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음악가 워킹투어

비엔나 음악가 워킹 투어 1

정준극 2016. 3. 18. 15:42

비엔나 음악가 워킹 투어 1

 

음악의 도시 비엔나! 클래식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로서는 평생에 한번은 가 보아야 하는 고전음악의 메카이다. 비엔나에 가서 그동안 마음으로만 존경했던 위대한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감회에 젖는 것도 음악 애호가로서 커다란 기쁨이 아닐수 없다. 음악을 사랑하여서 비엔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비엔나의 거리거리마다 남아 있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탐방해 본다. 클래시컬 뮤직 워킹 투어이다. 비엔나 시내에 한정된 탐방이지만 그래도 하루이틀로서는 안된다. 최소한 며칠은 걸릴수 있는 순례의 길이다. 며칠이 걸리더라도 평생에 보람있는 발걸음일 것이다. 사실상 본 블로그에서는 여러 파트를 통해서 비엔나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내용을 실었지만 아무래도 통합적인 의미에서 음악가 탐방 워킹 투어 프로그램을 정리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정리해 보았다. 다른 파트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새롭게 추가되어 있으니 읽어볼만 하다는 생각이다.

 


슈타트파르크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황금상. 비엔나의 이콘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상 전경, 슈타트파르크


비엔나는 수많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활동했고 살았던 곳이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알반 베르크, 요한네스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 프레데릭 쇼팽, 칼 체르니, 안토닌 드보르작, 고트프리드 폰 아이넴,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요제프 하이든, 엠메리히 칼만, 안톤 카라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요제프 란너, 프란츠 레하르, 프란츠 리스트, 구스타브 말러, 칼 밀뢰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오토 니콜라이, 안토니오 살리에리, 프란츠 슈미트, 아놀드 쇤버그(아르놀트 쇤베르크), 프란츠 슈베르트, 막스 슈타이너, 로베르트 슈톨츠, 오스카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동생들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 프란츠 폰 주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안토니오 비발디, 휴고 볼프, 칼 미하엘 치러, 프레데릭 쇼팽, 안토닌 드보르작, 바그너와 베르디, 그리고 침머만과 쳄린스키에 이르기까지 실로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곡가들이 비엔나에서 살았고 최소한 비엔나를 거쳐갔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의 애국가를 작곡하신 안익태 선생도 비엔나에서 공부하고 작곡을 했다. 비엔나에서 이들 위대한 작곡가들의 발자취를 일일히 탐방하자면 며칠은 족히 걸린다. 한정된 일정의 여행자들로서는 힘겨운 탐방일지 모른다. 혼자서 지도보고 찾아 다니려면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니다. 그래서 비엔나 시내를 중심으로한 시티 워크 가이드를 마련했다.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비엔나 시내의 역사적인 모습도 함께 즐길수 있는 지상 가이드이다. 

 

비엔나 중심지역. 성당들의 고딕식 타워가 비엔나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음악가 시티 워킹 투어는 비엔나의 중심인 성슈테판대성당(슈테판스돔)으로부터 시작하자.

 

슈테판스돔(Stephansdom): 슈테판스돔(성슈테판대성당)은 비엔나의 이콘이다. 슈테판스돔은 수많은 음악가들의 활동과 삶을 지켜본 증인이다. 바이올린 협주곡인 '사계'로 유명한 안토니오 비발디는 작곡가이기도 했지만 가톨릭 교회의 사제이기도 했다. 비발디는 이탈리아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가 초청하는 바람에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비엔나에 왔다. 그러나 비엔나에 온 바로 그 다음 해에 자기를 후원해 줄것으로 기대되었던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는 별로 의지할 데가 없어서 빈곤 속에서 지내다가 역시 얼마후에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가 1741년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슈테판스돔에 남아 있다. 그것을 보면 비발디의 장례식(영결미사)은 슈테판스돔에서 치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발디가 세상을 떠난 그 즈음에 소년 하이든이 슈테판스돔에서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슈테판스돔의 소년합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슈테판스돔의 사망자 명부에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안토니오 살리에리, 프란츠 슈베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름들이 올라와 있다. 이들에 대한 영결미사 또는 추도미사가 슈테판스돔에서 거행되었다는 증거이다. 베토벤은 교구가 달라서 알저그룬트의 교회에서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슈테판스돔에서는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식도 거행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명의 자녀들 중에서 두명이 슈테판스돔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 사실을 기록한 명판이 슈테판스돔 안에 설치되어 있다. 

