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포그럼이 뭐길래?

유태인에 대한 민족학살(Pogrom)

정준극 2009. 11. 11. 06:30

민족학살(Pogrom) 집중탐구

유태인은 왜 대량학살을 당해야 했나?

 

포그럼(Pogrom)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 집단에 대하여 못살게 구는 폭력적인 행동을 말한다.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 집단의 사람들을 폭행하여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그들의 거주지 또는 사업장소나 종교 센터(사원이나 회당)를 파괴하고 약탈하는 폭력적인 행동을 말한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것은 대표적인 포그럼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동유럽의 세르비아 등지에서 자행되었던 인종청소도 포그럼의 대표적인 예이다. 포그럼은 개인적인 것 보다는 집단성을 가진다. 한 마을에 국한하여 일어날수도 있지만 나라 전체에서 또는 종교집단 간에 일어날수도 있다. 예를 들면 무슬림과 기독교도간의 집단 학살이다. 근세에 이르러서 포그럼이라는 단어는 특별히 유태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치시대에 주로 유태인들이 포그럼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포그럼이라는 단어는 러시아어이다. 약탈을 하여 해를 끼친다는 뜻이다. 포그럼이란 단어가 처음 적용된 것은 19세기 제정러시아에서였다. 당시 제정러시아에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벌어졌다. 유태인들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의 상점이나 공장을 파괴하며 그들을 구타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죽이기까지 한 핍박이었다.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 이후에 독일에서 추방된 폴란드계 유태인들이 갈곳을 정하지 못하고 걱정중에 있는 모습.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유태교와 러시아정교회의 분쟁이 실마리였다. 러시아정교회는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질녁까지)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태인을 귀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 급한 사정이 있어서 유태인이 경영하는 약국에 갔더니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며 문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 러시아인이 홧김에 유태인 약방주인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것이 시초였다는 얘기가 있다. 그후 제정러시아에서의 포그럼은 점차 확산되어서 수천명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수만명의 유태인들이 살던 집을 떠나 방황하였다. 사정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에도 좋아지지 않았다. 러시아나 폴란드에서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사회노동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오히려 볼세비키주의자들을 동정한다고 하여 핍박을 받았다. 유태인들은 이래저래 박해를 받았다.

 

유태인 포그럼. 전쟁에 나가서 부상당한채 집에 돌아오니 아내와 딸이 죽어 있었다. 유태인 랍비가 경전을 읽으며 위로하지만 위로가 될수 없다. 이웃 사람들도 겨우 살아 남았기 때문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채 서 있다. 이것이 러시아 포그럼의 현주소였다. 왜 학살 당했나?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태인에 대한 포그럼은 19세기 제정러시아에서가 처음이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폭력적인 학대는 2천년 전부터 있어온 사항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이집트)에 있으면서 노예생활을 했던 것, 그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통을 당했던 것도 포그럼의 일종이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그 때는 노예로서 부림을 당했던 것이며 집단학살이나 집단추방과 같은 포그럼은 없었다. 잘 아는 대로 애급은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들을 추방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버틴바 있다. 출애급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들은 나라를 세우고 그런대로 안정되게 살았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로마와 그리스의 지배를 받을 때에 이에 항거하던 유태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한 일이 있다. 이것이 아마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에 대한 첫 번째 포그럼일 것이다. 주전 2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 땅을 점령한 이래 이들은 유태인에 대하여 가혹한 핍박을 가하였다. 이들은 특히 유태인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시키려고 노력했다. 셀루시드 제국이 유대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억합하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스라엘의 장군인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셀루시드 제국군을 몰아낸 것은 그 때의 일로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로 유명하다. 이 오라토리오에서 마카베우스 장군이 셀루시드 침략군을 물리치고 개선하자 백성들이 부르는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See the Conquering Hero Comes)는 유명한 노래이다. 그리스는 유태인들을 크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점령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알렉산드리아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인데 그곳에서 유태인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을 보고 참을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주후 38년 로마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였을 때에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시대로부터의 반유태 정서가 살아 있어서인지 대규모의 반유태인 행동이 일어났었다. 당시 강대국들(로마, 그리스 등)은 유태인들이 누르면 덤벼든다는 것을 알고 참으로 다루기 힘든 민족이라고 생각하여 아예 뿌리를 뽑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에드워드 포인터(Edward Poynter)의 '이집트의 이스라엘 민족'. 노예로서 지냈다.

