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수원

서호(西湖)

정준극 2009. 6. 13. 18:24

수원의 절경 서호

 

사변후에 수원에서 잠시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하루는 학교에서 서호로 소풍을 간 일이 있다. 아직 서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은 서호에 간다고 하니까 대단한 곳에 가는줄 알고 좋아했다. 그러나 가서 보니 호수가 아니라 조그만 저수지 같았다. 아이들은 앉아서 점심 먹을 장소도 마땅치 않아 서성거렸다. 물론 물에는 발도 담글수 없었다. 사변 때에 비행기가 떨어트린 폭탄들이 불발판으로 저수지 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은 수원에 이런 저수지도 있고 바로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돌이켜보건대 서호는 정조대왕 시절에 만들어진 호수이다. 1794년, 수원성(화성)을 쌓을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 서호라는 이름은 수원의 북쪽에 북호(현재의 광교 저수지: 일제시대에는 광교 수리조합)가 있기 때문에 서쪽에 있어서 서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호라고 하면 어쨌든 중국 항주의 절경인 서호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너무나 절경이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그저 조금만 경치가 좋은 호수가 있으면 서호라는 이름을 빌어다 썼다. 베트남이 대표적이다. 하노이에도 서호가 있고 호치민시티(사이곤)에도 서호가 있다. 물론 경치야 항주의 서호를 따라갈수 없지만 이름만이라도 따라가자는 생각에서 서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항미정. 녹음 아래에 호수 바람이 그럴듯하게 불어오는 시원한 곳이다.

항미정 현판. 집에 비하여 좀 초라해 보인다.

 

수원의 서호는 항주의 서호와는 무관할 정도로 경치에 있어서는 별로 이다. 그래도 호수라고 하면 일단 항주를 생각하는 심정이 약간 남아 있었던지 서호의 한쪽 언덕에 세운 정자의 이름을 항미정(杭眉亭)이라고 불렀다. 항미정은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 때인 1831년에 세웠다. 소동파(蘇東坡)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의 미목(眉目)과 같다'는 구절이 있어서 이를 인용한 것이다. 하기야 여름철에는 우거진 녹음 아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시원해서 먼데서부터도 일부러 피서차 찾아 온다고 한다. 그보다도 서호의 유명세는 낙조에 있다. 명색이 호수인지라 항미정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낙조는 그럴듯 하다는 것이다. 정조 시대에 서호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농업용수를 끌어 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물이 나가는 곳에 제방을 쌓았다. 이 제방을 축만제(祝萬堤)라고 불렀다. 이름치고는 좀 특이하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축! 만세!'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축만제 제방에 걸쳐 있는 다리의 이름은 축만교(祝萬橋)이다. 오늘날 축만교에 서서 겨우 둘러본다는 것이 서호를 포위하듯 들어서 있는 아파트 군락이므로 소동파의 시구에서처럼 결코 절경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정조대왕 시절에는 아파트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경관이 보기에 좋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화서동의 아파트들을 보는 것 보다는 오히려 왼편에 있는 농업진흥청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기분이 상쾌할수 있다.

 

축만교길. 한적해서 좋다.

 

그러나 저러나 유서 깊은 농업진흥청은 이제 진주인지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좋은 곳을 두고 왜 막대한 예산(국민의 혈세)을 들여서 이전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 정권인 좌파 정권이 결정한 사항이라고 한다. 내가 만난 수원 시민들, 그리고 농진청과 관련된 사람들은 농진청 이전 결정에 대하여 모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세상에 이럴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농진청이 이사를 간다면 농진청의 여러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는 금싸라기와 같은 수원 팔달구 서둔동 및 화서동의 땅은 또 어떤 정치사기꾼, 또는 어떤 힘없고 배운 것 없는 시골 노인이 중간에 끼어 대기업에 팔아 넘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지 모를 일이다. 그때문에 농진청을 내보내기로 했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이미 전(前)정권 때에 모든 계획을 꾸며 놓은 것은 아닐까?

 

서호를 가슴에 안고 있는 유서깊은 농업진흥청의 모습. 아니, 이런 농진청을 이전키로 결정했다니...아, 이곳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다면 얼마나 보기 흉할까? 제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수 밖에 없다.

 

얼마전, 농진청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기왕에 모처럼 서호를 잠시 들려보니 수십년전의 그 서호가 아니었다. 상당히 커져 있었다. 서호의 주변은 서호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넓은 풀밭!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오는 곳으로 안성맞춤의 장소가 되었다. 화장실도 아주 잘 지어 놓았다. 반자동문을 열고 들어서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화장실이다. 외관의 디자인도 호감이 가도록 해 놓았다. 서호는 산책로가 유명하다. 호수 주위를 한참동안 편안하게 산책할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넝쿨장미 꽃이 아름답게 피는 서호 산책로는 수원의 자랑이다. 여름 밤에 사람들이 와서 소주나 마시지 않는다면 아주 좋은 호수공원이 될 것이다.

 

 서호공원에 소풍온 유치원 아이들과 부모들. 모두들 즐겁다. 서호공원은 소풍오기에 좋은 곳이다.

 서호의 한가운데 있는 섬과 저 멀리 화서동의 아파트 군락. 아파트 건설허가를 내주고 공무원들이 얼마나 뇌물을 받아 먹었을까?

농촌진흥청의 시험농장. 농진청이 이전한다면 이 훌륭한 전답은 또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서호공원 산책길. 새소리도 정겹다.

 서호공원의 생태계 꽃 밭. 분수도 만들어 놓았다.

서호의 모습. 서호는 원래 잉어가 유명했다. 나랏님한테 진상했다고 한다. 낚시 금지구역이기 때문에 아마 지금 상당히 많은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넝쿨장미 산책길. 빨간 장미 꽃이 끝이 없다.  

 축만제. 축만교가 없을 때에 소풍와서 이곳에 한줄로 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린 화장실. 이런 곳이 두군데나 있다. 어떤 아이는 지붕위의 새가 진짜 새인줄 알고 무서워서 도망갔다고 한다.     

이건 중국 항주에 있는 그 서호. 글쎄 절경인가? 물론 한쪽만 보아서는 알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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