 

슈테판스돔 회중석 회랑의 오른편에 있는(징거스토르 쪽) 성카타리나 카펠레의 입구에 붙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 명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베버가 1782년 8월 4일 본당신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넷째 자녀인 요한네스와 여섯째 자녀인 프란츠가 슈테판스돔에서 세례를 받았다. 1791년 12월 5일 슈테판스돔의 카펠마이스터 보좌인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인 12월 6일에 그를 추도하는 진혼곡이 연주되었으며 크로이츠카펠레(십자가 예배처)에서는 그에 대한 영결미사가 올려졌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식도 슈테판스돔의 크로이츠카펠레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명판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에 즈음해서 슈테판스돔이 설치한 것이다. 2006년이다. 

 

모차르트는 세상을 떠나기 7개월전인 1791년 5월에 슈테판스돔의 음악감독 자리에 응모했다. 당시 슈테판스돔의 음악감독은 나이가 많고 병중이어서 어차피 그만 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생활비가 궁핍했던 모차르트는 슈테판스돔의 음악감독을 맡아해서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슈테판스돔의 음악감독은 아직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정식으로 임명될 수는 없었다. 모차르트는 앞으로 얼마후에는 음악감독이 될 것으로 믿어서 그때까지는 무보수로 봉사하겠다고 자청했다. 슈테판스돔은 모차르트에게 '정 그렇다면 당분간 카펠마이스터 보좌로 있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슈테판스돔의 내부에 붙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명판을 보면 모차르트가 슈테판스돔의 카펠마이스터 보좌(Kapellmeister Adjunktstelle)에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아무튼 모차르트로서는 그것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모차르트는 슈테판스돔의 음악감독으로 정식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해 12월 5일이었다. 모차르트는 슈테판스돔의 인근에 있는 라우엔슈타인가쎄(Rauhensteingasse) 8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건물은 철거되어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캐른트너슈트라쎄의 슈테플(Steffl) 백화점의 뒷편에 붙어 있는 집이다. 하지만 기념명판을 붙어 있다.

 

슈테판스돔에 있는 성캐터린카펠레.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슈테판스돔 뒷현 문으로 시신이 운구되어 나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영결미사는 지금의 구내 기념품 상점 옆에 있는 십자가카펠레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비너 노이슈타트 제단이 있는 쪽을 통해서 나갔다는 것이다.

 

슈테플 백화점의 뒷편. 라우엔슈타인가쎄 8번지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그런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라우엔슈타인가쎄 8번지 집에 붙어 있는 모차르트 서거의 집이라는 명판. An dieser Stelle stand bis 1849 das Haus in welchem Mozart am 5. Dezember 1791 gestorben ist. 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이곳에 1849년까지 1791년 12월 5일에 서거한 모차르트가 살았던 집이 있었다'이다. 비엔나악우회가 1927년에 설치했다.

 

요제프 하이든은 여덟살 때에 고향 로라우(Rohrau)를 떠나 비엔나에 와서 슈테판스돔의 소년합창단원으로 무려 9년이나 봉사했다.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얼마후에 슈테판스돔의 소년합창단원이 되었고 형제는 이곳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하이든은 28세가 되던 1760년에 슈테판스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하이든은 자기가 사랑하던 여인과 결혼하지 못하고 나이 많은 그의 언니와 결혼했다. 그 여인의 아버지가 큰 딸을 두고 작은 딸 먼저 결혼하는 법은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하이든이 사랑했던 여인은 하이든과 결혼하지 못하게 되자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평생을 수녀로 지냈다.  

