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한 풀기식 통치?

정준극 2010. 2. 9. 06:03

한 풀기식 통치?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인데...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메리는 마침 당시 헨리와 그 이후에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의 눈총을 피하여 잠시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에 가서 지내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다가 영국 국왕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메리는 백성들에게 영국 국왕의 위엄을 보이고 자기야 말로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스페인에서 런던으로 화려한 입성을 하였다. 길거리를 메운 백성들의 환호는 흐린 하늘을 진동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인자하고 신실한 아라곤의 캐서린을 생각하여 메리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메리가 어릴 때부터 오뉴월의 서릿발처럼 한을 품고 살았고 복수의 염원에 넘쳐 있다는 사실은 잘 몰랐다. 메리의 ‘한 풀기식’ 통치는 즉각 시행되었다. 어머니 추방에 앞장섰던 인간들은 속속 면직되거나 추방되었다. 가톨릭의 전통이 부활되었다. 하지만 메리의 연산군 스타일 통치는 1년이 지나자 문제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영국여왕 메리1세와 스페인의 필립2세. 1558년. 아니, 필립은 웬 새다리인가? 메리만 그럴듯하게 그렸네.


메리는 영국 교회가 다시 교황청의 권한에 속하도록 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메리는 만일 자기가 왕이 된다면 영국에서 가톨릭 왕조의 기반을 다지겠노라는 꿈을 안고 영국으로 돌아왔었다.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 불쌍한 어머니.... 핍박 받은 가톨릭.... 메리의 머리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결혼도 가톨릭인 스페인의 필립공자와 하는 것으로 주선되었다. 메리가 필립(펠리페)과 결혼하고자 했던 이면에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영국을 스페인의 영향 아래 두는 한편 가톨릭의 기반을 다시 다지자는 의도에서였다.

 

메리와 결혼했던 스페인의 필립2세. 유명한 돈 카를로스의 아버지. Sofonsisba Aanguissola 작품


메리는 필립과 결혼하기 전에 신랑될 필립에게 자기가 통치하는 영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토마스 크란머가 도입한 개신교 기도서를 폐기하는가 하면 교회의 주교들에게는 가톨릭 예배의식을 다시 복구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1547년 이후 무효로 된 ‘이단법’(Laws against Heresy)을 다시 부활 시켰다. 이에 따라 외국인이든 영국인이든 종교개혁을 따르는 개신교 개혁자들은 결정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의 상당수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유럽으로 보따리를 싸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 남아 있던 크란머 대주교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자격을 박탈당한 뒤 구속되었다. 메리는 여왕으로 취임한 후 7년이 지나서인 1554년에야 그렇게도 갈망하던 스페인의 필립공자와 결혼할수 있었다. 하지만 메리는 죽을 때까지 내내 독수공방으로 지냈다. 필립공자가 결혼식을 치룬지 얼마 후에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영영 다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필립공자는 나중에 스페인의 철권왕 필립페2세로서 무려 30년 연하의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였다. 메리는 필립이 런던을 떠난 후 임신했다고 발표했다. 온 나라가 경축 무드였다. 그러나 상상임신인 것이 밝혀졌다. 얼마후에도 또 상상임신으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결국 메리와 필립 사이에는 자녀가 하나도 없다. 자녀가 있었더라면 앤 볼레인의 딸 엘리자베스는 영영 여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영국은 가톨릭국가로서 남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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