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음악가 워킹투어

비엔나 음악가 워킹 투어 2

정준극 2016. 3. 20. 18:50

비엔나 음악가 워킹 투어 2

 

음악의 집(Haus der Musik: House of Music): 1구 자일러슈테테(Seilerstätte) 30번지에 있다. 4층짜리 '음악의 집'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비한 음의 세계를 경험할수 있다. 이와 함께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말러, 쇤베르크, 그리고 물론 모차르트의 음악을 더욱 가깝게 만날수 있다. 모두 비엔나의 음악가들이다.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의 작곡자인 독일 출신의 오토 니콜라이(Otto Nicolai)는 이 건물에서 1841년부터 1847년까지 6년을 살았다. 오토 니콜라이는 1842년에 당시 궁정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전문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데 그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비엔나 필하모닉(빈필)의 전신이다. 빈필에 대한 전시는 1층(우리 식으로 2층)에 있다. '음악의 집'에서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빈필을 스크린을 통해 직접 지휘해 볼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비록 스크린을 통해서지만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빈필의 연주가 인상적이다. 꼭대기 층에는 후트(Huth)라는 카페-레스토랑이 있다. 비엔나 시내의 지붕들을 감상할수 있다.

 

'음악의 집'(하우스 데어 무지크)

음악의 집 옥상에 있는 카페 후트. 체인점이다. 창밖으로 비엔나의 역사가 배어 있는 건물들의 지붕들을 감상할수 있다.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 음악연맹): 음악의 집을 나와 캐른트너 링을 건너서 뵈젠도르퍼슈트라쎄에 이르면 유명한 무직페어라인 건물이 있다. 주소는 무직페어라인플라츠(Musikvereinplatz) 1번지이다. 우리식으로 '음악연맹'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비엔나악우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음악친구들의 단체)의 소유이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음악연맹의 황금홀에서 저 유명한 비엔나신년음악회(Neujahrskonzert)가 열린다. 세계적인 빈필은 이 건물에 본부를 두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70년 음악연맹 건물의 오프닝을 위해 '인생을 즐겨라'(Freut Euch des Lebens)라는 왈츠를 작곡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브람스는 29세 때에 비엔나로 왔다. 그리고 10년 후인 39세 때에 비엔나악우회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브람스는 특히 비엔나악우회 도서실의 관리를 위해 열심을 다하였다. 수많은 음악자료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희귀 자료들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브람스를 기념해서 음악연맹 건물에 있는 연주회장의 하나를 '브람스홀'(Brahms Saal)이라고 이름 지었다. 


음악연맹. 매년 1월 1일에 열리는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이 건물의 황금홀에서 열린다. 브람스를 기념하여서는 브람스 홀이 있다. 

 

 브람스와 악우회: 브람스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각별한 친분을 맺으며 지냈다. 브람스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보다 여덟 살이 어리지만 친구로서 지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포옹하라, 만민들이여'(Seid umschlugen, Millionen)라는 타이틀의 곡을 친구 브람스에게 헌정하였다. '포옹하라, 만민들이여'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에 나오는 한 소절이다. 베토벤은 그의 교향곡 9번의 4악장에서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 '포옹하라, 만민들이여'의 구절도 나온다. 브람스는 1833년에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였다. 비엔나에 온 브람스는 베토벤을 특별히 경외하였다. 브람스가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런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도저히 베토벤처럼 교향곡을 작곡할 자신이 없다네. 그 거인이 나의 뒤에서 나를 계속 몰아세우듯 따라오기 때문이라네'라고 적었다. 그러나 브람스는 결국 4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베토벤처럼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지냈다. 브람스의 기념상은 음악연맹 건물에서 머지 않은 칼스플라츠의 레셀파크(Resselpark)에 있다. 64세에 세상을 떠난 브람스의 묘지는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구역에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슈베르트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악우회 건물에 있는 브람스홀

                        

