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튜턴 기사단

튜턴기사단이 뭐길래

정준극 2019. 1. 26. 13:40

튜턴기사단이 뭐길래

Teutonic Order - Deutscher Orden - Deutschherrenorden - Deutschritterorden


아직도 유럽의 일부 국가들을 다니다 보면 튜턴기사단 또는 독일기사단이라는 명칭을 접할수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그러하다. 비엔나의 중심가에는 독일기사단 본부와 보물박물관과 교회가 있다. 1구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7번지이다. 슈테판대성당 뒷편 길에 있다. 그 건물을 독일어로 도이치오르덴스하우스(Deutschordenshaus)라고 부른다. 1667년부터 독일기사단의 단장(Hochmeister: Grand Master: 기사장)이 집무하고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1326-1375년에 완성된 것으로 사무실과 함께 고틱양식의 교회도 완공되었다. 성엘리자베트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실제로 비엔나의 이 장소에 독일기사단(Deutsche Ritterorden)이 오스트리아 본부가 자리잡은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독일기사단의 기사장은 수백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대공들이 맡아 왔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명망과 함께 세력이 높았다. 한편, 징거슈트라쎄의 이 건물에서는 1781년 3월 18일부터 며칠 동안 당시 25세의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Fürsterzbischof)인 콜롤레도 백작의 하인들과 함께 체류한 일이 있고 그러한 사실을 적은 명판이 아랫층 현관에 부착되어 있다. 또한 브람스도 이 건물에서 1863년부터 1865년까지 지낸 일이 있다. 1809년부터는 독일기사단의 기사단장의 거처와 함께 독일기사단의 보물실이 마련되었다.


비엔나 1구 징거슈트라쎄 7번지의 독일 기사단 본부 건물


튜턴기사단 또는 독일기사단이란 단체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또 언제부터 존재해 왔고 그동안 어떤 중요한 일들을 해 왔는지를 별로 할 일도 없는 터에 조사해 보고자 한다. 독일기사단의 공식 이름은 '예루살렘 성모 마리아 독일 형제단'(The Order of Brothers of the German House of Saint Mary in Jerusalem)이다. 이를 독일어로는 Orden der Brüder vom Deutschen Haus der Heiligen Maria in Jerusalem이라고 한다. 이같은 긴 명칭을 줄여서 간단히 튜턴 종단(Tetonic Order: Deutscher Orden)이라고 부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튜턴기사단 또는 독일기사단(Deutschritterorden: Deutschherrenorde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독일 기사단을 '마리아 기사단'(Marienritter) 또는 '흰 만토의 영주들'(Die Herren im weissen Mante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체 높은 기사분들이 하얀 만토을 걸치고 다니기 때문이다. 독일기사단은 바티칸의 보호아래 유럽 기독교 국가들, 주로 독일의 기사들로 구성된 군사종단이다.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에 속한 종단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종단의 수장은 로마 교황이다. 독일기사단은 1190년경 예루살렘 왕국의 아커르(Acre 또는 에이커)에서 설립되었다. 아커르는 이스라엘 북부의 해안에 있는 전략적 요충 도시이다. 예루살렘 왕국은 잘 아느대로 십자군들이, 즉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때에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탈환하고서 팔레스타인에 세운 나라이다. 예루살렘 왕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레바논 남부, 요르단 남서부에 걸쳐 있었던 국가로서 1291년에 다시 이슬람 교도들에게 정복될 때까지 거의 200년 동안 존속했던 왕국이다.


독일 기사단이 처음 설립된 이스라엘 북부의 아커르. 현지에서는 아코(Akko)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 독일기사단은 성지를 찾아오는 기독교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설립되었다. 독일기사단은 무엇보다 병자들을 돕기 위해 병원을 세워서 운영하였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연관된 기사들이 주축이 되어 독일기사단을 설립했지만 반드시 기사가 아니더라도 병원을 통해 병자들을 돕는 사람들도 독일 기사(Teutnic Knights)라고 불렀다. 독일기사단은 중세에 성지 이스라엘에서 기독교 순례자들의 보호하는 역할도 했지만 발트해 지역에서의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순전히 종교적인 단체로서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기사단의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에게는 기사의 작위도 주고 있다. 독일기사단은 로마 가톨릭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근세에는 개신교에도 독일 기사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우트레헤트의 바일리비크'(Bailiwick of Utrecht)라는 단체이다. 이들도 역시 기사의 작위를 주며 자선 활동을 하고 있다. 기사의 작위를 받을수 있는 사람들은 전투에서의 부상자들을 도와주어여 한다. 그리고 용감하며 정직하고 굳건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 


