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벨칸토 오페라

벨 칸토 오페라가 뭐길래

정준극 2017. 6. 24. 06:00

벨 칸토(Bel canto) 오페라

벨레쩨 델 칸토(Bellezze del canto) - 벨라르테 델 칸토(Bell'arte del canto)

 

대표적인 벨 칸토 오페라인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의 엘리나 가란차. 메트로폴리탄.

 

'벨 칸토'라는 말은 '아름답게 노래부르기'라는 뜻의 이탈리아 오페라 용어이다. '벨 칸토'는 '벨레쩨 델 칸토'(Bellezze del canto) 또는 '벨라르테 델 칸토'(Bell'arte del canto)라고도 한다. 모두 노래를 아름답게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뜻은 간단하지만 의미는 여러가지이다.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벨 칸토'는 오페라의 한 장르이기도 하지만 성악 창법(발성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벨 칸토' 창법은 대체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기본을 이루는 창법이다. '벨 칸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페라의 역사를 생각헤 보는 것이 필요하다. 15세기와 16세기에 있어서 오페라라는 것은 왕궁이나 지체 높은 귀족들의 저택에서 여흥으로 공연되던 것이었다. 부유한 왕족들이나 귀족들은 자기들만의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을 보유하고 오페라를 공연하여 자기들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며 즐거워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오페라라는 것이 왕족이나 귀족들의 탄생, 세례, 명명, 결혼, 서거, 귀빈접대 등 중요한 경우를 위해 만들어지고 공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왕궁에서나 개인 저택에서의 오페라 공연은 무대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악가들은 그다지 큰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사실 관중들도 무대 위에서 누가 노래를 잘 부르는지,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에 대하여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거나 먹고 마시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심지어는 오페라 공연 중에 도박도 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초에 베니스에 일반인을 위한 오페라 전용극장이 생기자 오페라 성악가들은 극장 안 객석의 구석구석까지 소리를 내보낼수 있어야 했다. 이와 함께 드라마의 내용에 따른 감정의 표현도 충실하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해서 개발된 것이 '벨 칸토'창법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17세기 초에는 '벨 칸토'라는 용어 자체도 없었다. 그런 용어가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 부터였다. 오페라 세리아의 전성시기인 18세기 중반까지는 벨 칸토라는 말이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오페라 세리아의 전성시기에는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 그리고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카스트라토(castrato) 음성이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벨 칸토'라는 용어는 매력적으로 아기자기하게 마음에 들도록 노래 부르는 스타일보다는 자기 감정을 넣어서 보다 힘차게 노래 부르는 스타일로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19세기에는 극장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커졌지만 오페라가 보다 드라마틱해졌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소리보다 더 크게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의 노래부르기를 '벨 칸토'라고 정식으로 부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1900년 이후였다. 사실 '벨 칸토'라는 용어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명확한 설명이 없이 그저 애매모호하게 설명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최근까지만 해도 '벨 칸토'라고 말하면 그저 지나간 시절에 그런 노래부르기 창법도 있었구나 라고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정도였다.

 

'사랑의 묘약'. 취리히 오페라


반복하는 설명이지만, '벨 칸토'는 18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아름답게 노래부르는 스타일로서 19세기 중반까지 대유행을 하다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잠시 주춤했던 창법, 또는 그 창법을 사용한 오페라 공연을 말한다. '벨 칸토' 스타일의 특징은 대충 다음과 같다.

 

- 완벽한 레가토(legato)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중간에 노래가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불러야 한다.

- 고음에서는 가벼운 톤을 사용한다. 고음에서 무겁게 노래불러서는 안된다.

- 경쾌하고 유연성있는 테크닉으로 노래를 부른다. 장식음을 적절히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

- 빠른 소절도 정확하게 소화한다. 애매하게 부르면 곤란하다.

- 비브라토를 삼가하고 또한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 기분 좋은 음성이어야 한다. 음성이 집중되어야 한다. 외치거나 고함 소리를 내면 안된다.

- 깨긋한 소리가 나가도록 해야 한다. 허스키소리, 탁한 소리 등은 안된다.

- 분명하고 맑은 딕션이 이루어져야 한다. 가사가 정확해야 한다.

- 우아한 프레이싱. 완전한 호흡조절로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따지고 보면 헨델(1685-1759)을 비롯한 바로크 시기의 작곡가들이 작곡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는 '벨 칸토' 창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바로크 작품들은 다 카포 아리아를 포함하고 있어서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자기의 자기의 재능과 기술을 충분히 나타내 보일수 있었다. 특히 즉흥적으로 장식음을 사용하는 것은 이 시기의 특징과 같았다. 당시의 다 카포 아리아는 폭 넓고 유연한 흐름, 정교한 장식음, 모르덴트(mordent: 주요음에서 2도 아래를 거쳐 주요음으로 되돌아가는 장식음), 룰라데(roulade: 급하게 달리는 듯한 창법), 스타카토(staccato: 절단음) 파사지(악절)의 완벽한 구사, 아포지아투라(appoggiatura: 원래 음표와는 달리 장식음을 사용하는 것), 아키아카투라(acciaccatura: 짧은 아포지아투라), 마르카토(marcato), 메사 디 보체 효과(mesa di voce effects: 똑같은 피치를 유지하면서 크레센도와 디크레센도의 효과를 표현함), 빠른 스케일, 두 옥타브 또는 그 이상의 음역을 넘나드는 폭넓은 음성, 보다 많고 보다 화려한 카덴짜(cadenza)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발성적 테크닉은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콜로라투라이다. 그런데 다 카포 또는 DC라고 하면 노래를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여 부르는 것을 말하지만 반복해서 부를 때에는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하여서 자기의 성악적 기교를 모두 동원하여 장식음도 붙이면서 부르는 것이 통상이다. 

