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음악가 워킹투어

비엔나 음악가 워킹 투어 3

정준극 2016. 3. 22. 06:24

비엔나 음악가 워킹 투어 3

 

파스크발라티 하우스(Pasqualati Haus): 우니페어지태트 링의 묄커 바슈타이 8번지이다. 베토벤은 비엔나에 35년을 살았는데 그 기간 중에 거의 8년이나 이 저택과 인연을 맺고 지냈다. 물론 계속해서 거주했던 것은 아니고 겨울철에 잠시잠시 지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크발라티하우스에서의 거주는 예외적으로 오랜 것이었다. 저택의 주인인 요제프 베네딕트 파스크발라티 남작의 후의에 의해서 그렇게 오랜 기간 인연을 맺으며 지낼수 있었다. 베토벤은 더운 여름철에는 주로 하일리겐슈타트와 같은 비엔나의 교외에서 지냈다.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 베토벤 기념관은 4층에 있다(우리 식으로는 5층). 베토벤이 걸어다녔던 계단을 통해서 4층으로 올라가며 베토벤을 다시한번 상고해 보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30여년을 지내면서 무려 70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원래 가난하다보니 이사 다니는 것을 밥먹듯이 했다. 그런데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에서는 비교적 오래동안 거주했으니 그것도 별다른 일이다.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의 베토벤 기념관에는 베토벤이 사용하던 여러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1805년에 빌리브로르드 요제프 맬러(Willibrord Joseph Mähle: 1778-1860)가 그린  유명한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에서는 헤드폰으로 베토벤의 대표적인 음악들을 들을수 있다.

 

화가 빌리브로르드 요제프 맬러가 그린 베토벤 초상화. 파스크발라티하우스의 베토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베토벤이 살던 당시에 이 집의 4층에서는 저 멀리 비엔나 숲의 경관까지 볼수 있었다. 그런 경치는 베토벤의 작곡 활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지낼 때에 교향곡 4번, 5번, 7번, 8번을 가다듬었고 유일한 오페라인 '휘델리오'도 준비했다. 또한 이 집에서 지낼 때에 '테레제를 위해서'(Für Therese)를 작곡했다. 그가 사모하던 테레제 폰 말화티(Therese von Malfatti)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오늘날 이 곡은 '엘리제를 위해서'(Für Elise)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악보를 카피(精寫)하는 사람이 테레제라는 이름을 엘리제로 잘못 알고 쓰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베토벤의 악필은 유명해서 Therese를 Elise로 잘못 읽는 것 쯤이야 보통이다. 파스크발라티 하우스의 옆집은 현재는 식당인 '세아가씨의 집'(Dreimäderlhaus)이다. 슈베르트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곳이다. 주소는 슈라이포겔가쎄(Schreyvogelgasse) 10번지이다. '세아가씨의 집'은 헝가리 출신의 하인리히 베르테(Heinrich Berte: 1857-1924)가 슈베르트의 음악들을 인용해서 파스타셰 형태로 만든 오페레타이다. '세아가씨의 집'의 대본은 루돌프 한스 바르츄(Rudolf Hans Bartsch)라는 사람의 1912년도 소설인 '슈봠메를'(Schwammerl)을 바탕으로 삼았다. 내용은 슈베르트와 친구들의 로맨스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픽션이다. '세아가씨의 집' 옆에 있는 레스토랑의 이름은 슈베르트이다. 슈베르트가 이 식당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도 그렇고 하니 슈베르트 식당에 들어가서 지중해식 요리나 먹는 것도 관찮을 것 같다.

 

묄커바슈타이에 있는 파스크발라티하우스. 베토벤이 가장 진득하게 머물렀던 곳이다. 베토벤은 이곳에서 '엘리제를 위해서'를 작곡했다.

 묄커 바슈타이의 파스쿠발라티 하우스의 옆에 있는 '세아가씨의 집'. 멀리 비엔나대학교의 본관건물이 보인다.