전쟁에 참가한 독일 기사단


독일기사단은 1190년대에 창설되었다고 했는데 정확히는 1192년이었다. 당시에는 르반트(Levant)라고 불리던 지역의 아커르(에이커, 아크레: Acre)에서 설립되었다. 르반트는 오늘날의 지중해 동부로서 서아시아 지역을 말한다. 지중해 동부에 있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일부, 그리고 지중해 동부에 있는 모든 섬들을 포함한다. 르반트 지역의 중심도시가 아커르였다. 독일기사단은 중세 십자군 국가들을 일컫는 우트레머(Outremer)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트레머는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이 점령하여 세운 나라들을 말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국가는 예루살렘 왕국이었으며 이밖에 에데사(Edessa), 안티옥(Antioch), 트리폴리(Tripoli) 등이 우트레머에 속하였다. 독일기사단은 아커르에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커르에서 항구세를 받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러다가 십자군이 중동에서 패배하자 독일기사단도 서아시아에서 퇴각해야 했다. 독일 기사단은 1211년에 트란실바니아로 본부를 옮겼다. 헝가리 왕국의 동남부 국경을 터키의 유랑족들인 쿠만스(Kumans)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옮긴 것이다. 그러다가 1225년에 헝가리의 주권 아래에서 행동하지 아니하고 트란실바니아에 교황 직속의 체제를 수립하려다가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Andrew II)에게 추방되었고 그후 독립적인 기구로서 행동하였다.


독일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와 기사


독일기사단은 1230년에 리미니 칙령(Golden Bull of Rimini)에 따라서 기시단장(그랜드 마스터)이 주동이 되어 프러시아 십자군을 출범시켰다. 프러시아 십자군은 독일기사단의 후원으로 발트해 연안국에 살고 있는 구프러시아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발트 연안국들을 침공하였다. 당시에 발트 연안국들은 폴란드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프러시아 십자군과 독일기사단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아서 발트 연안국들을 평정하고 그곳에 독립적인 '독일기사단의 수도사 국가'(Monastic State of the Teutonic Knghts)를 수립하였다. 프러시아 십자군은 내친 김에 폴란드 영토도 침공하였다. 폴란드는 독일기사단이 폴란드 영토를 임의로 점령했다고 하여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기사단은 처음에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이나 십자군 부상병사들을 돌보는 자선 목적으로 병원등을 설립하며 활동하였으나 그 목적이 점차 상실되고 나중에는 이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다는 미명아래 침략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 독일기사단이 더구나 명분을 잃게 된 것은 이들이 우상숭배 국가들을 대상으로 기독교화를 내걸었으면서도 기독교 국가들을 침공하여 폭력과 약탈까지 자행한 것이다. 독일기사단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리투아니아를 기독교 나라로 만든다는 시도였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대공국이었다. 독일기사단은 이어서 폴란드 왕국을 침공하였다. 그리고 노브고로드 공화국도 침략하였다. 독일기사단은 튼튼한 재정을 보유할수 있었기 때문에 용병을 고용할수 있었다. 용병들은 유럽의 여러 곳에서 모집할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발트해에서의 해군력도 충분하 강화하였다. 이러한 독일기사단이 한 때는 몰락할 뻔 했었다. 1410년에 폴랜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그룬봘트(탄넨버그: 현재의 폴란드 올츠틴)에서 독일 기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때였다. 그러나 독일기사단은 그후에 마리엔부르크를 폴-라연합군의 공성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수비하여서 그나마 기사단의 붕괴를 막을수 있었다.


마리엔부르크 성. 독일 하노버 남쪽 파텐젠에 있는 요새. 독일 기사단이 이 요새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공성을 물리쳤다.


그러는 중에 151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기스문트 1세와 결혼으로 동맹관계과 되었다. 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에 대한 독일기사단의 활동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1525년에는 더 극적이 사건이 터졌다. 독일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기사단장)인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가 기사단장을 사임하고 리투아니아 교회로 개종하였다. 알베르트는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서 프러시아 공작이 되었다. 곧이어 독일기사단은 리보니아를 잃었고 이어 독일에 있는 개신교 지역에서 독일기사단이 지배하던 지역들을 내주어야 했다. 독일기사단은 1809년까지 독일에서 로마 가톨릭의 영향 아래에 있는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 때에 나폴레옹이 독일기사단의 해체를 명령하였으며 이로서 독일 기사단은 세속적인 지분들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아마 그때로부터 독일기사단은 본래의 사명인 병원 운영에 치중하게 되었으며 또한 의식을 거행하는 집단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8년에는 히틀러에 의해 불법집단으로 낙인이 찍혀서 어떠한 공식 행사도 할수 없는 이름만의 단체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지하에서 명목을 유지하던 기사단이 재건될수 있었다. 오늘날 독일기사단은 중부 유럽에서 자선활동을 주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독일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만토를 입는다. 십자가가 그려진 파테(pattée)는 간혹 독일 기사단의 문장으로 사용되었고 후에는 프러시아 왕국과 독일의 군사 훈장의 디자인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철십자 훈장(Eisemes Kreuz: EK)이나 공로훈장(Pour le Mérite)이다. 독일 기사단의 모토는 '돕자, 막자, 고치자'(Helfen, Wehren, Heilen)이다.