 

슈테판스돔의 내부, 성당 기념품 상점 근처에 있는 십자가 예베처(크로이츠카펠레).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1663-1736)의 묘지가 있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는 신기하게도 수염이 조금씩 자라기 때문에 매년 날을 잡아서 성당 사제들이 수염을 깎아 준다고 한다. 이 카펠레에서 모차르트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그에 대한 명판이 제단 아랫쪽에 부착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장례미사가 거행된지 거의 60년 후인 1849년에는 '비엔나 왈츠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영결미사가 슈테판스돔에서 거행되었다. 영결미사가 거행되는 날, 비엔나의 시민 수천명이 슈테판스돔으로 몰려와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석하게 지켜보았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37세 때에 슈테판스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예티(Jetty)라는 애칭의 소프라노 헨리에타 트레프즈였다. 예티는 그때 44세로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보다 7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리고 예티는 이미 자녀를 일곱명이나 낳은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걱정들을 했다. 그러나 일단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것이었고 또한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매니저로서 남편을 더 유명하게 만드는 일에 내조를 아끼지 않아서 오히려 찬사를 받았다.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Deutschordenshaus): 슈테판스돔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7번지 골목길에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가 있다. 튜톤종단의 본부와 보물전시실과 교회가 있는 건물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정으로 통하는 입구에 들어서면 벽에 모차르트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고향인 잘츠부르크를 떠난 모차르트가 1781년 3월 18일부터 5월 2일까지 달반을 이 건물에서 지냈다는 내용의 명판이다. 25세의 젊은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고용주인 대주교와 마찰을 빚고서 단연 잘츠부르크를 떠나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왔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그저 무작정 비엔나로 온 것이다. 당장 기숙할 거처가 없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이 있었다. 오늘날의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이다. 모차르트는 대주교 저택의 하인들 방에서 힘들게 한달반을 지냈다. 위대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대주교 저택의 하인들과 함께 누추한 곳에서 지냈던 것이다. 자기의 처신을 한심하게 생각한 모차르트는 겨우 하숙방을 구해서 대주교의 저택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자기를 해고한 고용주의 집에 다시 들어가서 지낸다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모차르트가 새로 하숙을 구한 집은 페터스키르헤 뒷편에 있는 밀르흐가쎄 1번지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요제프 2세 황제의 부탁으로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밀르흐가쎄 1번지 하숙집의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에는 18세기 스타일의 작은 연주회장이 있다. 이곳에서 비엔나 모차르트 앙상블이 정기적인 연주회를 갖고 있다.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의 입구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 명판. Wolfgang Amadeus Mozart wohnte im Deutschen Hause vom 16. Marz bis zum 2. Mai 1781이라고 적혀 있다.  1906년 설치했다.

 

요한네스 브람스도 도이체스오르덴스하우스에서 1863년부터 1865년까지 2년 동안 살았다. 이 저택의 다락방에서였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겨우 이 저택의 다락방에 세들어서 살았다. 이 저택의 어떤 방에서 청년 모차르트가 살았었다는 것을 알고 우정 이 저택에 세들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브람스는 말년에도 하이든이 살던 집에 우정 세들어서 살았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징거슈트라쎄 7번지의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에서 나오면 바로 블루트가쎄(Blutgasse)이다. 블루트가쎄 3번지와 9번지 집의 내정은 마치 중세에 머물러 있는 듯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 집에서 19세기 비엔나의 작곡가인 벤첼 뮐러(Wenzel Müller: 1767-1835)가 '작은 새 한마리가 날아왔네'(Kommet ein Vogerl geflogen)를 작곡했다. 벤첼 뮐러는 아마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내정(호프)을 보고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사실 이 노래는 독일의 전통민요였는데 벤첼 뮐러가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독일의 지그프리트 옥스가 여러 유명 작곡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여서 변주곡을 만든 것이 있다. Kommt ein Vogel geflogen이다. 블루트가쎄의 끝에서 돔가쎄가 연결된다.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 징거슈트라쎄 7번지이다.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Mozarthaus Vienna): 돔가쎄(Domgasse) 5번지는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이다. 전에는 '피가로하우스'(Figarohaus)라고 불렀던 건물이다. 모차르트가 1784년 9월 29일부터 1787년 4월 24일까지 약 3년을 살았던 집으로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살았던 집은 여러 곳에 있지만 그가 세들어서 살았던 건물과 방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돔가쎄 5번지 밖에 없다. 모차르트가 주로 생활했던 1층(우리 식으로는 2층)에는 비교적 넓은 방이 네개나 있고 여기에 두개의 작은 방과 부엌이 있다. 모차르트는 1층을 모두 사용하며 여유있게 살았다. 모차르트가 이 집에서 살았던 3년의 기간이 모차르트의 전생애에서 가장 행복했고 풍요로운 시기였다고 본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살 때에 불후의 명작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서 여러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에는 여러 유명한 음악가들이 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모차르트는 손님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고 당구를 함께 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보면 집안에 당구대도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모차르트가 당구대에서 작곡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잘츠부르크에 있던 아버지 레오폴드가 결혼한 아들을 만나보기 위해 비엔나를 찾아 왔을 때 이 집에서 1785년 초에 두달여 동안을 머물렀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와 같은 친구'라고 부른 요제프 하이든도 이 집을 몇번 방문했었다. 모차르트의 청년 제자였던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은 모차르트의 배려로 이 집에서 무려 2년이나 기숙하였다. 훔멜은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 성공한 인물로서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태어났다.