브람스는 비엔나에 거주하는 동안 악우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브람스는 1872년부터 3년간 악우회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브람스는 이 직분을 맡는 동안 18회의 오케스트라를 동반한 합창 콘서트를 직접 지휘했다. 브람스는 음악감독이라는 직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사의를 표명했다. 그렇지만 악우회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계속했다. 이에 대하여 악우회는 브람스를 이사회의 이사로 임명하였으며 1876년에는 악우회의 명예회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브람스는 베토벤,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리스트, 로베르트와 클라라 슈만, 베르디, 바그너, 베버와 함께 악우회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브람스는 비록 음악감독의 직분을 사임했지만 그후로더 악우회의 활동과 사업에 대하여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브람스는 1892년에 악우회의 사업을 위하여 6천 플로린의 거금을 희사하였다. 브람스는 그중에서 1천 플로린은 악우회의 도서실을 위해 사용해 줄것을 단서로 붙였다. 그 즈음에 악우회는 새로운 건물로 이전하였으며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책자와 악보 등 귀중한 자료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악우회 자료실(또는 도서실)은 브람스로부터 특별 지원이 있자 크게 새로워졌다. 장소를 정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전시할 것은 전시공간을 만들어서 전시하고 너무나 귀중하여서 특별 보존해야할 자료들은 커다란 금고를 마련해서 그 안에 보관하였다. 브람스는 악우회 도서실의 발전을 위해 우정 시간을 내서 도서실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C. F. Pohl과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브람스는 폴 다음으로 도서실장에 부임한 에우제비우스 만디체브스키와도 우정있는 협조를 하였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 악우회의 도서실을 브람스의 헌신적인 기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우회는 악우회에 대한 브람스의 헌신적인 기여를 감사하여 브람스 흉상을 제작하여 건물 내에 설치하였다.


슈타츠오퍼(Staatsoper:  국립오페라극장): 슈테판스돔이 비엔나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슈타츠오퍼는 비엔나의 심장이다. 슈타츠오퍼가 있기에 비엔나가 생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슈타츠오퍼는 비엔나의 자랑이요 비엔나의 명예이다. 슈타츠오퍼는 과거 미하엘러플라츠에 있었던 부르크테아터의 후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프란츠 요셉 1세 황제가 링슈트라쎄를 건조하면서 새로운 오페라극장의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지은 호프오퍼가 오늘날의 슈타츠오퍼이다. 1869년 5월 25일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서 오픈을 기념한 새로운 슈타츠오퍼는 오늘날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전통있고 우수한 오페라하우스 중의 하나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동안 슈터츠오퍼에서 활동했던 뛰어난 음악감독으로서는 구스타브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칼 크라우스, 칼 뵘, 그리고 허버트 폰 카라얀 등이 있다. 이들의 바톤은 슈타츠오퍼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더욱 높여준 것이었다. 슈타츠오퍼의 건물은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때에 소련군의 폭격을 받아 크게 손상되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웠고 더구나 비엔나는 4대 강대국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도시가 되어서 슈타츠오퍼의 복구는 속히 진전되지 못하였다. 슈타츠오퍼는 1955년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 선포되기까지 무려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복구공사가 진행되었다. 1955년 가을의 재개관에서는 베토벤의 '휘델리오'가 공연되었다.

 

비엔나의 자랑 슈타츠오퍼. 극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궁전이다.

슈타츠오퍼의 재개관 기념으로 공연된 베토벤의 '휘델리오'. '죄수들의 합창'.

 

코른골트와 슈타츠오퍼: 제2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는 천재적 재능의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 1897-1957)와 슈타츠오퍼는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브르노(Brno: 현재는 체코공화국 소속)에서 태어난 코른골트는 네살 때에 식구들을 따라 비엔나에 왔다. 코른골트는 열한살 때에 '눈사람'이라는 판토마임을 작곡했다. '눈사람'은 1910년 10월에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었다. 슈타츠오퍼에서 작품이 공연된 최연소 작곡가였다. 청년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은 도시'(Die tote Stadt)는 1921년 슈타츠오퍼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당시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며 상임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초연의 지휘를 맡았다. 코른골트는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이 은밀히 추진되고 있던 1936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코른골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으로 유명세를 탔다.