크로스 파테를 바탕으로 삼은 철십자 훈장


독일기사단은 나폴레옹에 의해 폐쇄되었지만 로마 가톨릭 종단으로서는 나폴레옹의 손이 미치지 못한 오스트리아에서 계속 존속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기사단의 마지작 그랜드 마스터는 합스부르크의 오이겐 대공이었다. 오이겐 대공은 1923년에 그랜드 마스터 자리에서 사임하였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1804년부터 1923년까지 로마 가톨릭의 독일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를 맡았었다.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인 오이겐 대공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칼 페르디난트 대공이었으며 칼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버지는 샤를르 대공이었다. 샤를르 대공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레오폴드 2세의 셋째 아들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로서 요제프 2세 황제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독일기사단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였던 오이겐 대공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4대 손이다. 오이겐 대공 이후의 그랜드 마스터는 모두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 맡았다. 그러다가 1929년에 독일 기사단의 한 지부로서 오스트리아 기사단은 순전히  로마 가톨릭 종단 중의 하나로 재탄생했다. 명칭은 도이처 오르덴(Deutscher Orden: German Order: 독일 종단)이라고 다시 명명되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합병되자 독일 종단은 대독일제국(Grossdeutsches Reich)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런 중에도 나치는 중세의 독일기사단을 나치의 이상과 부합한다면서 선전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 종단으로서의 독일기사단은 전쟁 중에도 이탈리아에서 생존하였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전쟁이 끝난 1945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독일기사단의 활동이 회복되었다. 독일 기사단은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자선 단체로서 여러 의료기관들을 설립했으며 이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사업과 성지 순례 사업을 후원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2000년에 이르러 독일 기사단의 독일 지부가 파산으로 해산되었다. 어떤 문제 때문에 파산이 되고 집행부가 모두 사퇴하게 되었는지를 2002년과 2003년에 바바리아 의회가 조사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오이겐 공자.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였다.


독일기사단의 가톨릭 지부는 현재 약 1천명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100여명은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며 2백여명은 수녀들이고 나머지 700여명은 조역자(Associates)들이다. 가톨릭 사제들은 여섯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체코공화국, 독일, 이탈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이다. 사제들은 주로 신앙적인 지도를 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연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일은 수녀들이 수행한다. 사제들과 수녀들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조역자들이다. 이들은 오스트리아, 벨기에, 체코공화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조역을 맡고 있다. 사제들은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앙적인 지도를 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그러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독일 기사단은 12세기에 처음 설립될 당시의 뿌리로 돌아갔다고 볼수 있다.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병자들을 돌보고 사람들의 신앙을 붙들어 주는 뿌리를 말한다. 현재 독일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는 비엔나의 독일기사단교회(Deutschordenskirche)에 자리잡고 있다. 비엔나의 독일 기사단 본부에는 독일기사단 보물 박물관도 있다. 1996년에 봉헌되었다. 과거에는 독일의 바드 메르겐트하임에 있던 보물들을 이전해 온 것이다.


비엔나의 독일 기사단 보물박물관. 징거슈트라세 7번지

                          

독일기사단은 특별한 인사들에게 명예 기사의 작위를 수여해 왔다. 사제나 수녀가 아니더라도 독일 기사단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사들이다. 지금까지 10명 정도가 명예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 콘라드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 1876-1967). 정치인, 서독 수상(1949-1963)

- 뷔르템버그의 칼 공작(Carl, Duke of Württemberg: 1936-). 현재의 뷔르템버그 가문의 수장

- 리히텐슈타인 공자 프란츠 요제프 2세(Franz Joseph II, Prince of Liechtenstein: 1906-1989).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군주

- 합스부르크의 칼(Karl von Habsburg: 196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의 아들

- 합스부르크의 오토(Otto von Habsburg: 1912-201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 요아힘 마이스너(Joachim Meisner: 1933-2017). 독일 가톨릭교회 추기경. 쾰른 대주교

- 뷔르템버그 공작 필립 알브레헤트(Philipp Abrecht, Duke of Württemberg: 1893-1975). 뷔르템버그 가문

- 크리스토프 쇤보른(Christoph Schönborn: 1945-).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 신학자. 가톨릭교회 추기경. 비엔나 대주교. 오스트리아 가톨릭 주교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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