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블라디 메리

정준극 2010. 2. 9. 06:02

레이디 메리에서 블라디 메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헨리가 불쌍한 어머니 캐서린의 웬수라는 독심을 품은 메리는 가톨릭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신앙 때문이라기보다는 말 할 수없이 응축된 비분과 원망 때문에 가톨릭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는 메리가 미운 오리새끼였지만 자식은 자식이니만치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했다. 매일처럼 ‘충성!’을 외치면 자식으로 인정하여서 용서해줄 심산이었다. 결국 거의 강압적인 방법에 의해서 메리가 헨리에게 복종을 다짐하자 헨리는 인심이나 쓰듯 메리를 궁정에서 다시 지낼 수 있도록 윤허하였다. 하지만 명칭은 ‘프린세스(공주) 메리’가 아닌 ‘레이디 메리’(Lady Mary)라고 부르도록 했다. 공주의 신분에서 그냥 귀족부인 신세로 격하 된 것이다. 메리는 앞날을 생각하여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다. 헨리에 대한 복종은 겉으로의 복종일뿐, 그 마음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치유될 수 없었다. 자기 어머니를 몰아내고 안방 차지를 한 앤 볼레인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앤 볼레인이 낳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증오심까지 키워 나갔다.

 

여왕이 되기 전의 메리


그러는 와중에 헨리는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을 처형하고나서 곧 바로 세 번째 왕비 제인 세이무어(Jane Seymour)와 결혼했다. 결혼 1년이 지나자 헨리는 제인 세이무어와의 사이에서 영국 왕실이 그토록 갈망하던 왕자아기씨를 얻었다. 1537년 헨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6세이다. 헨리는 유일한 왕자인 에드워드의 탄생을 보고 자기가 주도한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상당히 잘한 처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헨리는 영국도 유럽의 일부 국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왕국으로 노선을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헨리는 왕자인 에드워드를 영국 개신교의 새로운 신앙 형식에 적응하도록 양육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6세는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소년시대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어린 왕의 죽음은 결국 서열상 악밖에 남지 않은 메리가 여왕이 되는 길을 열어 주었고 그로 인하여 영국은 다시 가톨릭 국가로서 원위치하는 난관을 겪게 되었다.

 

헨리8세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 

 

[칵테일 블라디 메리]

블라디 메리라는 칵테일이 있다. 보드카에 토마토 주스를 섞고 여기에 다른 양념을 넣은 것이다. 양념으로서는 워체스터셔어(Worcestershire) 소스, 타바스코 소스, 비프 콘소메 또는 부이용(Bouillon), 호스래디쉬, 셀러리, 올리브, 소금, 후추, 레몬주스, 셀러리 소금, 케이안느 후추 등을 편한대로 넣은 것이다. 블라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칵테일의 색깔이 피처럼 붉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메리 여왕이 성공회를 핍박하는 중에 너무 많은사람들을 죽여서 피가 강물처럼 흘렀기 때문에 블라디 메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블라디 메리리라는 명칭의  칵테일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이라고 한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처음 그런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시카고의 Bucket of Blood라는 바에서 메리라는 종업원이 만들어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칵테일 블라디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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