파스크발라티하우스가 있는 묄커 바슈타이에서 나와서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로 걸어가서 쇼텐토르/우니페어지태트(Schottentor/Universität) 지하 전차 정류장에서 37번 전차를 타고 한 정류장만 가면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Schwarzspanierstrasse)이다. 베토벤이 1827년 3월 26일 아직도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날씨에 세상을 떠난 집이 있는 곳이다. 기왕에 잠시 더 걸어서 베토벤의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던 교회도 가보는 것이 베토벤을 추모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은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 15번지이다. 이집은 원래 1779년까지 스페인에서 온 베네딕트종단의 수도승들이 거처했던 곳이었다. 이곳의 수도승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거리 이름도 슈봐르츠슈파니어(검은 스페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혹자는 그 거리에 검은 슈파니어종의 개가 자주 다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억측같다. 베토벤은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15번지의 집에서 1825년 10월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827년 3월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을 지냈다. 베토벤이 살았던 15번지의 집은 1904년에 철거되어 모습을 볼수 없고 대신 새로 아파트 건물이 들어섰다. 1904년에 새로 지은 건물에 베토벤이 서거한 집이라는 기념명판과 베토벤의 초상화 부조가 설치되어 있다.

 

비엔나의 9구 알저그룬트의 슈봐르츠슈파니에슈트라쎄 15번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이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잡의 외벽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명판

 

슈베르트 생가(Geburtshaus von Franz Schubert: Schubert's Birth House): 쇼텐토르에서 37번 전차를 타고 카니시우스가쎄(Canisiusgasse)에서 내리면 길 가에 슈베르트의 생가가 있다. 주소는 누스도르퍼 슈트라쎄(Nussdorfer Strasse) 54번지이다. 슈베르트는 이집 2층에 있는 부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정원이 있다. 이곳에서 간혹 슈베르트 기념음악회가 열린다. 이 집 전체를 슈베르트의 가족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방 두어개를 빌려서 살았을 뿐이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작은 학교의 선생님이어서 넉넉한 생활이 아니었다. 더구나 식구들이 많았다. 슈베르트의 형제들은 12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일개 분대가 되는 대부대였다. 슈베르트는 4구 뷔덴의 케텐브뤼켄가쎄(Kettenbrückengasse) 6번지, 형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슈마르크트 부근이다. 기념관은 아니지만 잠시 기웃거릴 수는 있다.

 

누쓰도르퍼 슈트라쎄 54번지는 슈베르트의 생가이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다. 문밖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관람하러 왔다고 하면 열어준다.

케텐브뤼켄가쎄에 있는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 형인 페르디난트가 세들어 살던 방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라트하우스플라츠(Rathausplatz: 시청광장): 근년에 이르러 매년 여름 7월과 8월에는 라트하우스(Rathaus: 시청)광장에서 뮤직 필름 페스티발(Musik Film Festival)이 열린다. 콘서트, 오페라, 오페레타 공연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생생하게 시청할수 있다. 그럴 때면 큰길에서부터 광장에 이르기까지 포장마차들이 들어서서 각종 음식들과 기념품 따위를 판다. 이탈리아 음식도 있고 중국 음식도 있으며 헝가리 음식도 있다. 물론 포도주와 맥주도 판다. 라트하우스파르크의 한쪽을 찾아가면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가 함께 서 있는 기념상이 있다. 두 사람의 뒤에 둘러친 벽면에는 남녀들이 왈츠를 추는 장면이 부조로 만들어져 있다. 1905년 프란츠 자이페르트(Franz Seifert)와 로베르트 외를라이(Robert Oerley)가 공동제작한 조각이다. 비엔나 시민들의 헌금으로 제작되었다. 사족이지만 작곡가 중에는 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대표적으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있고 오페레타 작곡가인 오스카 슈트라우스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와는 사돈의 팔촌도 되지 않는다. 오스카 슈트라우스는 사람들이 자기를 혹시 요한 슈트라우스와 친척쯤 되는줄 알고 물어보는 것이 귀찮아서 슈트라우스의 표기를 Strauss가 아닌 Straus로 정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를 얘기함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잘 구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 슈트라우스 아버지(Vater 또는 1세), 요한 슈트라우스 아들(Sohn 또는 2세)로 구별하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생들인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도 훌륭한 작곡가들이다.

