 무엇인가?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팸플릿에 적혀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뱃속에서 지켜주신 은혜

2. 고생하시며 낳아주신 은혜

3. 자식을 낳고서야 모든 걱정을 잊으신 은혜

4.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먹여 주신 은혜

5. 마른자리 골라서 갈아 뉘우신 은혜

6. 젖먹여 길러 주신 은혜(수원시가 펴낸 효행기념관 안내 팜플렛에는 젖을 젓이라고 써 놓았음. 공무원들은 한글 철자법도 모르나?)

7. 깨끗한 옷을 입혀주신 은혜

8. 먼 길가면 걱정해 주시는 은혜

9. 자식을 위해 싫은 일도 해주시는 은혜

10. 늙도록 불쌍하게 여겨 주신 은혜


그런데 수원시가 발간한 효행기념관 안내 팸플릿에 나와 있는 10가지의 부모 은혜와 용주사의 부모은중경탑에 적혀 있는 10가지의 부모 은혜가 내용이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용주사의 비석에 적혀 있는 열 번째 은혜는 ‘임종 때 자식 위해 근심하신 은혜’라고 되어 있는데 팸플릿에는 ‘늙도록 불쌍하게 여겨 주신 은혜’라고 되어 있다. 일곱 번째의 경우에도 용주사의 탑에는 ‘목욕 세탁 더러움을 씻어주신 은혜’라고 되어 있는데 효행기념관의 팸플릿에는 ‘깨끗한 옷 입혀 주신 은혜’라고만 적혀 있다. 넓은 견지에서는 뜻이 비슷하지만 그래도 표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데 문제가 있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가? 누구 책임인가?

 

효행기념관의 전시실


효행기념관에는 ‘송충이를 깨문 임금님’이란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정조대왕이 양주 매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옮기고 능행을 하여 가서 보니 묘소에 있는 소나무의 잎을 갉아 먹는 송충이가 많았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그런 송충이를 잡아서 직접 먹으면서 ‘네가 아무리 하찮은 벌레이기로서니 우리 아버지 산소의 소나무 잎을 먹을수 있느냐? 차라리 먹을테면 나를 먹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내용이 ‘효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팸플릿에 비슷하게 적혀 있다. 문제는 그림에 등장한 정조대왕의 모습을 소년처럼 그려 놓은데 있다. 정조대왕은 25세에 임금이 되었고 화산으로 능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거의 40에 이른 때였다. 40세의 임금님을 20대의 어린 청년으로 그려 놓았으니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능행에서는 아래 그림에 나오는 복장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건 정조대왕 능행도를 보면 안다. 그림 한 장이라도 어린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도록 세심하게 배려되어야 할것이다. 

 

정조대왕이 화산 사도세자의 능에서 송충이를 씹어 먹고 있는 그림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수원시의 팸플릿에 보면 효행기념관의 부대시설로 효행공원 및 프랑스군참전기념비가 있다고 적혀 있다. 프랑스군은 북괴 김일성에 의한 6.25전쟁 때에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하여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희생했다. 이를 기억하여 1974년 프랑스군의 격전지였던 지지대고개 인근에 참전비를 세웠으며 2001년 현재의 모습으로 단장해 놓았다. 그런데 현재 기념조형물 앞의 시멘트 바닥이 대부분 너덜너덜 파손되어 보기에 민망스럽기는 하다. 그건 그렇고, 프랑스군참전기념비는 정조대왕을 기리는 효행기념관과는 아무런 연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효행기념관의 부대시설이 될수 없다. 효행기념관 관리사무소가 프랑스군참전기념비의 관리를 함께 맡아 하고 있다고 해도 효행기념관의 부대시설이라고 못박아서 적어 놓을수는 없다. 프랑스 정부가 알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사족이지만 정조대왕은 천주교를 대단히 박해했다. 1791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 정조대왕은 천주교도인 윤지충이란 사람을 잡아서 처형했다.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였다. 몇 년후 정조대왕은 프랑스에서 온 천주교 신부가 조선 땅에 와서 포교하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고 해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을 시작했고 결국 사화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때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정조대왕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효행공원이 조성되기 전에 만들어진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1번 국도 의왕-수원 구간에 있는 지지대 휴게소. 8작 지붕의 위용이 마치 궁전 같다. 

 

효행공원에 있는 정조대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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