음악을 곁들인 판토마임(Musik-Pantomime)인 '눈사람'. 코른골트 작곡. 비엔나악우회의 브람스 홀에서


코른골트가 살던 집들: 비엔나에서 코른골트가 살았던 집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코른골트가 어릴 때 살던 집은 6구 마리아힐르퍼의 테오발트가쎄(Theobaldgasse) 7번지이다. 폭스오퍼 부근이다. 테오발트가쎄 15번지는 모차르가 잠시 지냈던 집으로 현재는 모차르트 펜지온이다. 코른골트가 1925-28년에 살았던 집은 1구 프란츠 요제프스 카이(Franz Josefs Kai) 3번지의 3층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살았던 집은 18구 슈테른봐르테슈트라쎄(Sternwartestrasse) 35번지로서 이 집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압류하였다.

 

테오발트가쎄 15번지의 펜지온 모차르트


비발디의 발자취: 슈타츠오퍼의 뒷편에 유명한 자허 호텔이 있다. 주소는 필하모니커슈트라쎄 2번지이다. 자허호텔의 모퉁이 벽면에 비발디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비엔나에 온 비발디는 우선 현재의 자허 호텔이 있던 곳의 옆집에서 기거했다. 자허 호텔 자리에는 유명한 캐른트너토르극장이 있었고 철거 후에는 일반 보눙(Wohnung: 아파트)이 있었다. 비발디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르 6세의 초청으로 비엔나에 왔지만 후원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샤를르 6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자 후원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인 1741년 7월 28일, 현재 비엔나공과대학의 본부건물이 있는 곳에 있었던 건물의 작은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자허호텔 외부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비발디 기념명판. 1741년에 이곳에서 거주했었다는 내용이다. 비엔나공과대학교 오케스트라 및 교수연맹이 제작하여 봉헌했다. 비발디는 현재의 비엔나공과대학교 본부건물이 있는 자리에 있었던 건물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베르티나와 쾨헬: 알베르티나플라츠에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있다. 이곳에서 한때 비엔나의 음악학자이며 작곡가, 작가, 식물학자,출판가인 루드비히 폰 쾨헬(Ludwig von Köchel: 1800-1877)이 거주하면서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작품번호를 매겼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작품에는 Köchel을 의미하는 K 넘버가 붙어 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을 뒤로하고 자허 호텔 모퉁이로 돌아가면 '모차르트 카페'가 있다. 그 자리에는 원래 1763년부터 1868년까지 캐른트너토르 극장(Kärntnertor Theater)이 있었다.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는 수많은 음악작품들이 연주되고 오페라가 공연되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의 초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차르트 카페 앞의 광장에는 유명한 모차르트기념상이 있었으나 부르크가르텐으로 이전되었다. 아우구스티너가쎄로 접어들어서 곧바로 따라가면 요제프스플라츠(Josefsplatz)에 다다른다. 그 전에 좀 돌아가더라도 슈피겔가쎄(Spiegelgasse)에서 그라벤(Graben)으로 갔다가 다시 도로테어가쎄(Dorotheergasse)로 돌아오는 루트를 선택하면 또 다른 음악 기행이 될수 있다.

 

슈타츠오퍼 뒷편에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 알브레헤트 대공의 저택이었다. 이곳의 한 방에서 루드비히 폰 쾨헬이 기거하면서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순서대로 정리하였다. 이를 K 또는 KV 이라고 한다. 쾨헬(Köchel) 또는 쾨헬 페어차이히니스(Köchel Verzeichnis)의 약자이다.

모차르트 카페 앞에 있었던 모차르트 기념상. 현재는 부르크가르텐에 있다. 모차르트 카페(카페 모차르트)는 주소가 알베르티나플라츠 2번지이다.

부르크가르텐으로 옮겨진 모차르트 기념상. 앞의 잔디밭에 꽃으로 조성된 높은 음자리표가 분위기를 더 해 주고 있다.


