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수원

용주사(龍珠寺)

정준극 2009. 3. 19. 14:28

용주사(龍珠寺) 다시 보기


사람들은 용주사를 언급할 때에 경주 불국사, 여주 신륵사처럼 수원 용주사라고 말하지만 용주사는 수원이 아니라 화성시에 속해 있다. 화성시 송산동(松山洞)에 있다. 전에는 태안읍 송산리가 행정구역이었다. 송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용주사 뒷산에는 아직도 소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렇듯 용주사는 화성시에 속하여 있지만 용주사 입구의 큰 비석에는 수원용주사사적비라고 적혀 있다. 화성시 사람들로서는 조금 섭섭할 것이다. 하지만 용주사는 수원, 즉 조선시대의 화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수원용주사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용주사를 가려면 수원역에서 오산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되는 줄 알고 있다면 곤란하다. 수원에서 한참 아래에 있는 병점(餠店), 그 병점에서도 수원대학교 방향으로 한참 더 들어가야 나온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병점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얼마쯤은 가야 한다. 어릴적 나의 기억으로는 용주사가 산속에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실로 오래 만에 찾아가 보니 바로 길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용주사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절의 입구가 바로이다. 어쨌든 다른 절들처럼 산속을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아주 옛날(옛날이라고 해봐야 1950년대 중반이지만), 내가 수원에서 신풍초등학교에 잠시 다닐때 그 먼 용주사로 소풍을 간 일이 있다. 환도이후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생각된다. 담임선생님은 소풍 1주일 전부터 용주사 원행을 수학여행에 비추어 신나게 설명해 주셨다. 당시 모든 학교는 1년에 두번, 봄과 가을에 소풍을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통편이 용이하지 못하여 멀리는 가지 못하고 가까운데를 택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니 갔던 곳을 또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소풍철이면 행선지가 어딘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마련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은 가까운 방화수류정이나 서장대로 소풍을 가는 것이 통상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고학년인 5학년은 좀 더 멀리 나가야 한다는 명분이 있어서 행선지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멀리 가보았자 원천저수지 정도였다. 그러나 원행을 고려한다고 해도 워낙 가난한 아이들이 많아 차비를 대기도 어려우므로  원행은 불감당이었다. 그러던 차에 학교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번 5학년은 용주사로 소풍을 가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주사가 아니라 융건릉(隆健陵)이었다. 없는 살림에 오산비행장의 미군부대에 얘기하여 길다란 짐차 두어대를 주선하여 타고 갔으니 과연 무박1일의 수학여행치고는 고단한 출장이었다. 그나저나 어떤 아이는 용주사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절에 가서 수학공부만 하는줄 알고 수학책을 들고 오는 바람에 선생님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 일도 있다. 이 학생은 자기 혼자만 수학공부하면 될 터인데 다른 아이들 몇 명에게까지 ‘용주사에 가서 수학공부 한다’고 바람을 넣는 바람에 그 몇 명의 다른 아이들도 수학책과 수학공책을 가지고 왔었으니 모두 못먹고 못살던 시절의 얘기다.

 

 

 대웅보전과 천불전


용주사로 소풍을 가기는 갔지만 용주사는 입구만 보았을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소풍의 목적지가 용주사에서 더 들어가는 융건릉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용주사를 잠시 관람하는 스케줄이 마련되어 있었던 모양이지만 용주사의 스님들이 아이들이 몰려 들어오면 시끄러우므로 입장사절을 하는 바람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다만, 함께 오신 교장선생님과 몇분 선생님만이 용주사 스님의 안내로 절구경을 했다. 교장선생님은 5학년 학생들이 용주사에 간다고 하니까 이번 기회에 말로만 듣던 용주사를 봐야겠다고 작정하시고 소풍에 동참하신것 같다. 물론 교장선생님으로서의 역할도 있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겨우 융건릉에 도착한 학생들은 넓은 풀밭과 울창한 소나무 숲을 보자 모두들 어서 점심 먹고 뛰어 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단체활동에는 격식과 절차가 있는 법이었다. 모든 학생들을 집합시켜 앉도록 한후 교장선생님이 나오셔서 사도세자 및 정조대왕, 그리고 융건릉에 대하여 일장의 교양강좌를 개설하시었다.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서 옆의 친구들과 소리 내지 않고 장난하기에 바빴다. 생각컨대 교장선생님은 아마도 전날 밤을 새워가며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줄 교양역사강좌를 준비하셨던 모양인데 청중들의 태도가 도무지 마땅치 못하여 별무성과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용주사는 무려 50여년전에 처음 갔었고 그 후로는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하다가 며칠전 뜻한바 있어서 이윽고 찾아갔었다.