 

라트하우스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의 기념상

라트하우스 파르크


모차르트기념상(Mozart Denkmal): 라트하우스파르크에서 나와서 슈타츠오퍼 방향으로 내려오다보면 노이에 부르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부르크가르텐(Burggarten)이 있다. 링 슈트라쎄 큰 길에서 부르크가르텐(또는 부어가르텐이라고 발음함)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입구로 들어가면 바로 모차르트 기념상이 있다. 바로 길거리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다가도 잘 보인다. 1896년에 조각가 빅토르 틸그너(Viktor Tilgner: 1844-1896)가 제작한 것이다. 빅토를 틸그너는 주로 문화예술가들의 인물상을 조각한 사람이다. 슈타트파르크의 브루크너 기념상도 틸그너의 작품이다. 여름에는 기념상 앞의 잔디밭에 꽃으로 높은 음자리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더욱 감동하게 되는 기념상이다. 원래 모차르트 기념상은 자허 호텔 옆의 카페 모차르트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뜻한바 있어서 부르크가르텐으로 이전되었다. 기념상에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좌대의 전면에 '돈 조반니'의 장면들을 부조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볼수 있고 뒷면에는 볼페를(Wolferl: 모차르트의 애칭), 난네를(Nannerl: 모차르트의 누이), 그리고 이들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함께 연주하는 장면의 부조가 있다. 카페 모차르트가 있는 건물 장소에는 캐른트너토르극장(Theater am Kärntnertor)이 있었다. 캐른트너토르극장은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5번,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오페라 '페르시아의 여왕 팔미라', 베토벤의 '휘델리오' 세번째 버전, 슈베르트의 징슈필 '쌍둥이 형제'(Die Zwillingsbrüder) 등등 수많은 작품들이 초연된 역사적인 장소였다.

 

모차르트 기념상과 높은 음자리표의 꽃밭


리스트와 쇼텐슈티프트(Schottenstift: 아일랜드수도원): 프라이융(Freyung)에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세운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수도원)와 수도원교회가 있다. 수도원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수도승들을 침식을 위해서 숙소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프란츠 리스트는 오랜 세월동안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지내다가 말년에는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와서 지냈다. 당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 리스트는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와서 다른 음악가들과 만남을 갖기도 하고 또는 살롱에서 피아노 연주도 했다. 리스트는 말년에 로마 가톨릭에 몰입하여 사제가 되고자 했다. 사람들은 그런 리스트를 아예 사제로서 존경하였다. 리스트는 비엔나를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쇼텐슈티프트에 머물렀다. 리스트가 쇼텐슈티프트에 처음 숙소를 정했던 것은 1869년이며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은 1886년이었다. 그런 내용의 기념명판이 쇼텐슈티프트에 설치되어 있다.

 

쇼텐슈티프트의 외벽에 설치되어 있는 리스트 기념명판. 리스트가 1869년부터 1886년 사이에 비엔나에 오면 묵었던 곳이라는 내용이다. 이 명판은 부다페스트시가 기증한 것이다.

프라이융에 있는 쇼텐슈티프트와 교회. 외벽에는 야소미어고트의 조각상이 있다. 이 건물의 안채에 기숙시설이 있다.


쇼팽은 1830년 11월부터 1831년 7월까지 비엔나에서 거주했다. 1구 콜마르크트 9번지 건물의 4층(우리 식으로는 5층)에서 거주했다. 그런 내용을 담은 명판이 콜마르크트 9번지의 외부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쇼팽은 비엔나에 연주를 위해 왔었다.

 

콜마르크트 9번지

쇼팽 기념명판


리하르트 바그너는 비엔나에서의 '탄호이저'와 '로엔그린'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1875년에 비엔나에 가족과 함께 와서 두달동안 임페리알 호텔에 묵었다. 그것을 기념하는 명판이 호텔 현관 옆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밤의 임페리알 호텔. 바그너 기념명판은 현관의 오른쪽 벽면에 있다.