살리에리 본하우스(Salieri Wohnhaus): 슈피겔가쎄 11번지는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가 살았고 세상을 떠난 집이다. 괴트봐이어가쎄(Göttweihergasse) 1번지이기도 하다. 건물 외벽에 그런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슈피겔가쎄 9번지에서는 프란츠 슈베르트가 1822-23년에 훗날 미완성교향곡이라고 불리게 된 교향곡 B 단조를 작곡했다. 도로테어가쎄 2-4번지의 라인탈러 바이슬(Reinthalers Beisl)에서는 비엔나 특별음식을 서브한다. 음악가와는 상관없지만 비엔나 전통 음식을 맛보려면 기왕 그 지역에 간 김에 이 식당을 찾아가면 좋을 것이다. 라인탈러 바이슬의 바로 옆집은 카페 하벨카(Cafe Hawelka)이다. 여러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들며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던 곳이다. 기록은 없지만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도 이 카페를 드나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카페 하벨카에서는 밤 10시 이후에 전설적인 부흐텔른(Buchteln) 빵을 서브한다. 길건너 집에서는 믿을수 없을 만큼 훌륭한 비엔나 샌드위치를 사먹을수 있다. 트르체스니브스키(Trzesniewski)이다. 샌드위치 집의 바로 옆집에서는 콘라딘 크로이처(Conradin Kreutzer)가 살았었다. 베토벤이 크로이처 소나타를 헌정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명판이 붙어 있다. 10번지는 도블링거(Doblinger) 음악출판사이다. 온갖 악보와 음반과 음악서적을 구할수 있는 곳으로 비엔나의 명물이다. 11번지는 유태박물관이다. 18번지의 개신교 복음교회는 겉으로는 교회인지 무언지 잘 알아 볼수 없는 건물이지만 여러가지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곳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가 세상을 떠난후 축복 미사가 열렸으며 훗날 아놀드 쇤버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결혼식이 열렸고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의 장례예배가 거행된 곳이다. 개신교회의 건너편은 유명한 도로테움 경매장이다. 도로테움의 2층에 있는 카페는 전통있는 장소이다. 다시 돌아서 아우구스티너가쎄를 걸어가면 로브코비츠 플라츠에 이른다.

 

슈피겔가쎄 11번지 및 괴트봐이어가쎄 1번지 건물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살았던 집이며 세상을 떠난 집이다. 그 건물의 벽면에 그런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괴트봐이어가쎄는 캐른트너두르흐강과 연결된 짧은 거리이다.

 

팔레 로브코비츠(Palais Lobkowitz)와 극장박물관(Theater Museum): 팔레 로브코비츠는 로브코비츠플라츠(Lobkowitzplatz) 2번지에 있는 아름다운 시내궁전이다. 이 건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장박물관이 있다. 극장 팬이라면 반드시 들려야할 곳이다. 이 시내궁전의 주인이었던 로브코비츠 가문의 사람들은 대대로 음악후원자들이기도 했다. 로비코비츠 가문 사람들의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작곡가로서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bald Gluck: 1714-1787)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글룩을 자기들 자녀 중의 몇 사람에 대한 음악선생으로서 임명했다. 그 중에는 나중에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도 포함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파리에 있을 때에 자기의 옛 음악선생인 글룩을 잊지 않고 후원했다. 글룩은 음악사에 있어서 개혁오페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곡가였다. 모차르트는 글룩을 마치 아버지와 같은 친구로서 존경하였다. 로브코비츠 궁전에는 '에로이카 홀'이라고 알려진 방이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에로이카)이 베토벤의 지휘로 처음 연주된 장소이다. 로브코비츠 가문의 프란츠 요제프 막시밀리안 공자는 베토벤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베토벤은 프란츠 요제프 막시밀리안 로브코비츠 공자와의 관계 때문에 비엔나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지냈다. 로브코비츠플라츠에서 아우구스티너슈트라쎄를 따라 내려가면 요제프스플라츠를 만난다.

 

왼편에 있는 하얀 건물이 로브코비츠 궁전(팔레 로브코비츠)이다. 이 건물에 극장박물관이 있다.