여기서 잠시 융건릉에 대한 용어의 정리가 필요하다. 정조대왕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매봉산에서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릉(顯陵)이라고 불렀다. 훗날 정조대왕의 어머니로서 사도세자(장조)의 부인인 현경왕후(유명한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와 함께 현릉에 합장하고 융릉(隆陵)이라고 불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대왕은 죽어서도 아버지의 곁에 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융릉의 바로 아래에 묘를 썼다. 건릉(健陵)이다. 나중에 정조대왕의 부인인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건릉에 합장되었다. 사도세자 장조의 부부와 정조대왕의 부부의 묘소가 함께 있으므로 융건릉(隆健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융건릉의 주소지는 화성시 안녕동이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매일 처럼 '안녕?'이라고 문안을 드려서 마을 이름을 안녕이라고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융건릉 입장료는 어른이 1,000원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현판과 단청 장식


얘기의 주제는 융건릉이 아니라 용주사이므로 이제 다시 용주사로 돌아가 보자.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찰이 있었다. 신라의 스님들은 어찌나 불심이 깊었던지 다리가 아플 터인데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이곳저곳을 수없이 돌아다니며 어지간하면 절들을 세웠다. 그중의 하나가 지금의 용주사 자리에 있던 갈양사(葛陽寺)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라고찰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터만 남아 있게 되었다. 정조대왕(1752-1800)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도성에서 상당히 먼 이곳 화산에 쓰고 신라고찰이 있던 장소에 보경이란 분에게 새로운 절을 창건하여 효찰대본산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내 1790년 능사(陵寺)가 창건되었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용주사이다. 효행을 중시하는 사찰이므로 다른 절들과는 달리 경내에 장대한 부모은중경탑이 서 있다. 부모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비석이다. 경내의 효행박물관은 근자에 문을 연 것이다. 경내 전각의 벽면에는 부모의 은혜를 설명하는 그림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용주사는 일주문이 없다. 사천왕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용주사의 사천왕들은 모습이 늠름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있기에 기왕에 소개코자 한다. 백발을 휘날리며 기타와 같은 악기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동쪽 담당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역할이다. 장검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쪽 담당으로 불자들의 지혜와 복력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강시켜주는 역할이다. 손에 불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북쪽 담당으로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며 불법을 귀중하게 듣는 역할이다. 용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서쪽 담당으로 글자그대로 부릅뜬 눈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나쁜 말을 굴복시키는 역할이다. 용주사에 와서 사천왕들의 모습만 보고 가도 왔던 보람이 있다. 또 한가지 용주사의 특징은 절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는 것이다. 임금님이 자주 행차하였던 곳이라서 홍살문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저런 연고로 용주사는 18세기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입장료는 어른이 1,500원이다.

 

 사천왕 중의 하나인 다문천왕


용주사에는 볼 것들이 많다. 그중의 하나가 삼문각(三門閣)이다. 문이 세 개가 있으므로 삼문각이라고 하는것 같다. 그런데 삼문각은 용문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대문이어서 중요하며 또한 기둥마다 용주사불(龍珠寺佛)의 네글자를 따서 글귀를 적은 현판이 가로로 걸려 있기에 의미있는 대문이다. 현판마다 적혀 있는 글은 한문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거 참 잘 썼네. 뜻도 의미심장하고..'라고 말하며 감동할수 있다. 용주사라는 명칭은 어디서 연유했는가?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정조대왕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여의주를 입에 문 용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더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건축 책임자인 보경스님이 그런 꿈을 꾸었다고 한다. 누가 꾸었던지 아무튼 그래서 용주사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얘기가 삼문각의 현판에 적혀 있는 것이다. 즉, 반화운(龍蟠花雲) 득조화(珠得造化) 문법선(寺門法禪) 하제중(佛下濟衆)이라는 글귀이다. 이를 번역하여 보면, ‘용이 꽃구름을 휘감고서 여의주를 물고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서 참선법으로 부처님 아래의 중생을 제도하네’이다. 용주사라는 명칭에는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경내로 들어가 각 전각들을 살펴봄이 가한줄로 생각된다.

