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 더 알기/헤롯 안티파스는 누구?

헤롯 안티파스의 최후

정준극 2009. 8. 23. 21:53

헤롯 안티파스의 최후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요한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지도 3년이 지났다. 마침내 안티파스와 나바테아와의 전쟁이 일어났다. 안티파스가 나바테아의 공주인 파사엘리스를 내쫒고 헤로디아스와 결혼한 해묵은 사건에 국경분쟁까지 겹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안티파스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더구나 이복동생인 필립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백성들이 대거 도주하여 나바테아의 편을 드는 바람에 안티파스의 군대는 지리멸멸하게 되었다. 헤롯대왕의 또 다른 아들인 필립 역시 악행을 밥 먹듯 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었다. 전쟁이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안티파스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안티파스와 티베리우스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안티파스는 몇 년전에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갈릴리호수 동편에 건설한 도시에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여 충성을 보인바 있다. 티베리우스는 시리아의 로마총독인 루시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에게 나바테아로 진격하여 아레타스 왕을 생포하던지 죽이던지 하라고 명령하였다. 비텔리우스는 로마군 2개 군단을 동원하였다. 그는 휘하의 사령관들로 하여금 나바테아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갈릴리 호수를 우회하여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군대를 진격토록 명령하고 난후 비텔리우스는 안티파스가 예루살렘에서 개최하는 환영파티에 참석하였다. 비텔리우스는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티베리우스 황제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통보받았다. 주후 37년 3월 16일이었다. 비텔리우스는 서거한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진격하고 있는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더구나 비텔리우스는 안티파스가 티베리우스의 빽만 믿고 잘난체 하는 것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헤롯 아그리파의 치하에서 만든 주화. 아그리파의 모습이 들어 있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듯이 헤롯 안티파스의 권세로 날개를 접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새로운 로마황제 칼리굴라(Caligula)와 안티파스의 조카로서 헤로디아스의 남동생인 아그리파(Agrippa)가 있었다. 헤로디아스의 남동생, 즉 안티파스에게는 처남이 되는 아그리파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방탕한 인간이었다. 아그리파는 로마에 있으면서 노름에 정신이 팔려 가산을 탕진하고 엄청난 빚까지 지게 되자 누이인 헤로디아스에게 돈 좀 빌려 달라고 매달렸다. 헤로디아스는 남동생의 사정이 딱한 것을 보고 남편인 안티파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한마디로 ‘곤란하다’고 거절하며 안면을 몰수하였다. 아그리파는 ‘어디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보자’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일이 잘 되느라고 그랬는지 아그리파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인 칼리굴라를 대신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사연인즉, 칼리굴라가 ‘그 놈의 티베리우스 황제인지 무언지 빨리 뒈져라, 그래야 카리굴라가 황제가 된다’고 무심코 말한 것을 티베리우스의 측근이 염탐하였는데 눈치 빠른 아그리파가 자기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면서 대신 옥에 갇혔던 것이다. 이윽고 티베리우스가 죽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주후 37년이었다. 그러니 아그리파는 어떻게 되었는가? 당장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칼리굴라는 전에 필립이 다스리던 땅까지 아그리파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했다.

 

아그리파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천사의 인도함으로 옥에서 자유롭게 나오는 장면

 

 

남동생 아그리파가 왕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헤로디아스는 속이 상했다. 누구는 그렇게 충성했는데도 아직까지 왕이라는 타이틀은 커녕 총독에도 못미치는 테트라크(성주)라는 타이틀을 쓰고 있는데 누구는 황제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당장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니 속이 상했던 것이다. 헤로디아스는 남편 안티파스를 설득하여 칼리굴라 황제를 찾아가서 자기도 왕으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때에 영악한 아그리파는 칼리굴라 황제에게 안티파스의 비행 및 반역적 행동을 일일이 기록하여 보냈다. 이에 의하면 안티파스는 티베리우스에게도 반역의 기미를 보였지만 이번에는 칼리굴라에게도 반역하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였다는 것이다. 아그리파는 그 증거로 안티파스가 7만명 군대를 무장시킬 무기를 쌓아놓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던 칼리굴라도 나중에는 무기를 쌓아놓고 있다는 증거를 들이대자 안티파스를 내치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충견인 아그리파의 주장이 아니던가?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파스의 모든 재산과 영토를 몰수하여 아그리파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 안티파스를 저 멀리 프랑스 남단의 골지방(현재의 리옹)으로 유배를 보냈다. 칼리굴라 황제는 헤로디아스에게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으니 그대로 가지도록 하였으나 헤로디아스는 무슨 의리가 그렇게 많은지 자기의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남편 안티파스를 따라 유배지로 함께 갔다. 두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설에 의하면 칼리굴라가 사람을 보내어 죽였다고 한다. 헤로디아스의 딸인 살로메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아무도 모른다. 시집이나 갔는지 아이들은 몇명이나 두었는지 모른다.

 

 카리굴라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