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 이야기/야고보 더 알기

야고보의 순교

정준극 2008. 8. 22. 10:42

[야고보의 순교]

 

사도행전 12장 1-2절에는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야고보(James)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한 제자이다. 그러나 어떤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는 헤롯이 아니라 대제사장 아나누스에 의해 돌을 맞는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해보자. 그리고 또한 여기서 말하는 헤롯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동방박사들을 만나고 유태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베들레헴과 인근 마을의 두살 이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인 인물이 아니다. 그 헤롯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를 말하는 것으로 세례 요한을 죽인 장본인이다.

 

요세푸스(Josephus)라는 역사학자는 Jewish Antiquities라는 책자에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로마의 유태지방 태수인 포르키우스 페스투스(Porcius Fertus)가 죽은 직후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적었다. 그는 야고보가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가 62였다고 기술했다. 당시 대제사장인 아나누스(Ananus)는 예루살렘의 최고 평의회 겸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Sanhedrin)을 부추켜 야고보가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참소하고 다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선동하여 야고보를 돌로 쳐서 죽이도록 했다. 아나누스가 이처럼 대제사장이라는 권세를 등에 업고 로마제국의 유태지방 태수나 유태왕 아그리파의 적합한 승인을 얻지 않고 야고보를 처형하자 아그리파는 나중에 그를 해임하였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메시아)라고 참칭하였다는 죄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야고보를 시기하는 유태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략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야보고가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유태인들의 저항을 받아 참소를 받았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야고보를 찾아와 그를 설득코자 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야고보가 의지를 꺾지 않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Pharisees)은 야고보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머지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기 시작하자 야고보는 무릎을 꿇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과 같다. 야고보가 이 말씀을 했다고 기록한 후세 사람들은 아마 야고보를 예수님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야고보에게 돈을 던지고 있을 때 제사장 중의 한사람인 레합(Rechab)의 아들이 소리 높여 외치기를 ‘그만두어라, 그대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중에 있던 어떤 마전장이가 자기가 염색할 때 사용하는 긴 막대로 야고보의 머리를 쳐서 급기야 야고보를 쓰러지게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순교를 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그 자리에서 파묻었으며 기둥을 세워 그가 죽은 장소임을 표시하였는데 그 기둥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유태인이건 헬라(그리스)인이건 모두 야고보가 그리스도 예수를 직접 보고 증거한 참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한다.


요세푸스가 쓴 야고보의 죽음은 신빙성이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도 60세 이후의 야고보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야고보가 어디에 묻혔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고보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자면 예수님과 마리아처럼 하늘로 올라갔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알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크게 궁금해 하는 사항이다. 한편, 사학자인 로버트 아이젠만(Robert Eisenman)은 야고보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와 그가 불법으로 죽임을 당한 일은 주후 66-73년 제1차 유태-로마 전쟁을 야기하는 것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야고보서가 주는 영향]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썼다. 야고보서는 원래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 예를 들어 저명한 레이몬드 브라운(Reymond Brown)과 같은 학자는 야고보서를 다른 사람이 야고보의 아이디어를 기본으로 다시 썼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야고보서는 그 문장이 너무나 유연하고 표현이 정확하기 때문에 히브리인인 야고보가 직접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를 추종하는 제자로서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크 티모시 존슨(Luke Timoth Johnson)과 같은 학자는 야고보가 그리스어에도 능숙했기 때문에 그가 쓴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현대 사학자들은 야고보가 비록 주님의 새로운 복음과 율법을 전하는 기독교인이었지만 그의 언행은 전통 유태교에 기본을 두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믿음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부담스럽게 여기며 기존의 도덕률을 폐기하려는 성향이었다. 하지만 야고보는 바울의 입장에 대한 반대 입장을 지지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런 야고보의 견해를 유다이징(Judaizing)이라고 불렀다. 유다이징은 유태교의 율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듯 부르는 용어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바울로부터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내용은 2세기경에 나온 클레멘트 문학(Clementine literature)에 수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바울과 야고보의 중간에서 이들을 잇는 교량역할을 하였다.


한편, 어떤 신학자들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어떤 경외서에 의하면 유태인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야고보의 편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히브리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심을 주목하였다. 역시 경외서인 ‘도마복음서’(The Gospel of Thomas)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자기들을 떠나실 것을 알고 ‘누가 우리들 중 인도자가 되겠나이까?’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야고보에게 따라야 할 것이다. 그로 인하여 하늘과 땅이 존재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어떤 경외서에는 ‘야고보가 주교이며 사도’라고 언급하여 모든 신자들의 으뜸이 됨을 말하였고 또 다른 경외서에는 야고보를 수도자 나자라이트(Nazarite)라고 표현하였다. 나자라이트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야고보 계시록 1서’(First Apocalypse of James)라는 경외서가 있다. 야고보가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아무튼 이 책에는 야고보가 열두 제자들과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또한 야고보가 주후 70년경 로마의 예루살렘 공성(攻城) 전에 예루살렘을 빠져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빠져 나오면서 야고보의 유해를 가지고 나왔다는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로마의 예루살렘 공성 직전에 순교했기 때문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육신이 부활한다고 믿어 시신을 고이 간직하는 습성이 있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곧 다시 오리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안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으로 굳게 믿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제자중의 하나로서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를 이끈 사람이며 신학적으로는 유태교의 율법을 어느 정도 존중하면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한 인물이었다고 할수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바울과 함께 초대기독교의 3대 기둥이었다.

 

 야고보(동방정교회 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