임페리알 호텔에 설치되어 있는 바그너 기념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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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있다면 교외로 발길을 돌려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19구에 가면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번지에 베토벤의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 하우스가 있다. 베토벤이 그의 유언장이라고 할수 있는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를 쓴 집이다. 테스타멘트(Testament)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실은 베토벤이 자기 동생에게 쓴 편지이다. 베토벤은 이 유서를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썼다. 아마 당시에 베토벤은 자기의 청각이상이 고칠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절망 중에 생을 포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베토벤은 교향곡 2번을 작곡하고 있었다. 그후로 베토벤은 비참할 정도로 절망 속에서 고통을 되새기며 25년을 더 살면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프로부가쎄의 베토벤 기념관을 나와서 잠시 걸어가면 화르플라츠(Pfarrplatz)에 이른다. 길거리에 자그마하고 아늑하게 보이는 주점이 있다. 마이어 암 화르플라츠(Meyer am Pfarrplatz)라는 주점이다. 베토벤은 1817년에 잠시동안 이 집의 윗층에 살면서 작곡활동을 했었다.

 

마이어 암 화르플라츠 호이리거의 간판. 베토벤 하우스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위대한 베토벤을 생각하면서 아랫층 주점에서 와인 한잔을 마시거나 싫으면 다시 나와서 전차 37번을 타고 호에 봐르테(Hohe Warte)에서 내려서 하일리겐슈태터 파르크(Heiligenstädter Park)를 들려보는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일 것이다. 베토벤이 거닐던 곳이었고 베토벤의 기념상이 있기 때문이다. 하일리겐슈태터 파르크에 있는 베토벤 기념상은 베토벤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머리는 헝클어진 채이며 모자를 쥔 두 손은 뒷짐을 지고 오솔길이나 포도밭을 거니는 모습이다. 코트의 한쪽 주머니에는 메모를 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필담을 나눌 때에 필요한 메모지가 꽂혀 있다. 그리고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아마 새로운 악상이 떠 올라서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귀가 점점 들리지 않기 때문에 아마 상당히 큰 소리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베토벤 당시에는 이곳에 류마티즘 치료를 위한 온천장이 있었다. 베토벤도 자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온천장을 찾아 왔을지 모른다. 다음으로는 에로이카 하우스를 찾아가는 일정이다. 19구의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Döblinger Hauptstrasse) 92번지의 집이다. 이곳에서 베토벤이 1803년과 1804년 교향곡 3번 '영웅'(Eroica)의 상당부분을 작곡했기 때문에 이 집을 '에로이카 하우스'라고 부른다.

 

하일리겐슈태터 파르크의 베토벤 기념상.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의 베토벤이라고 한다.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 음악가 묘역: 시간적인 여유가 없더라도 반드시 찾아가 보아야 할 장소가 바로 중앙공동묘지이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서 전차 71번을 타고 한참 가다고 중앙공동묘지의 제2문(Tor 2)에서 내려서 곧장 걸어 올라가면 '명예의 묘역'(Ehrengräber)이 있다. '명예의 묘역'은 몇 구역으로 다시 나뉘어 진다. 그룹 0, 그룹 14A, 그룹 14C, 그룹 32A 등이다. 그 중에서 그룹 32A가 작곡가들의 집결지이다. 도로변에 'Musiker'라고 쓴 작은 안내판이 있다. 물론 다른 그룹에도 작곡가 또는 오페라 성악가의 묘지들이 있지만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그룹 0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고 피아노 교육자인 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 작곡가이며 음악이론가인 시몬 제흐터(Simon Sechter: 1788-1867)의 묘지가 있고 그룹 14C에는 오페라 소프라노 젤마 쿠르츠(Selma Kurz: 1874-1933), 작곡가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 1869-1949)의 묘지가 있다. 그외에는 거의 모두 그룹 32A에 속하여 있다. 베토벤, 브람스, 에드문드 아이슬러, 글룩, 요제프 란너, 칼 밀뢰커, 모차르트(가묘),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왕조의 사람들(요한 슈트라우스 아버지와 아들,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 프란츠 폰 주페, 휴고 볼프 등의 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위대한 음악가들의 묘지가 한 군데에 집합되어 있다는 것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참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비엔나 남쪽 짐머링에 있는 중앙공동묘지의 명예의 구역에 있는 음악가 묘지 중 왼쪽 베토벤, 오른쪽 모차르트의 묘지. 모차르트의 가묘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중앙공동묘지의 묘지 역시 가묘이다. 베토벤이 처음 안장되었던 배링 공동묘지에는 이장되기 전의 묘비가 그래도 보존되어 있다.

중앙공동묘지 모차르트의 묘비 상단의 여인 조각. 에통해 하는 여인은 리라와 악보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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