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유적함대가 된 무적함대

정준극 2010. 2. 9. 06:05

무적함대의 참패

 

'스페인 아르마다(무적함대)의 패전' 1588년 8월 8일. Philipp Jakob Loutherbourg 제작(1796). 영국 국립해양박물관 (National Maritime Museum) 소장

 

1559년, 엘리자베스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 다음해에 ‘수장령’(Acts of Supremacy and Uniformity: 로마 교황의 주권을 부인하고 영국 왕을 영국의 정치․종교 양면의 주권자로 삼는다는 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법안의 골자는 간단하다. 영국 국왕이 교회의 수장을 겸한다는 것이었고 개신교 기도서를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며 예배 의식도 개신교 형식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도서와 예배의식은 당시 궁지에 몰려 있다고 할 수 있는 가톨릭도 쉽게 따를 수 있도록 개정하였다. 한편,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 영국과 스페인간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스페인을 뒤에 업은 메리여왕의 치하에서 쥐죽은 듯 지냈던 엘리자베스가 집권하여 난리를 펴고 있으니 메리여왕의 친정인 스페인으로서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에 도전하였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를 격파하여 대서양에서의 패권을 잡고 세계 제패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해적 드레이크의 활약은 다음 기회에 설명토록 함. 인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캘커타) 아시아식민지를 확대한 것도 엘리자베스 1세였다. 종교에서는 파란이 있었지만 통치에서는 엘리자베스여왕이 대단한 솜씨를 보였다. 찬란한 문화가 꽃 피워졌다. 셰익스피어가 함렛(Hamlet)을 썼던 때도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였다.


영국인들은 타협의 명수이다. 의회 의원은 특히 그러하다. 그런 천부적 재능은 엘리자베스여왕 때에 분명하게 들어 났다. 의회는 여왕이 결혼에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자손의 있고 없음에 따라 왕위계승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미연에 방지코자 교묘한 제안을 하였다. 여왕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이었다. 결과 엘리자베스여왕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당연히 자손이 없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타협은 종종 엉뚱한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엘리자베스 사후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1세의 경우가 그러하다. 제임스1세는 나중에 영국왕 제임스1세로 호칭을 바꾼 사람이다. 스코트랜드의 스튜어트(Stewart) 가문 출신이다. 제임스1세의 등장은 또 다른 새로운 재난의 전조(harbinger)였다. 제임스1세는 누구인가?


그 당시는 종교와 정치가 사실상 서로 역할을 바꿔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의회가 종교에도 간섭하는 일이 많았다. 의회는 제임스1세의 폭군과 같은 통치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불만은 제임스1세가 가톨릭에 대하여 너무 관대한데 대한 불만으로 연결되었다. 제임스1세가 가톨릭을 제재하는 법을 완화하자 그 이후로부터 로마 가톨릭 사람들이 상당수 영국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회의 불만은 더 커져갔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안심하고 있던 가톨릭들이 겁을 먹게 되었다. 가톨릭들은 의회에 대하여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1605년 일단의 가톨릭이 의회를 폭파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그 결과는 참담하였다.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물리친후 기념으로 제작한 엘리자베스1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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