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포그럼이 뭐길래?

현대에도 계속된 포그럼

정준극 2009. 11. 11. 06:33

[현대의 포그럼](헵-헵 폭동)

 

헵-헵(Hep-Hep)이란 것은 19세기 초반, 독일에서 일어난 반유태인 폭동을 말한다. 1819년 8월 2일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비롯한 반유태인 폭동이다. 이 폭동은 곧이어 다른 나라로도 번져 덴마크, 폴란드, 라트비아, 보헤미아(체코) 등지에서 비슷한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재산을 빼앗겼다. 어떤 마을에서는 폭도들이 유태인들 구타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데에도 경찰이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했다. 독일에서의 이같은 반유태인 폭동은 훗날 히틀러에 의한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전초 역할을 했다. 헵-헵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목동들이 양떼를 몰고가며 내는 소리이다. 하지만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빼앗겼다는 뜻의 라틴어인 Hierosolyma est perdita(Jerusalem is lost)의 첫 글자를 따서 Hep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도 일부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이 보기 싫으면 지나가면서 헵헵이라고 중얼거리며 마치 쓴 오이 보듯이 한다고 한다.

 

헵-헵 포그럼. 독일의 주부들이 빗자루와 쇠스랑으로 유태인을 공격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유태인의 멱살을 잡고 몽둥이로 때리고자 하고 있다. 경찰은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 2층 집에서는 오물을 유태인에게 뿌리고 있다. 서양사람들은 교양도 있고 예의도 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학대하는 독일인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올까?

 

첫 번째로 기록된 대규모 반유태인 포그럼은 제정러시아 당시인 1821년 오데싸(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의 폭동일 것이다. 그리스정교회의 주교가 이스탄불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 일에 유태인들이 연루되었다고 하며 유태인 14명을 잡아 처형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859년 오데싸에서 본격적인 유태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오데싸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그리스선박의 선원들이 갑자기 유태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죽인 놈들’이라고 소리치며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가세하여 유태인들을 공격하여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다쳤다. 이날은 마침 성스러운 부활절이었다. 그 후에도 오데싸에서는 1871년, 1881년, 1886년에 유태인 박해 사건들이 일어났다. 흑해의 오데싸 항구는 동유럽에서 유태인 포그럼의 본거지였다.

 

1905년 제정러이사 에카테리노슬라브에서의 유태인 포그럼 희생자. 대부분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살해되었다.

 

1881-1884년, 제정러시아 서남부 지역에서는 반유태인 폭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다. 러시아어인 포그럼이라는 말이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4년에 걸친 대규모 포그럼의 진원은 알렉산더 2세에 대한 암살이었다. 당시 언론과 러시아정교회는 짜르(황제)의 암살에 유태인들이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불행하게도 암살단원의 한명인 게스야 겔프만(Gesya Gelfman)은 알고 보니 유태인이었다. 암살단원의 다른 멤버들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유독 유태인이 한명 끼어 있었던 것이 폭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펴준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제정러시아의 지방경제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람들은 유태인이 경제를 쥐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지방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유태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만 남았었다. 전국적으로 반유태인 박해가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유태인들은 가족을 잃고 재산을 빼앗겼으며 살던 집을 뒤로하고 정처 없는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알렉산더2세 황제의 피살. 이 자리에 유명한 '우리구주 보혈교회'가 세워졌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교회는 왜 세우나?

 

1881-84년의 유태인 박해는 1903-1906년에 제정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일어난 피비린내 나는 반유태인 폭동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폭도들이 유태인의 집들을 공격하자 일부 유태인들은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러자 총을 본 폭도들이 더 걷잡을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수천명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부상을 당한 유태인들은 부지기수였다. 군중심리도 한몫을 차지했다. 반유태 폭동이라고 하면 전통을 자랑하는 오데싸에서 가장 심했다. 오데싸에서만 2천5백명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유태인들의 시체가 거리에 뒹굴어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밤에는 개들이 유태인의 시체를 으르렁거리면서 뜯어 물었다. 나중에 사학자들은 오데싸를 비롯한 제정러시아 전역에서의 유태인 포그럼이 짜르의 비밀경찰인 오크라나(Okhrana)가 배후에서 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생페터스부르크에 본부를 둔 제정러시아 비밀경찰의 간부들. 이들이 제정 러시아에서 유태인 포그럼의 주역이었다. 겉으로는 점잖게 보이는 이들이 실은 생사람을 학살하는 장본인들이었다. 인간의 심성은 원래부터 악한 것인가? 

