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카의 칼라스 Cheryl Studer (셰릴 슈투더)
셰릴 슈투더는 또 하나의 위대한 미국의 자랑이다. 슈투더는 미시간주 미드랜드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피아노와 비올라를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열두살때에 ‘파리의 칼라스’라는 음반 앨범을 듣고 나서는 오페라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를 졸라서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예술고등학교를 나온 슈투더는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의 오버린(Oberlin)음악원에 들어갔다. 1년후 식구들과 함께 테네시로 이사간 슈투더는 낙스빌의 테네시 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다. 어느때 우연히 레오나드 번슈타인이 슈투더의 노래를 듣고 그 재능을 높이 사서 탱글우드의 버크셔 음악센터에 3년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슈투더의 첫 연주회는 1976년 탱글우드에서 마태수난곡(바하)의 솔리스트로 출연한 것이었다. 오사와 세이지가 지휘하는 보스톤 심포니가 협연했다. 1979년 여름, 슈투더는 비엔나 근교의 바덴에 있는 슈베르트음악원에서 외국성악가를 위한 독일 가곡 과정에 참가하였다. 교수진으로는 이름가르트 제프리트(Irmgard Seefried), 브리기테 화쓰밴더(Brigitte Fassbaender), 한스 호터(Hans Hotter)등 당대의 성악가들이었다.
마샬린
위대한 바리톤이며 비엔나 음악예술대학 교수였던 한스 호터는 슈투더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비엔나 음악예술대학에 다닐것을 강력히 권장하였다. 1년동안 이 대학에서 공부한 슈투더는 한스 호터의 주장에 따라 바바리아 국립 오페라의 오디션에 참가하고 합격하였다. 그후 슈투더는 다름슈타트, 베를린 등지에서 오페라 무대를 경험하면서 경력을 쌓아갔다. 첫 오페라 주역 데뷔는 1983년 브라운슈봐이그 극장에서 비올레타를 맡은 것이었다. 다음해에 슈투더는 미국 오페라 무대에 첫 데뷔를 하였다.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카르멘의 미카엘라를 맡은 것이었다. 한편,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것은 1985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를 부른 것이었다. 이로서 슈투더는 세계적인 디바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슈투더는 소프라노로서는 이례적으로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슈투더는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마적), 돈나 안나(돈 조반니), 백작부인(피가로의 결혼)으로부터 바그너의 지그린데, 엘리자베트, 엘자(로엔그린)에 이르기까지, 로시니의 마틸데와 세미라미데로부터 도니제티의 루치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베르디의 오다벨라(Odabella)와 비올레타로부터 구노의 마르게리트에 이르기까지, 또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여주인공들에 이르기까지 70여 역할을 언제라도 맡아할수 있다. 아마 전설적인 로테 레만 이후 슈투더만큼 다양성을 지닌 소프라노는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슈투더는 오페라 이외에도 자기의 첫 사랑인 가곡(Lied)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92년 미국과 유럽, 그리고 극동에 이르기까지 대순회연주에 나섰다. 슈투더는 슈베르트, 브람스,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휴고 볼프의 가곡에 대하여 놀랄만한 해석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드빗시와 사무엘 바버와 같은 비교적 현대 작곡가에 의한 예술 가곡에도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도전하였다.
엘자
슈투더도 유명한 상을 많이 받았다. 1977년 뮤지컬 아메리카 대상(1977)을 받은 것을 필두로 미세스 프레데릭 스타우튼상(1978), 프란츠 슈베르트 음악원상, 마리아 칼라스 대상, 국제클래식음악상(1993), 올해의 최고 여성 성악가상(1993),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상, 전미국 최고 성악가상(1994)등을 받았다. 아무튼 이는 슈투더가 얼마나 위대한 성악가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일이다. 슈투더는 지금까지도 음악을 사랑했지만 앞으로 사랑하며 지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