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명테너

남성 테너의 진면목 Franco Bonisolli (프랑코 보니솔리)

정준극 2008. 3. 1. 23:00
 

남성 테너의 진면목 Franco Bonisolli (프랑코 보니솔리)

 


리릭 테너로 시작하였으나 영웅적 테너로 발전하여 거의 30년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이름을 떨친 이탈리아의 프랑코 보니솔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별개로 무대에서 엉뚱한 사건을 자주 일으켜 문제가 있었다. 우선 그는 존 웨인이나 실베스타 스탤론처럼 사나이다운 면이 있었지만 고집이 세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였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를 맡아 드레스 리허설을 했을 때 거장 카라얀이 ‘그대는 어찌하여 악보에도 없는 고음을 마음대로 내는가?’라고 핀잔을 주자 차고 있던 칼을 카라얀에게 휙 집어 내던지고는 그대로 무대 밖으로 나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대표적인 일이었다. TV 생중계가 계획되었던 이날의 드레스 리허설은 취소될 수밖에 없었고 그날 저녁의 공연은 도밍고가 대신 맡아했다. 이처럼 그는 고집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고음을 자랑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악보에도 없는 고음을 끌며 기염을 토했다. 사실 그 멋있고 힘찬 고음 때문에 나중에 카라얀은 보니솔리를 특별히 초청하여 리골레토 음반을 취입하였다. 보니솔리는 테너로서 하이C 음은 언제라도 낼수 있어야 한다면서 자신이 만만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역시 만리코를 맡아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만리코의 아리아인 Di quella pira를 부를때에는 마지막 파트에서 악보에도 없는 하이C음을 올려 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깜빡 잊어버리고 하이 C음을 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관중들은 ‘이제야 악보대로 제대로 하는 구나!’라면서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보니솔리는 자기의 체면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고 지휘자에게 오케스트라 반주를 부탁하지도 않은채 이번에는 마지막 파트에 하이C음을 넣어 다시 Di quella pira를 불렀다. 하지만 관중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얼마후 비엔나에서 리골레토를 공연할 때 보니솔리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들뜬 기분을 참지 못하고 마지막 파트가 아닌 중간에서도 하이C음을 냈다. 관중들은 악보에도 없는 하이C음을 낸데 대하여 오히려 야유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니솔리는 사랑받는 테너였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아리아든지 기가 막히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부를수 있었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가사를 맵시 있게 표현할수도 있었고 연기도 뛰어나게 할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마음만 먹으면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멋대로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 핀잔을 받았지만 아무튼 컨디션만 좋으면 노래와 연기 모두 최고였다.


프랑코 보니솔리는 1938년 이탈리아의 로베레토(Rovereto)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배우가 되고 싶어하여 배우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뛰어난 성악적 재능을 묻어 버리기가 어려워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배우수업을 중단했다. 1961년 스폴레토 국제성악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의 인생 경력에 새로운 디딤돌을 마련해 준것이었다. 첫 오페라 무대 출연은 이듬해인 1962년 푸치니의 La Rondini(제비)에서 주역인 루제로(Ruggero)를 맡은 것이었다. 다음해에는 프로코피에프의 ‘세개의 오렌지 사랑’에서 왕자역할을 맡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3년후인 1965년 그는 미국에 진출하여 달라스에서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를 맡아 환영을 받았다. 이후 알프레도는 그가 가장 선호하는 역할이 되었다. 특히 1967년 안나 모포(비올레타)와 함께 라 트라비아타의 영화를 촬영한 것은 오늘날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그의 활동범위는 대단히 넓어졌다. 그는 특히 마농(마스네)에서의 데 그류, 파우스트(구노)의 타이틀 롤로서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나폴리에서  니노 로타(Nino Rota)의 ‘마술 등잔과 알라딘’(Aladino e la lampada magica)의 초연에 알라딘으로 출연하여 박수를 받았으며 팔레르모에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루이젤라(Luisella)를 기본으로한 프랑코 마니노(Franco Mannino)의 오페라에 출연하였고 스폴레토에서는 메노티의 ‘블리커가의 성자’(The Saint of Bleeker Street)에서 미셸을 맡아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1969년에는 드디어 라 스칼라에 데뷔하였다. 로시니의 비극적 오페라인 ‘코린토의 살육’(L'assedio Di Corinto)에서 클로오메네(Cleomene)를 맡은 것이었다. 메트로 데뷔는 1971년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알마비바 백작이었다. 이 역할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이어서 메트로는 그를 계속 붙잡아 두었다. 메트로에서 그는 네모리노(사랑의 묘약), 알프레도(라 트라이바타), 파우스트, 만투아 공작(리골레토)등을 맡아 미국의 오페라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시 알프레도와 만리코는 그의 대명사가 되었다. 모두 리릭 테너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때쯤하여 그는 점차 드라마틱 테너로 변해갔다.


이후 그는 벤베누토 첼리니(베를리오즈)에서 첼리니, 귀욤 텔(로시니)에서 아르놀드, ‘운명의 힘’(베르디)에서 돈 알바로, ‘황금서부의 아가씨’(푸치니)에서 딕 존슨(Dick Johnson)과 같은 드라마틱 역할을 주로 맡았다. 한편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라 보엠(푸치니)의 로돌포와 루이자 밀러(베르디)의 로돌포를 맡은 것은 그가  리릭과 드라마틱의 모든 역할을 아무런 문제없이 맡아 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1981년 그는 런던 로열 오페라에서 ‘아프리카 여인’(베를리오즈)에서 바스코 다 가마를 맡아 놀라운 찬사를 받았으며 얼마후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원래 오텔로를 맡기로 되어 있는 카를로 코쑤타(Carlo Cossuta)가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대타로서 오텔로를 맡았지만 그의 뛰어난 드라마틱 재능으로 카를로 코쑤타를 능가하는 갈채를 받았다. 이로서 그는 코벤트 가든의 스타로서 시몬 보카네그라(베르디)의 아도르노(Adorno), 투란도트(푸치니)의 칼라프 등을 맡아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칼라프는 그의 후반 경력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는 풍부한 성량과 힘에 넘치는 음성, 그리고 누구도 따라 올수 없을만큼 길게 끄는 고음으로 인기를 차지하였다. 그러한 그는 공연이 끝나면 언제나 자기보다 더 갈채를 받는 소프라노 주인공에 대하여 못마땅하다는 생각에서 ‘당신이 부를수 있는 아리아는 내가 더 크게, 더 높게 부를수 있다.’면서 은근히 고개를 쳐들었다. 보니솔리의 경력은 1989년 베로나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 해에 그는 엔조(라 조콘다), 칼라프(투란도트), 라다메스(아이다)를 맡아 하고 무대를 떠났다. 그는 그로부터 14년후인 2003년 66세를 일기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1986년 로열 오페라와 함께 서울을 방문하여 칼라프와 돈 호세를 공연한 것은 특기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