 

주후 1-2세기에 유대 땅에서는 로마제국의 압정에 항거하고 독립을 원하는 열성 유태인들의 항거가 빈번했다. 그런 유태인들을 열성당원(Zealot)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도 그러했다. 예수의 제자 중에 열성다원 시몬도 있었다. 로마제국은 예수라는 사람이 혹시 유태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까보아 걱정이 되어 ‘그렇다면 반역죄로 몰아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로마에 빌붙어 살던 유태인들이 동조했을 것이다. 아무튼 로마제국은 예수를 처형한 후에도 기회있을 때마다 항거하는 유태인들을 계속 제압하였으며 이와 함께 초기 기독교인에 대하여도 폭력적인 박해를 가하였다. 로마제국은 초기기독교인들이 유태교와는 다르지만 결국은 유태인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4세기에 가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자 이번에는 기독교인들이 유태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유태인들이 메시아(예수)를 잡아 죽였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기독교인들은 유태교 회당(시나고그)을 파괴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실상 유태인들은 로마제국보다는 이슬람 땅에서 더 마음조리지 않고 지냈다.

 

1938년 크리스탈나하트에 철저하게 파괴된 유태인 상점.  마그데부르크. 지나가는 독일 행인들 웃음.

 

[중세로부터 현대 초반까지]

비록 무슬림이 기독교인들보다 유태인에 대하여 관대했다고는 하지만 11세기에 들어서서는 무슬림들도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몇 번에 걸쳐 유태인을 박해했다. 무슬림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괄시를 받았다는 것을 마음 속으로 잊지 않고 있었다. 무슬림들이 유태인들을 핍박한 사건은 1011년에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일어난 사건과 1066년 그라나다에서 일어난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아무튼 무슬림 폭도들이 무조건 유태인들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약 4천명의 유태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여 무슬림이 지배하고 있는 성지를 탈환하겠다고 나섰을 때에도 유태인들은 희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인 장본인들이니 곱게 보아줄수 없어서 십자군 전쟁과 함께 박해를 시작하였다. 1096년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유태인 학살이 그것이었다. 이어 런던과 화란의 요크에서도 1189-1190년 사이에 유태인 에 대한 집단박해가 있었다. 아, 나라 없는 설음이여!

 

14세기에 유태인들은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산채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일을...

 

검은 역병이라고 불리던 페스트가 처음 유럽을 강타했을 때도 유태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유태인들이 검은 역병을 전파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는 유태인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죽여서 피를 나누어 마신다는 소문이 퍼졌다. 페스트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기  때문에 역병에 걸려 죽어 나갔다는 유언비어도 있었다. 아무튼 무슨 나쁜 일만 생기면 화살은 유태인들에게 향하였다. 1348년에는 쉴롱(Chillon), 바슬(Basle), 슈투트가르트, 울름, 슈파이어(Speyer), 드레스덴, 스트라스부르, 마인츠 등지에서 유태인들을 역병의 주범으로 간주하여 자행한 학살은 실로 대규모였다.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폴란드로 허겁지겁 도망을 갔다. 당시에는 참으로 다행하게도 폴란드가 유태인에 대하여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역병이 번지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또 다시 유태인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독교인들은 유태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실은 비밀유태주의자들이라고 믿고 이들을 색출하여 학살하였다. 이 일에는 가톨릭교회가 간혹 앞장을 서기도 했다. 이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대대적인 유태인 추방운동이 시작되었다. 1648-1654년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 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는 유태인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 교인들도 대학살을 당했다.


인도 칼리스탄에서의 반시크 포그럼. 1984년. 인도 사람들, 그렇게 안 보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