 

돔가쎄 5번지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 전에는 '피가로하우스'라고 불렀었다.

 

베토벤이 처음 비엔나에 와서 모차르트를 만났던 것도 이 집에서 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명성을 익히 듣고 모차르트로부터 레슨을 받기 위해 본으로부터 비엔나를 찾아 왔으나 얼마후 본의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모차르트로부터 레슨을 받지 못했다. 베토벤이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1792년에 다시 비엔나를 찾아 왔을 때에는 이미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하이든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는 6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세계를 다시한번 발견할수 있다. 그의 가족들, 그의 친구들, 심지어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사람들의 면모도 볼수 있다. '모차르트하우스 비엔나'에서 돔가쎄 2번지의 아치 골목을 통해 나오면 바로 슈테판스돔의 뒷편이다. 슈테판스돔 뒷편에는 유명한 카피스트란 강론대가 있다. 이 강론대의 아래에 십자가 채플(카펠레)가 있었다.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시신이 마차에 실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로 향했다고 한다.

 

슈테판스돔 뒤편, 카피스트라노 조각이 있는 곳 옆의 문을 통해 영결미사를 마친 모차르트의 시신이 운구되어 이곳에서 마차에 실려 캐른트너토르를 거쳐서 성밖의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로 향했다고 한다. 캐른트너토르는 현재 자허호텔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비엔나에 온 모차르트는 처음 얼마 동안은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에서 하인들과 함께 기거하였으나 결국은 하숙집을 하나 구해서 거처를 옮겼다. 현재의 페터스키르헤 뒤편에 있는 밀르흐가쎄(Milschgasse) 1번지의 집이다. 이 집은 장차 모차르트의 부인이 될 콘스탄체가 살던 집이었다. 만하임으로부터 비엔나로 이사온 콘스탄체의 가족들은 이 집에서 하숙을 경영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잠시 이 집에서 거처하며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


오른쪽 건물이 밀르흐가쎄 1번지이다. 붉은 원으로 그린 곳에 기념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중안의 비교적 하얀 건물은 페터스키르헤(베드로교회) 뒷편이다.

모차르트가 1781년에 이 집에서 지내면서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는 내용의 기념명판. 1구 밀르흐가쎄 1번지.

                                           