팔레 로브코비츠의 에로이카 홀의 벽화

 

요제프스플라츠(Josefsplatz):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큰아들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광장이다.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로서 사회 각분야의 불합리성을 개혁하는데 앞장 섰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요제프스플라츠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요제프 2세의 기마상이 있다. 요제프스플라츠를 중심으로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Redouensaal), 국립도서관(National Bibliothek), 아우구스틴 교회(Augustinerkirche), 팔레 팔라비치니(Palais Pallaviccini), 팔레 팔피(Palais Palffy)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이들 건물에서는 수시로 음악회가 열렸고 지금도 열리고 있다. 그런 연고로 이 광장을 지나다닌 음악가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너키르헤에서 매주일 아침 미사 시간에 연주되는 미사곡은 마치 천상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팔레 팔라비치니와 팔레 팔피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와 모차르트 등 비엔나의 클래시컬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요제프스플라츠에서 호프부르크 정문이 있는 미하엘러플라츠로 나가보자.

 

요제프스플라츠. 광장 가운데의 기마상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요제프 2세이다. 오른쪽 건물은 레도우텐잘이 있는 건물이며 왼편 건물은 오늘알 국립도서관이다.

호프부르크 레도우텐잘에서의 연주회


미하엘러플라츠(Michaelerplatz), 미하엘러키르헤(Michaelerkirche): 미하엘러키르헤(미하엘교회)에서는 17세의 소년 하이든이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었다. 1749년의 일이었다. 슈테판스돔의 소년합창단원을 그만둔 하이든은 미하엘러키르헤 뒷편에 있는 어느 집의 다락방에서 지내면서 작곡가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에게서 작곡을 공부했다. 하이든은 포르포라의 문하생이었지만 고용원과 같은 처지에서 포르포라의 일을 도와주었다. 하이든은 포르포라를 통해서 궁정시인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를 알게 되었다. 메타스타시오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여러 대본을 쓴 사람이다. 메타스타시오도 하이든이 묵고 있는 집에 거처를 정하고 지냈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머리칼 등 유품은 미하엘러키르헤의 지하 납골당에 보관되어 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5일 후인 1791년 12월 10일에 미하엘러키르헤에서 모차르트를 추모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이때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미완성인 진혼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부분까지만 연주되었다. 나중에 미완성 부분은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Franz Xaver Süssmayr: 1766-1803)가 완성했다. 미하엘러키르헤를 들어가면 입구 한쪽에 '1791년 12월 10일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추모미사가 이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그의 진혼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라고 적은 명판 두 장이 부착되어 있다.

 

미하엘러플라츠에 있는 미하엘러키르헤(첨탑의 하얀 건물)

 

미하엘러키르헤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모차르트 기념명판. 1791년 12월 10일에 모차르트를 위한 추도미사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진혼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다는 내용이다. 명판은 두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구 부르크테아터: 미하엘러키르헤를 나와서 호프부르크의 정문인 미하엘러토르(Michaelertor)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미하엘러토르(미하엘문)의 아치를 통해서 들어가면 호프부르크이다. 미하엘러토르의 한쪽에 '이곳에 1888년까지 연극을 공연했고 또한 콘서트와 오페라를 공연한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가 있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수 없는 부르크테아터에서는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pheus ed Eurydice)가 초연되었고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가 초연되었다. 하이든의 현악4중주 '황제'(Kaiser)도 이곳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하이든은 이 곡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프란시스 2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797년에 작곡했다. 프란츠 2세의 생일은 2월 12일이었다. 현악4중주곡 '황제'의 멜로디는 1918년까지 그리고 1929년부터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기까지 오스트리아의 국가로서 사용되었다. 이어서 '황제'의 멜로디는 오늘날 독일의 국가로서 아직 남아 있다.

 

미하엘러플라츠에 있었던 부르크테아터. 1888년경. 지금은 철거되어 자취를 찾아 볼수 없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등이 초연된 극장이다. 부르크테아터의 후속은 현재 라트하우스 건너편의 부르크테아터라고 하지만 슈타츠오퍼의 전신이기도 하다.

부르크테아터가 있었던 것을 기념하는 명판. HIER STAND BIS ZUM JAHRE 1888 DAS ALTE BURGTHEATER DAS 1776 VON KAISER JOSEF II ALS NATIONALTHEATER BEGRUENDET WURDE. 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이곳에 1776년에 요제프 2세 황제가 국립극장으로서 설립한 부르크테아터가 1888년까지 서 있었다'이다.

