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가톨릭 + 가톨릭 = 가톨릭

정준극 2010. 2. 9. 06:08

가톨릭 + 가톨릭 = 가톨릭

 

제임스1세의 두 번째 왕비인 모데나 출신 메리(Mary of Modena)가 아들을 낳았다. 자식 없이 15년을 지내던 끝에 생긴 일이었다. 더구나 메리는 가톨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 왕위 계승자는 제임스의 딸 메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일이 묘하게 변한 것이다. 의회를 비롯해서 전 개신교들이 메리가 여왕이 되는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덜컥 왕위 계승 1순위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가톨릭왕과 가톨릭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가톨릭이 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영국의 앞날은 가톨릭이 지배하게 될 처지였다. 이런 사태에 대한 개신교의 반응은 재빨랐다.

 

1690년 제임스2세와 윌렴3세의 보인전투(Battle of Boyne). Jan van Huchtenburg 작품

 

영국의 대지주 7명이 연합하여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렴’(Prince William of Orange)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영국을 가톨릭의 위기로부터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임스2세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자기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아버지인 찰스1세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의회군에게 패배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처참한 운명을 마지하였고 아들인 제임 2세는 왕관을 버리고 도망간후 발각되어 1899년 크리스마스 날에 영국땅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마리아 스투워트(1631-1660)와 오렌지공 윌렴(1626-1650)의 결혼. Gerard vna Honthorst 작품


영국의 성공회는 청교도, 그리고 국교인 성공회에 속하지 아니한 기타 개신교(이들을 Nonconformist라고 불렀음)와 얼굴을 맞대고 협의하여 다시는 국왕 문제로 종교가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정하는 문제는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얽매여 있고 권력장악과도 직결된 사항이라서 좀처럼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렌지 공이 왕관을 공동으로 받게 되었다. 메리는 메리2세 여왕이 되었고 남편 오렌지 공은 윌렴3세 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89년의 일이다.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같은해인 1689년, 의회는 권리장전 (Bill of Rights)을 선포하였다.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킨 법안이었다. 선전포고권, 국회해산권이 국왕으로부터 의회로 주소지를 변경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 알려진 입헌군주정치의 시초였다. ‘권리장전’의 골자는 간단히 말하여 ‘군주(여왕)는 군림 (reign)하되 통치(rule)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권리장전’은 영국 왕좌로부터 영원히 가톨릭을 배척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같은 가톨릭 출입금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약 10년 후인 1701년, 의회는 이른바 화해법(Act of Settlement)이라는 것을 채택하였다. 어떤 사항이 구체적이란 말인가? 가톨릭인 스튜어트왕조를 영국 왕위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27세의 오렌지공 윌리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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