구 비엔나대학교(Alte Universität): 슈테판스플라츠 6번지 통로를 통해서 볼차일레(Wollzeile)로 나갈수 있다. 슈테판스플라츠 6번지는 돔무제움(Dom Museum)이 있는 건물이다. 입구로 들어가서 내정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나가면 중간에 유명한 비너슈니첼 식당인 휘글뮐러(Figlmüller)를 만난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배커슈트라쎄(Bäckerstrasse)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구비엔나대학교를 만난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예수회교회(Jesuitenkirche)가 있다. 아름다운 교회이다. 1627년에 건설되었다. 일명 대학교교회(Universitätskirche)라고도 한다. 비엔나대학교의 소속교회였기 때문이다. 예수회교회에서는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매주 미사시간에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비엔나 출신인 위대한 작곡가들의 미사음악을 연주한다. 주일 미사때에 이런 연주를 하는 교회는 비단 예수회교회뿐만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너키르헤, 미하엘러키르헤, 페터스키르헤, 미노리텐키르헤 등등 비엔나의 교회들에서는 주일 미사 때에 위대한 작곡가들의 미사곡들을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비엔나에 체류하는 기간 중에 일요일이 포함되어 있으면 한번 만사 제쳐놓고 비엔나 중심가의 교회를 찾아가서 미사도 구경하고 교회 합창단과 솔리스트들이 부르는 미사곡도 듣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프부르크의 궁정교회(부르크카펠레)에서는 주일의 미사시간에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연주가 있다. 슈테판스돔에서도 물론 주일 미사 때에 아름답고 성스러운 미사음악을 들을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주일 미사 전에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있으므로 조용한 가운데 오르간 음악을 듣는 것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의 예수이텐키르헤. 왼편이 오스트리아 학술원(구비엔나대학교본분건물), 오른편이 기숙학교인 김나지움. 오른편 건물의 벽면에는 슈베르트가 이곳에서 기숙하면서 공부했다는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비엔나 구대학교가 있었던 곳은 독트로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Dr.-Ignaz-Seipel-Platz)이다. 이 광장의 중앙에 예수회교회(예수이텐키르헤)가 있다. 예수회교회를 바라보면서 왼편에는 비엔나대학교 본부였던 건물이 있고 오른편에는 아카데미셰스 김나지움(Akademisches Gymnasium)과 제국시립신학원(Stadtkonvikt)이 있던 건물이 있다. 구비엔나대학교 본부건물은 현재 오스트리아 학술원이다. 오른편의 건물인 김나지움에서는 1808년부터 1813년까지 5년 동안 당시 11세였던 프란츠 슈베르트가  궁정합창단원으로서의 철저교육을 받았다. 김나지움은 오늘날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다. 그러한 내용이 건물 외벽에 명판으로 붙어 있다. 힘들게 독트로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까지 와서 슈베르트에 대한 명판을 보고 약간이나마 감동하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명판의 내용이 독일어로 써 있고 더구나 세월이 흘러서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모를수가 있지만 그래도 감동적이라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슈베르트가 이 건물에서 음악교육을 받을 당시에 궁정음악감독은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였다.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서 슈베르트를 여러 군데에 소개하였다. 살리에리는 슈베르크가 변성이 되어 더 이상 소년합창단원으로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자 3년 동안 무료 개인레슨을 해주기도 했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소년 시절에 거처했던 건물이라는 명판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 In diesem Hause des einstigen k.k. Stadtkonviktes besuchte Franz Schubert von 1808 - 1813 das akademische Gymnasium als Pensionär & Hofsängerknabe gestiftet v. Wiener Männer Gesang Verein 1924 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이집에서 프란츠 슈베르트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아카데미 김나지움의 학생으로서 또한 궁정소년합창단원으로서 제국신학원기숙사에 거처했었다. 1924년에 비엔나남성합창연맹이 설치했다'이다.

구비엔나대학교 본부건물 전경

 

예수이텐키르헤(예수회교회)를 정면으로 보았을 때에 왼편에 있는 건물이 오스트리아학술원(Österreich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Austrian Academy of Sciences)이다. 건물 외벽의 양편에 소년이 물고기 또는 바실리카라고 하는 괴수를 붙잡고 마치 놀고 있는 것과 같은 조각이 있어서 특별한 건물이다. 독토르 이그나스 자이펠 플라츠 2번지이다. 요즘은 일반인들에게 오픈하고 있다. 다만, 무슨 행사가 있는 날에는 들어가서 볼수가 없다. 이 건물에 있는 대강당에서 1808년 3월 27일 요제프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하이든의 옛날 제자였던 베토벤도 참석했다. 하이든의 위대한 오라토리오인 '천지창조'가 연주되었다. 하이든은 그동안 그가 받은 영예의 훈장과 메달을 모두 달고 세단의자에 실려서 참석했다. 운집하였던 사람들은 노작곡가에게 한없는 박수를 보냈다. 하이든이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행사였다. 하이든은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거하고 있던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6구의 하이든가쎄 19번지에 있는 집에서였다. '하이든하우스'라고 불리는 이 집에서 한때 브람스도 살았었다. 그래서 오늘날 하이든 기념관이기도 하지만 브람스 기념관을 겸하고 있다. 하이든이 위중하다는 얘기를 들은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보내어 하이든의 집을 경비토록 하였다. 나폴레옹은 하이든을 대단히 존경했었다.