 

심문각. 용주사불에 대한 글귀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은 단청이 아름답거니와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들이 굳건하게 서 있어서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는 비록 용주사 주변에서 도로건설이 한창이어서 정신이 없는 중에도 속세를 떠난 느낌을 전해준다. 다만, 인근에 수원비행장이 있어서 우리의 용감한 전투기들이 비행연습을 하거나 초계비행을 할 때 상당한 소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나라의 주적(主敵)인 북한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소음이니 괘념치 말아야 할 것이다. 용주사의 삼세불화(三世佛畵)는 유명하다. 정조대왕이 단원 김홍도에게 의뢰하여 만든 불화라고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원이 그린 작품이라고 간주한다면 당대의 풍속화가인 김홍도는 전통적인 평면 제작방법이 아닌 입체적 방법으로 불화를 그렸다. 그래서 부처님 얼굴에 광대뼈를 묘사하고 팔과 어깨의 근육을 표현했다. 대단히 아름다운 불화로서 반드시 보아야 할 작품이다. 효행박물관에 크게 전시되어 있다. 대웅보전 옆에는 천불전(千佛殿)이 있다. 석가모니불의 뒤에 작은 부처 1천개를 모셔 놓았다. 다른 절에도 간혹 천불전이 있지만 용주사의 천불전은 어찌된 셈인지 정감이 간다. 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의 삼세불화

 

호성전(護聖殿) 앞, 대웅보전과 지장전 사이에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이 있다. 효행기념관 편에서도 잠시 설명했지만, 이 탑에는 정조대왕이 강조한 부모님 은혜 10가지가 적혀 있다.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을 썼다. 정조대왕은 부모님의 은혜를 경전의 형태로 남겨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했다. 탑의 하단에는 사방을 둘러서 보모님의 은혜를 한가지 한가지씩 그 내용을 그려 놓았다. 이같은 내용은 지장전의 벽면에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아무튼 용주사는 부몽님 은혜를 잊지 말자는 내용으로 뭉쳐 있다. 절 입구에는 수원용주사사적비라는 커다란 비석이 거북이 등에 얹어 있다. 용주사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석에는 사적을 事蹟이라고 적었는데 혹시 史蹟이라고 써야 하지 않나 라는 궁금증을 갖게 했다. 용주사에는 국보 120호인 범종이 있다.

 

 수원용주사사적비. 화성사람들은 화성용주사라고 주장할텐데...


용주사에 대하여는 소개햐야할 내용이 너무 많아 걱정이지만 스페이스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대충 생략키로 하고 마지막으로 효행박물관에 대하여 일고코자 한다. 정조대왕과 용주사에 대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보인 범종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유명한 용주사 탱화도 전시되어 있다. 그밖에 금동향로들, 목제감실들, 목판 경전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유물들이 훌륭하게 전시되어 있다. 필견의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을 본것만으로도 용주사 입장료 1천5백원은 가치가 있다. 효행박물관 입장료는 별도로 없다. 박물관 내에는 기념품 상점도 있어서 한두가지의 기념품 정도는 사게 된다. 별도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잘만하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수 있다. 결론적으로 용주사를 탐방하기를 아주 잘했다. 여름철 녹음이 우거질 때에 다시한번 오고 싶다. 서울에서도 가깝다. 이런 훌륭한 절이 우리 주위에 있는데 무심하게 있다면 역사와 문화를 존경하는 한국인으로서 민망스러운 입장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저러나 용주사 부근에 도로공사와 건축공사가 한창이었다. 아파트라도 들어설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제발 그것만은 막아야 할 것이다. 역사를 아는 현명한 경기도지사, 화성시장일 것 같으면 절대로 용주사와 융건릉 일대에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뇌물을 좋아하는 공무원들이 업자로부터 돈을 받아 먹고 아파트 신축 허가를 내줄지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돈에 대해서만은 청렴하다는 전직 대통령이 뇌물을 한 없이 받아 먹었으리라고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효행박물관 전경 

 지장전의 벽화의 하나. 부모님 은혜를 표현한 그림들. 젖을 먹여 주신 은혜.

대웅보전의 벽화의 하나.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중 탄생 장면. 태어나자마자 7보를 걸었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소리 질르렸다고 한다. 마야 부인과 시녀들이 모두 중국 복식과 중국식 헤어스타일이다.  

 대웅보전의 단청. 기둥까지 아름답게 장식. 이런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통일신라시대 갈양사의 유물 7층석탑. 안내판이라도 있었으면 무슨 석탑인지 자세히 알겠는데...

 범종각. 신축한것 같다. 대웅보전 옆에도 조금 작은 범종각이 있다. 범종이 두개나 있는 곳은 드믄일이다.

 

 대웅보전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 운치.

전강(田岡)대사 사리탑. 최근 건조. 그 뒤의 건물은 수행선원. 외인출입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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