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유토피아의 수난

정준극 2010. 2. 9. 06:01

유토피아를 주창한 토마스 모어의 수난

 

헨리는 가톨릭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하고 수도승과 수녀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시골을 방황하면서 음식을 구걸하고 하룻밤 잠자리를 찾으며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헨리는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 및 기타 소득을 국왕의 개인용으로 만들거나 궁정의 귀족들과 장관들에게 논공행상 차원에서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귀족과 영주들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새로운 귀족 영주들은 새로운 영국, 즉 성공회 국가를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물론 헨리의 개혁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다. 전직 수상(Chancellor) 토마스 모어(Thomas More)경과 로체스터 주교인 존 피셔(John Fisher)를 포함하여 상당수 고위급 인사들이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폐하! 통촉 하옵소서’를 연발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앤 볼레인과의 결혼이 중혼(重婚)이라고 주장했으며 1533년 헨리와 앤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간주하는 도전을 하였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사람은 헨리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헨리8세의 반대파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저항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저항은 왕실 내부로부터 있었다. 캐서린왕비를 추종하는 궁정인들이 헨리의 가톨릭 핍박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역시 모두 처형  당했다. 사형집행인의 도끼가 잠시도 쉬는 날이 없었다. 어떤 사형집행인은 얼마나 도끼질을 해댔던지 팔에 근육통이 생겼다는 후문이 있다.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헨리의 소생 중, 유일하게 생존한 딸 메리는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한 여러 가지 사태들 때문에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메리는 ‘두고 보자! 우리 오마니의 웬수들아!’라면서 그저 이를 악물고 굴욕을 참으면서 지냈다. 

 

토마스 모어(1478-1535). 성자라는 호칭이 붙었다.


헨리의 이혼선언은 캐서린과의 결혼이 불법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사생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메리의 왕실 타이틀(Princess Mary)은 하루아침에 모두 박탈되었다. 왕위서열 1위였던 메리의 위치는 앤 볼레인의 소생의 딸인 엘리자베스로 바뀌어졌다(나중에 세번째 부인인 제인 세이모어에게서 에드워드가 태어나자 당분간 엘리자베스는 서열 2위, 메리는 3위가 되었다). 메리는 버림받았고 위협받았으며 학대와 천대를 받았다. 그 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모와 만나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 살도록 했다. 메리에게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불명예는 자기가 사생아라는 것과 로마가톨릭으로서 교황이 아닌 헨리가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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