 

1808년 3월 오스트리아학술원 대강당(구비엔나대학교 대강당)에서 하이든의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천지창조' 공연이 있었다. 앞줄 가운데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사람이 하이든이다.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연주되었던 구비엔나대학교 아울라

 

오스트리아학술원 대강당에서는 1813년 12월에 당시 43세인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이 초연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관현악곡인 '웰링턴의 승리'(Wellingtons Sieg)도 초연되었다.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의 패배한 것을 기념하는 곡이었다. 베토벤은 두 곡을 모두 지휘했다. 하지만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청중들의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이미 청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베토벤의 명성이 온 유럽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두 곡 때문이었다. 당시 비엔나에서는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지도를 새로 작성하는 이른바 '비엔나회의'()가 열렸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유럽 열국들의 사람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과 '웰링턴의 승리'를 듣고 모두 감격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에 베토벤의 음악을 선전하였다. 그래서 베토벤의 이름이 전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구 마리아힐르프의 하이든가쎄 19번지. 하이든 기념관. 브람스 기념관도 포함되어 있다.

 

배커슈트라쎄를 계속 걸어가다 보면 링슈트라쎄의 슈트벤링(Stubenring)에 이르른다. 계속 걸어가면서 음악순례를 하던지 또는 전차를 타고 잠시잠시 내려서 탐방할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곳을 찾아보는 것이다.

- 슈봐르첸버그플라츠(Schwarzenbergplatz)와 쇤베르크 센터: 3구 슈봐르첸버그플라츠/차우너가쎄 1번지. 팔레 판토(Palais Fanto)이다. 이곳에 12음 기법의 창시자이여 현대음악의 기수인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 비엔나에서 출생-1951 로스안젤레스에서 서거)에게 헌정된 연구센터가 있다.

- 슈타츠오퍼(Staatsoper)와 슈타츠오퍼 박물관. 음악가연맹/비엔나악우회(Musikverein/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in Wien)와 로브코비츠 플라츠의 극장박물관(Theatermuseum)

- 부르크링: 모차르트 기념상. 호프부르크 고악기 박물관에 역사적 악기 전시. 호프부르크 교회(부르크카펠레)

- 라트하우스플라츠와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 기념상

- 쇼텐토르 일대와 쇼텐슈티프트: 묄커바슈타이에 베토벤기념관이 있다. 파스쿠발라티 하우스이다. 쇼텐슈티프트에는 나중에 사제가 된 프란츠 리스트가 비엔나에 올 때마다 머물렀다. 파스쿠발라티 하우스의 옆 집은 '세자매의 집'이다. 슈베르트와 연관이 있는 곳이다.

 

노이에 부르크의 고악기 박물관. 브람스가 사용했던 피아노

 

슈타트파르크(Stadtpark):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메리 위도우의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 오페레타의 천재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그리고 세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음악가 기념상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기념상이 있다. 샤니(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애칭)는 4분의 3박자로서 세계를 정복하였다. 슈타트파르크를 떠나기에 앞서 새로 단장한 아름다운 쿠어살론을 슬쩍 들여다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1867년에 지은 이 건물은 슈트라우스 형제들의 콘서트가 열리던 장소로 유명했다. 지금은 비엔나를 찾아 온 관광객들을 위해 매일 밤 왈츠 연주회가 열린다. 슈타트파르크에서 나와서 비너 콘체르트하우스 방향으로 가다보면 베토벤 기념상이 있는 베토벤플라츠에 이른다. 악성 베토벤에 대하여 경건한 예의를 표한 후에 기왕이면 그 옆에 있는 아카데미세스 김나지움 건물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슈베르트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밖에도 수많은 저명인사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풍자 시인인 페터 알텐버그, 피아니스트인 파울 굴다, 극작가인 휴고 폰 호프만슈탈, 배우 겸 극작가인 요한 네스트로이 등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베토벤플라츠의 베토벤 기념상과 아카데미세스 김나지움

슈베르트가 1808-1813년 아카데미 김나지움의 학생이었다는 기념 명판. 당시의 주소는 배커슈트라쎄 20번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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