 

제정러시아에서 1880년대의 유태인 박해, 그리고 1905년의 유태인 포그럼은 전세계적으로 유태인들의 대규모 이민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제정러시아에서는 1880-1914년 사이에 2백만명의 유태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로 영국과 미국으로 떠났다. 짜르시대에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화되자 일부 유태인들은 ‘우리도 큰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생각으로 다른 나라에서 정치계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분트(The Bund)라고 알려진 종합유태인노동연맹의 입지를 강화하는가 하면 볼세비크 운동에도 참여하였고 또한 결과적으로 시온주의(Zionism)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때에도 유태인에 대한 포그럼은 양념처럼 따라다녔다. 사회주의 혁명분자들은 종교를 타협할수 없는 적으로 간주하였으며 특히 18세기 폴란드에서 일어난 신비주의적 유태교인 하시디즘(Hasidism)에 대하여는 이것이 소련사회주의 프로그램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박해에 박차를 가했다. 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란에서도 유태인은 희생양이었다. 반소비에트 세력들은 마르크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인의 아들이란 점을 들어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했다. 이로 인하여 7만에서 25만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러시아에서 학살을 당했으며 유태인 고아들은 30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렇듯 엄청난 희생자들도 나중에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정책에 의한 희생자의 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의 하시디즘 회의. 하시디즘은 영성과 기쁨을 얻는 것을 유태신앙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초정통유태교이다. 하시디즘은 현재의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활발했었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유태인에 대한 포그럼은 동부와 중부유럽에까지 파급되었다. 뿐만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반유태인 운동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1831-1829년의 그리스 독립전쟁에서는 수천명의 유태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 그리스 정부군은 유태인들이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고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1919년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른바 ‘비극적인 주간’(Tragic Week)에 포그럼이 진행되었다. 1927년에는 루마니아의 오라데아(Oradea)에서 포그럼이 있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긴장이 고조되자 아랍 국가들은 유태인들을 집단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41년 바그다드에서는 약 400명의 유태인들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성난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45년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일어난 반유태인 폭동에서는 140명의 유태인이 죽임을 당했다. 유태인들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아랍국가를 떠나 주로 이스라엘로 발길을 돌렸다.

 

아르헨티나의 '비극적 주간'(La Semana Tragica)에 정부에 의한 검열을 비난하는 그림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원래 유대교의 전번제(全燔祭) 즉,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 앞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사람이나 가축을 전부 태워 죽이는 뜻으로 사용되다가 2차 대전 중에는 고유명사로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의미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히틀러가 저지른 유태인 홀로코스트만큼 가공할 포그럼도 없다. 독일에서 포그럼의 시작은 1938년 11월 7일 나치에 의한 크라스탈나하트(Kristallnacht)였다. ‘수정처럼 투명한 밤’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독일 아리안민족의 사회에서 유태인들을 깨끗하게 청소해 버리자는 운동을 말한다. 이날밤 독일의 전역에서(그 다음날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들이 공격을 받았다. 나치들은 군가를 부르며 유태인들의 상점을 파괴하였고 재물을 약탈하였고 유태인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폭행하였다. 단 하루밤 만에 2백명이 넘는 유태인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3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유태인들은 왜 자기들이 죽임을 당해야 하고 왜 집에서 쫒겨나 강제수용소로 들어가서 노동을 하다가 죽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며 언젠가는 메시아가 나타나 구원해 줄것으로 믿고 양처럼 순순히 복종하였다.

 

나치 친위대의 유태인 집단 학살장면. 나치들은 이런 게임을 즐겼다.

 

유태인들을 처단한 것은 독일인만이 아니었다. 동구에서도 독일의 유행을 본받아서 유태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동구의 여러 나라들은 독일이 그동안 제정러시아로부터 받은 압정으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믿었으며 그와 함께 독일이 청소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태인들을 기꺼이 청소함으로서 독일에게 잘 보이자고 했다. 이로 인하여 수천명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1941년 폴란드의 예드봐브네(Jedwabne) 포그럼에서는 폴란드 시민들이 독일의 지원을 받아 약 1천6백명의 유태인들을 죽였다. 우크라이나의 르비브(Lviv: Lwow)에서는 1941년 6월 우크라이나 국수주의자들이 두 번에 걸친 대규모 포그럼을 진행하여 6천명의 유태인들을 살해했다. 유태인들이 과거 소련정부에 협조했다는 명목이었다. 말이 6천명이지 이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학살행위였다. 같은 기간에 리투아니아에서는 나치군이 입성하자 국수주의자들이 앞장서서 유태인들을 색출하여 살해했다. 3천8백명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거의 모든 유태인 시나고그가 파괴되었다. 유태인 소유의 개인상점들이 파괴되고 약탈당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벨라루스의 민스크에서도 비슷한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전쟁후에 약 5천명의 유태인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당한 무덤이 발견되어 벨라루스 포그럼의 규모가 밝혀졌다. 홀로크스트 기간 중에 가장 잔혹한 포그럼은 아마 루마니아의 이아시(Iasi)에서 일어난 포그럼일 것이다. 루마니아 주민들이 경찰과 군대의 협조를 받아 무려 1만3천2백여명의 유태인을 살해하였다. 정말 왜들 이러나? 너무나 잔인하도다.

 

나치는 루마니아에서 로마니(Romani)와 신티(Sinti)를 불량민족이라고 하여 추방하고 학살하였다. 사진은 루마니아의 이아시에서 로마니 아이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장면. 로마니는 아직도 유랑생활을 하는 집시들을 말하며 신티는 유럽의 사회에 적응하여 사는 집시들을 말한다.

  

홀로코스트에 대하여는 별도 설명코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