 

헨델의 '세르세'. 벨칸토 스타일의 창법


'벨 칸토 오페라'라고 하면 벨 칸토 창법에 의한 오페라라고 광의적으로 규정할수 있지만 협의적으로는 로시니(1792-1868), 도니체티(1797-1848), 벨리니(1801-1835)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말한다. 이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아무튼 이들 3인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시기를 '벨 칸토 시기'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벨 칸토 시기는 대강 1805년부터 1840년까지를 말한다. 벨 칸토 시기의 작품들은 바로크 음악의 가치를 보전하였다. 하지만 오페라 세리아의 특성이나 다 카포 아리아는 18세기가 지나감에 따라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 점도 있다. 특히 오페라에서의 카스트라토 음성은 사람들의 기호가 달라지고 사회적 기준이 변해졌기 때문에 생존하기가 힘들었다. 대신에 프리마 돈나 소프라노와 비르투오소 테너라는 초특급 성악가들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카스트라토 역할이 마지막으로 반영된 오페라는 아마도 1824년에 자코모 마이에르베르(1791-1864)가 작곡한 '이집트의 십자군'(Il crociato in Egitto)일 것이다.

 

  

벨칸토 오페라의 3개 작곡가. 왼쪽으로부터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


'벨 칸토'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일 것이다. 그렇게 늦게 정립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벨 칸토에 대한 거부반응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는 벨 칸토가 독일적인 보다 무겁고 보다 강력한 스타일의 오페라를 발전시키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는 마치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과 같은 독일식 오페라의 스타일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바그너의 혁명적인 음악드라마(악극)는 대표적이었다. 바그너(1813-1993)는 이탈리아 식으로 노래부르는 것, 즉 벨 칸토를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에서는 G 또는 A의 음을 어떻게 둥글게 내느냐면서 법석을 떠는데 과연 무엇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까지 말했다. 바그너는 새로운 독일적 창법을 주창했다. 정신적으로 충만하여 열정에 넘쳐 있는 노래를 불러서 감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신통하게도 18세기 이탈리아의 벨 칸토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카스트라토 음성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노래 가사는 분명하고 똑똑하게 발음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마치 활짝 핀 꽃처럼 화려하고 장식적이기만 한 가사를 반대했다. 그런데 카스트라토, 그리고 그 후의 이탈리아 벨 칸토는 그저 소리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가사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식이라는 견해였다다.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에 의한 벨 칸토는 이탈리아에서 18세기 중반에 대인기를 끌었지만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인기가 시들해졌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보다 심각하고 보다 열렬한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베르디(1813-1901)의 작품이 대표적이었다. 베르디의 노래를 부르려면 보다 감정에 충실해야 하며 열정을 품어야 했다. 다시말해서 드라마틱한 효과가 상당히 큰 노래를 불러야 했다. 예를 들어 테너의 경우를 보자. 그전까지 테너들의 노래는 음역이 그다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부르기에 편했고 듣기에도 편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오페라의 내용이 보다 극적으로 기울게 되자 테너들도 소리를 부풀려서 드라마틱한 소리를 내야했다. 우선 고음을 시원하게 뽑아내면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았다. 그래서 테너들은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하이 C 음, 또는 그보다 높은 하이 D 음을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를 위해 테너들은 소리 내기 편한 두성이나 팔세토(falsetto)를 사용하는 대신에 흉성을 사용하여 직접 소리를 냈다. 소프라노와 바리톤들도 동료 테너들의 패션을 따라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베르디의 드라마틱한 작품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콘트랄토나 베이스는 베르디의 이같은 음악적 혁신에 별로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디의 후임자들인 폰키엘리(1834-1886)나 보이토(1842-1918)등은 콘트랄토나 베이스에 대하여도 베르디의 테너나 소프라노, 또는 바리톤에서와 비슷한 능력을 개발하도록 요구하였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노레를 아름답게 부르지 않고 소리만 지른다고 핀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벨 칸토 오페라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때 사양길에 접어 든 일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벨 칸토를 싫어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의 영향이 커서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바그너의 영향이 하도 커서 베르디 추종자들이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지내던 것과 같다. 벨 칸토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벨 칸토가 유행에 뒤떨어진 구태의연한 것이며 발성에 있어서도 알맹이가 결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상당수 사람들은 벨 칸토가 그저 추억 속의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감미로운 톤으로 발성하는 테크닉을 말하거나 또는 그 발성법을 사용하여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라고 보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들어와서 벨 칸토라는 용어가 부활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탈리아 성악가들이 벨 칸토의 부활을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베르디 바리톤인 안토니오 코토니(Antonio Cotogni: 1831-1918)였다. 코토니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은 마치 신에게 간구라도 하듯 격정적이며 명확하지도 않은 비브라토 스타일의 발성은 '이제 그만!'이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그런 발성은 실상 1890년대 이후의 성악가들에게서 자주 볼수 있는 것이었다. 왜 그랬느냐하면, 푸치니(1858-1924), 레온카발로(1857-1919), 마스카니(1863-1945), 조르다노(1867-1948) 등 이른바 베리스모 작곡가들의 영향이 하도 컸기 때문에 그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 및 기타 후기 낭만주의와 초기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은 말하자면 격렬하고 모난 성악 라인을 추구하였으며 그들의 오케스트라 음향은 산뜻한 것이 아니고 간혹 짙은 것이어서 거부반응을 가질수도 있었다.

