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창덕궁과 비원

검이불루

정준극 2009. 6. 4. 06:26

[다음은 조선일보 2009. 6. 4 A30의 '유흥준의 국보순례' 컬럼을 전재한 것이다. 청덕궁 낙선재에 대한 이야기로서 우리 국민들에게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철학을 재인식토록 해준 글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옮긴다. 누구처럼 국민의 혈세로 대통령의 사저라는 미명아래 아방궁이나 지으려는 생각은 하지말고!]

 

검이불루(儉而不陋)

 

우리 궁궐 건축에 나나탄 특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검이불루'이다. '검이불루'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는 않다는 뜻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처음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5년(BC 4년)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원 보이지 않았다'(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했다. 백제가 아마도 지금 풍납토성 자리일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 궁궐의 자태를 말한 이 여덟 글자의 평문(評文)은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美感)을 대표할 만한 명구(名句)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불국사의 석가탑은 '검이불루'하고 다보탑은 '화이불치'하다는 평에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부식이 평한 이 여덟 글자의 명구가 고전의 어디에서 따온 것인지, 그의 독창적인 평문인지, 나로서느 아직 확언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정신만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명성황후와 살면서 그 곁에 자신의 서재로 지은 집옥재(集玉齎)는 당시로서는 현대풍을 가미한 화려한 건물이지만 결코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 건축이 추구한 미학은 <집옥재 상량문> 첫머리에 명확히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예의 여덟 글자를 약간 바꾸어 '검소하지만 누추한 데 이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았다'(儉不至陋 華不至奢)라고 했다. 

 

언어의 표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일 것이다. 조선왕조 헌종이 21살(1847)때 후궁 경빈(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새 생활공간으로 지금의 낙선재(樂善齋)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쓴 <낙선재 상량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아니한 것은 과도한 규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채색한 서까래를 놓지 않은 것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라네'. 그래서 창덕궁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이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낙선재가 누추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과연 '검이불루'의 미학이 오늘날 현대건축에서는 얼마만큼 계승되고 있는지 다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명지대 교수-미술사

 

 

낙선재(Credit: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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