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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이전의 쉴링

정준극 2017. 2. 27. 14:49

유로 이전의 쉴링(Schilling)

지폐의 인물들. 화가, 의사, 물리학자, 경제학자, 건축가, 작곡가, 발명가


오스트리아의 쉴링화는 1999년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주화와 지폐로 구분되며 주화는 그로센과 쉴링으로 되어 있고 지폐는 쉴링만으로 되어 있다. 주화의 경우는 문양이 대체로 오스트리아 문장(Coat of Arms)이다. 그로센은 1, 2, 5, 10, 50 그로센이 있고 쉴링 주화는 1(에델바이스), 5(기마인, 오스트리아 문장), 10(여인, 오스트리아 문장), 20(오스트리아 9개 주 상징), 50(오스트리아 문장) 쉴링이 있다. 다음은 지폐의 표면에 소개된 인물들이다.



20쉴링은 화가 겸 조각가인 모리츠 다핑거(Moritz Daffinger: 1790-1849). 뒷면은 알베르티나 미술관. 모리츠 미하엘 다핑거는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공장의 화공이었다. 다핑거는 11살 되던 해에 다른 일반 소년이나 마찬가지로 도제생활을 시작했다. 역시 도자기 공장에서였다. 이어 도자기 공장의 후원으로 비엔나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가서 본격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휘거(Heinrich Fuger)로부터 미술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다핑거의 전문분야는 도자기 그림에 중점둔 것이었다. 그러다가 1809년부터는 초상화에만 집중하였다. 특히 상아에 미니에이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잘 하였다. 1812년에는 메테르니히 재상의 세번째 부인인 멜라니에 공주의 초상화 개인 수집품들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다. 다핑거는 1849년 비엔나에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 콜레라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처음에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마련되었으나 1912년에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다핑거는 1천 점 이상의 초상화들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합스부르크 황실이 소장하였다.



50쉴링은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뒷면은 비엔나의과대학교의 요제피눔 해부학교실. 프로이트의 원래 이름은 지그문트 슐로모 프로이트이다. 오스트리아의 신경병리학자로서 정신분석학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이다. 정신분석학은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으로서 환자와 정신분석전문가의 대화를 통해서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라비아(현재의 체코공화국)의 프라이버그 마을에서 갈리치아 유태인 부모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모라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프로이트는 1881년 비엔나대학교에서 의사자격을 획득했다. 그는 1886년부터 비엔나에서 임상치료를 시행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인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떠났고 이듬해인 1939년에 영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100 쉴링은 경제학자인 오이겐 폰 뵘 바베르크(Eugen von Bohm-Bawerk: 1851-1914). 뒷면은 오스트리아학술원 건물.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발전을 위해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1895년부터 1904년까지 오스트리아제국의 재무장관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에 대한 일련의 비판서적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500 쉴링은 건축가로서 도시계획 수립가인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1918). 뒷면은 우편저축은행. 오토 바그너는 비엔나 교외의 펜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실 공증인이었다. 그는 비엔나의 폴리테크니크연구소와 베를린의 궁정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비엔나에 돌아온 그는 1864년에 첫 건축물을 설계했다. 역사주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다가 18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에서 유행하였던 사실주의 건축을 지향하였다. 사실주의는 역사주의를 배척하는 건축양식이었다. 그것을 유겐트슈틸이라고 불렀다. 바그너는 1890년대에 이미 유겐트슈틸로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 1890년에는 비엔나가 새로운 도시계획을 실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에는 전철 로선과 몇군데 역사(Stadtbahn)를 설계했을 뿐이었다. 그후 바그너는 유겐트슈틸의 리더격으로서 마욜리카하우스, 우편저축은행 건물, 슈타인호프 교회 등을 설계했다. 부다페스트의 룸바흐 슈트라쎄 시나고그도 바그너의 솜씨이다. 오토 바그너는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1000 쉴링은 노밸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 뒷면은 비엔나대학교. 물리학의 파동이론과 수많은 양자역학 이론을 주창하였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원자물리학, 핵물리학, 고체물리학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5000 쉴링은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뒷면은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Staatsoper). 앞면의 건축물 그림은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모습이다. 모차르트는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없어서 생략한다. 대신에 5000 쉴링 지폐의 뒷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건물은 슈타츠오퍼이며 오른쪽의 두 사람 기념상은 '마술피리'에서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이다. 비엔나의 4구 뷔덴의 모차르트플라츠에 있는 '마술피리 분수'이다. 5000 쉴링짜리 지폐는 액면이 너무 고가여서 일반 사람들로서는 구경하기가 어렵다.




[추가 발행 지폐]


1968년에 발행한 20 쉴링 지폐. 건축공학자인 칼 리터 폰 게가(Carl Ritter von Ghega: 1802-1860). 글로그니츠에서 뮈르츠추슐라그에 이르는 젬메링반(Semmeringbahn)을 설계했다.


1961년에 발행한 1000 쉴링. 엔지니어인 빅토르 카플란(Viktor Kaplan: 1876-1934). 유명한 카플란 터빈을 발명했다. 오른쪽에 카플란 터빈이 보인다.


[1997년에 발행한 신권 쉴링화 지폐]


오스트리아 여성운동가, 자유사상가, 작가, 화가, 음악가인 로자 마이레더(Rosa Mayreder: 185801938). 최초의 오스트리아 여성협회 대회를 비엔나에서 주관하였다. 남편 칼 마이레더는 유명한 건축가로서 로자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 지폐의 뒷면에 남편 칼의 사진도 나오며 비엔나 여성대회 장면이 사진으로 나온다.

1911년 비엔나에서의 오스트리아여성협회 대회에 참석했던 여성운동가들의 면모. 상단 중앙에는 로자 마이레더와 남편인 칼 마이레더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물학자 겸 의사인 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을 내세웠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그는 1차 대전 후인 1923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의 라커펠러의학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그는 적혈구가 다른 사람의 혈청에 의해 응딥되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에 의해서 혈액을 ABO의 형태로 분류하였다. 또한 혈액 중에 Rh 인자를 발견하여 수혈이 안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는 혈액연구에 대한 공적으로 193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는 비엔나 출신이어서 오스트리아의 자랑이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미국인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연구실에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란트슈타이너. 혈액형을 처음으로 ABO로 분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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