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여왕의 사망일을 국경일로

정준극 2010. 2. 9. 06:05

여왕의 사망일을 국경일로

 

여왕이 되기 전의 메리(레이디 메리).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오마니,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웬수를 갚겠나이다."

 

메리의 성공회 핍박에 대하여 성공회측도 만만치 않았다. 메리의 가톨릭 재건에 저항하는 세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톨릭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순교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개신교도들이 수없이 많았다. 영국의 개신교들도 가톨릭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골고다를 향해 걷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가톨릭은 부패부정의 온상이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라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개신교 신자들이 많았다. 가톨릭을 싫어하였으며 가톨릭을 등에 업은 외세의 영향을 증오하였던 영국의 개신교도들이 순교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바람에 가톨릭은 움칠하는 입장이 되었다.


개신교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게 되자 가톨릭을 수호하기로 다짐한 메리여왕은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신교도에 대하여 본격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1555년 1월부터 시작된 박해운동으로 인하여 수백명의 개신교 신도들이 화형을 당하거나 도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처형당한 개신교도들의 피가 강물처럼 거리에 흘렀다. ‘블라디 메리’(Bloody Mary)라는 말은 이때를 생각하여서 나온 용어이다. 메리여왕에 의한 개신교 순교자들의 수는 수백명에 이른다. ‘겨우 수백명?’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사실 이것은 당시 다른 유럽 국가에서 자행되었던 보복성 마녀 사냥식 화형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그 엄청남 숫자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1544년경 헨리8세의 가족. 왼쪽 레이디 메리, 에드워드 왕자, 헨리8세, 제인 세이모어, 레이디 엘리자베스. 전처들의 딸들은 아버지와 가까이 서지도 못했던것 같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뭐 보고 놀란다고 영국은 메리가 죽자 이후 어떠한 군주라고 해도 가톨릭 절대 사절을 내세우도록 했다. 가톨릭에 대하여 그저 약간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메리 여왕이후 오랫동안 영국 국왕은 성공회 신자만이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찰스2세가 오랜 개신교 왕권에서 돌연변이처럼 예외였던 마지막 가톨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찰스2세는 평소 가톨릭 신앙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생전에는 감히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나서지 못하였다가 임종하는 순간에 비로소 개종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영국의 가톨릭 증오는 상상외로 깊었다. 가톨릭에 의한 득세를 주도하였던 메리여왕에 대한 증오도 당연히 깊었다. 영국 국민들이 메리여왕의 사망일인 11월 17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그후 몇 년동안을 축제를 벌였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비교컨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래도 양반이다. 늙어서 죽은 김모 선생이나 자살한 노모씨의 사망일을 국경일로 삼지는 않았잖는가? 여담이지만 김일성이가 죽었을 때 시청 부근에 있는 어떤 식당에서는 '축 사망'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고 한다.


메리여왕이 세상 떠난 후 개신교가 영국 사회에 단단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중요한 것은 의회의 구성에 있어서 극단 개신교인 청교도가 다수를 점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의회 의원들은 이제로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헨리8세 치하에서의 의회는 국왕이 로마 교황청과의 결별을 합법화하기 위한 하수인에 불과하였다. 어쨋든 메리 여왕 이후 의회의 권한이 점차 강화된 것은 격세지감이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건대 헨리8세가 왕권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권세인 교황청을 몰아내기 위하여 의회를 세우고 이를 십분 활용하였으나 그 의회가 나중에는 왕권에 도전의 주역을 맡아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메리 여왕의 사후, 의회가 새로운 위치를 차지하기까지는 그다지 긴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메리의 승계자인 똑똑하면서도 교활하기까지 한 엘리자베스여왕은 45년간에 걸친 장기 통치 기간 중 의회를 자기 목적에 맞게 아주 잘 조정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참을성 있게 양보하고 타협할 줄 아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천일의 앤인 앤 볼레인의 딸). 드레스는 정말 기가막히게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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