 

벨리니의 '노르마'의 한 장면. 체코 오페라. '노르마'는 벨칸토 오페라의 전형이다.

 

그런데 안토니오 코토니 등등의 벨 칸토 부활 주장은 바그너 오페라로 인해서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는 바그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페라가 아닌 뮤직 드라마로서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1890년대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음악감독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노래하려면, 특히 바그너가 직접 쓴 가사로서 노래를 부르려면 가사의 한 단어 한 단어를 뚜렷한 발음으로 불러야 한다'는 과도한, 그러면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 주장을 펼쳤다. 이른바 바그너 노래 스타일을 강요한 것이다. 바그너 추종자들은 그것을 독일어로는 슈프레헤게장(Sprechgesang)이라고 불렀다. 말하듯이 노래하며 노래하듯이 말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바그너 스타일을 '바이로이트 개짖는 소리'(Bayreuth bark)라고 부르며 비아냥댔다. 그렇지만 어쨋든 소리만 지르며 노래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가사를 더욱 중시하고 또한 레가토의 멋을 싫어하는 이런 창법은 1차 대전 이전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같은 스타일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지향한 '아름다운 노래부르기', 즉 벨 칸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이탈리아가 의도했던 벨 칸토의 의미는 희박해지고 그나마 벨 칸토를 해보겠다는 사람들도 서로 각자의 해석에 따라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벨 칸토는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


바그너의 '파르지팔'. 도이치 오퍼 베를린


20세기 독일의 몇몇 음악학자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서 벨 칸토에 대한 정의를 자기들 나름대로 내렸다. 이들은 1630년대와 40년대에 베니스 오페라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로마 칸타타가 활발해지기 전에 단순하게 서정성만을 강조했던 창법을 벨 칸토라고 정의했다. 당시의 작곡가로서는 안토니오 체스티, 자코모 카리시미, 루이지 로시 등이 있다. 그전에는 대본이 노래를 압도했던 이른바 스틸로 라프레센타티보(Stilo rappresentativo)였으나 이에 대하여 멜로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벨 칸토였고 그것이 19세기에 들어와서 부활했을 뿐이라는 설명이었다. 1928년에 나온 로베르트 하스(Robert Haas)의 '바로크 음악'(Die Musik des Barocks), 1947년에 나온 만프레드 부코프처(Manfred Bukofzer)의 '바로크 시대의 음악'(Music in the Baroque Era)은 모두 그런 주장을 펼쳤던 책이다. 문제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용어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벨 칸토는 한동안 바그너, 베르디, 푸치니 등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못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들어서서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의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고조되었고 동시에 벨 칸토도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벨 칸토 창법을 구사하는 오페라 성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부르는 벨 칸토 오페라들도 아울러 열광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다. 마리아 칼라스, 조앤 서덜랜드, 비벌리 실스, 릴리 폰스 등의 출현이었다. 18세기 벨 칸토 오페라의 부활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벨 칸토에 조금 앞서서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도 벨 칸토 스타일을 주장하였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들을 보면 이탈리아 벨 칸토 처럼 아주 솜씨 좋은 벨 칸토 기술로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고 있다. 다만, 당시에는 성악가들이 벨 칸토 테크닉을 잘 몰라서 그저 일반적인 창법으로 아리아들을 불렀지만 만일 잘만 부른다면 이탈리아 벨 칸토에 못지 않는 아름다운 것일수가 있다. '피가로의 결혼'의 아리아들도 그렇고 '여자는 다 그래'의 아리아들도 그렇다. 모차르트에 앞서서 오페라를 만들었던 헨델의 경우에도 그의 아리아들은 오늘날의 벨 칸토 창법으로 부른다면 그보다 더 멋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과 케루비노. 케루비노의 아리아가 '사랑의 괴로움을 아시나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