 

궁정교회(Burgkapelle: Hofburg Chapel): 호프부르크의 슈봐이처호프에 있다. 바로 아래층은 황실보물전시장(Schatzkammer)의 입구이다. 궁정교회는 오스트리아의 음악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여러 뛰어난 음악가들을 고용하거나 파트론으로서 후원하였다. 이들 중에서 대개는 궁정음악가로서 봉사했다. 궁정음악가로서 봉사했거나 안했거나 합스부르크 황실과 관계를 맺은 음악가들은 기회만 있으면 궁정교회에서 연주를 했다. 오늘날 궁정교회에서는 세계적 명성의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여 성가를 부른다.

 

부르크카펠레 중앙제단과 회중석

부르크카펠레에서의 비엔나소년합창단 연주. 부르크카펠레는 비너 호프무직카펠레(Wiener Hofmusikkapelle)라고도 부른다. 요즘은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기는 하는데 윗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앙제단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르간이 있는 뒷편 발코니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일반 회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모습을 볼수 없다. 그래서 교회당국은 회중석에 커다란 모니터를 설치했다.

 

고악기박물관(Sammlung alter Musikinstrumente: Collection of Historical Musical Instruments): 만일 옛날 악기에도 관심이 있고 제국 궁전의 위용에도 흥미가 있다면 노이에 부르크()에 있는 고악기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제격이다. 값으로 매길수 없는 귀중한고도 희귀한 악기들이 넘치듯 전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쇼팽,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리스트, 슈만, 브람스가 사용했던 그랜드 피아노가 모두 전시되어 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바이올린도 전시되어 있다. 황실 사람들이 사용했던 피아노 등 악기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음악교과서나 백과사전에서 볼수 있었던 위대한 작곡가들의 초상화 들도 상당수가 전시되어 있다.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하이든 등등. 재미나고 특이한 악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비더마이어 시대의 악기로서 지팡이로도 사용할수 있는 것도 있다. 피아노 연습을 위해 소리나지 않는 피아노도 있다. 고악기 전시장이지만 음악과 관련된 다른 특이한 품목들도 전시되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밴드가 취입한 초기 레코드 소리통도 있다. '봄의 소리 왈츠'가 녹음되어 있어서 앵앵 거리는 소리를 들을수 있다. 1877년에 토마스 에디슨이 발명한 실린더 스타일의 포노그라프이다. 안톤 카라스(Anton Karas)가 사용했던 치터(Zither) 악기도 전시되어 있다. 안톤 카라스는 비엔나가 배경인 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에서 주제곡을 치터로 연주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이 깃들어 있는 장엄한 궁전에서 또 다른 진기한 음악의 세계를 감상한다는 것은 음악 애호가들로서 대단히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고악기박물관. 음악애호가들의 필견의 장소이다.

 

국민공원(Volksgarten: People's Park): 노이에 부르크에서 헬덴플라츠(Heldenplatz: 영웅광장)를 거쳐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을 지나서 가면 폭스가르텐이 있다. 아름다운 황비 엘리자베트의 기념상이 있는 곳이며 위대한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 1791-1872)의 기념상이 있는 곳이다. 폭스가르텐에 있는 카페 마이에라이(Cafe Meierei)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그의 밴드가 춤곡들을 연주하였다. 오늘날에는 그 옆에 다스 테크노 카페가 생겨서 디스코를 추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이제 다시 링슈트라쎄 쪽으로 발길을 돌려 묄커바슈타이(Mölkerbastei)로 올라가보자. 바슈타이는 예전에 있었던 비엔나 성곽의 능보를 말한다. 베토벤이 기다리고 있다.

 

폭스가르텐에 있는 카페 마이에라이.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그의 밴드와 함께 왈츠와 폴카를 연주하였다.

 

콜마르크트 9번지에는 1830년 11월부터 1831년 7월까지 프레데릭 쇼팽이 묵었었다. 

 

쇼팽 기념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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