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터키/비엔나의 터키 모습

비엔나에 남아 있는 터키의 그림자

정준극 2009. 8. 24. 16:33

비엔나에 남아 있는 터키의 그림자

 

율리우스 마이늘 커피. 타브루슈를 쓴 소년이 로고이다.

 

비엔나는 고대로부터 국제도시였다. 동서 유럽을 연결하는 호박(Amber)루트의 중간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볼때 비엔나는 언제나 인종의 용광로와 같았다. 서유럽의 대부분 도시들은 비록 여러 민족이 혼합하여 살고 있다고 해도 유럽에서 보는 동양인들은 거의 볼수 없었지만 비엔나는 서유럽의 동쪽 끝 자락에 있기 때문인지 언제나 이른바 동양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더러는 정착해서 살았다. 비엔나에는 진짜 비엔나 토박이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비엔나 토박이들은 거의 모두 슬라브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유태인, 그리고 터키인의 후손들이다. 슬라브인은 주로 보헤미아인이나 폴란드인을 말한다. 헝가리인은 마쟈르족이기 때문에 다르다. 마쟈르인은 말하자면 동양인이다. 터키는 16세기와 17세기에 두 번에 걸쳐 비엔나를 공격하였다. 비엔나를 완전히 정령하지는 못했지만 구석구석에 많은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한편, 당시 오토만제국에 속하여 있던 나라들이 독립하여 가톨릭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가 대표적이었다. 헝가리는 오래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었지만 19세기 말에 오스트리아와 대타협(아우스글라이히)를 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다.

 

거리의 신문, 잡지 파는 사람들은 대개 터키 또는 아랍인이다. 슈테판스플라츠에서.

 

실제로 비엔나에는 터키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비단 가스트아르바이터(Gastarbeiter: 외국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기업인들도 많이 있다. 유학생으로 온 터키인들은 공부를 끝내고 눌러 붙어서 나중에 변호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은행가도 되어 비엔나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종전 이후 비엔나에 UN기구들이 들어선 이후 터키인들의 숫자는 더 많아졌다. 과일과 야채 또는 양념을 파는 나슈마르크트에 가면 중동 식품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중동의 어느 커다란 식품시장에 온듯한 인상을 받는다. 나슈마르크트에서는 터키말을 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시내 길거리의 도처에는 터키 음식인 케밥을 파는 임비쓰(Imbiss: 일종의 포장마차) 가게들이 있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니다. 칼스플라츠 전차역 주변이 대표적이다. 케밥 가게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비엔나에 중동 사람들, 특히 터키인이 많다는 증거다. 아무튼 이제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거리에서 케밥을 사먹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케밥은 오스트리아의 가장 유명한 간이음식 중의 하나가 되었다.

 

캐른트너슈트라쎄 어떤 건물 상단의 터키풍의 벽화

 

예전에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오토만 터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기피해왔다. 야만적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터키의 비엔나 공성이 실패로 돌아가자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터키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공연히 큰 소리만 치는 녀석들이 터키 사람들이 아니던가!'라며 오히려 터키풍을 이국적인 것으로 선호하게 되었다. 작곡가들은 터키풍의 음악을 작곡했고 작가들은 터키를 소재로 드라마와 소설을 썼으며 화가들은 터키 의상을 입은 모델들을 그렸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터키풍의 의상을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그린 12장의 초상화일 것이다. 현재 오스트리아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눈에 비친 터키인은 처음에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터키인들은 현명하고 위트가 있는 지성적인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말하자면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Entführung aus dem Serail)이다. 이 오페라는 1781년 모차르트가 1구의 밀르흐가쎄(Milchgasse) 11번지(페터스플라츠 1번지)에 살 때에 작곡한 것이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도자기인 그문덴(Gmunden) 도자기에서도 터키풍의 디자인을 찾아 볼수 있다. 오토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이 서로 대적하여 지내던 시기로부터 한참후인 1867년, 오토만제국의 최고 통치자인 아브둘라지즈(Abdulaziz)가 처음으로 비엔나를 방문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가 터키의 술탄을 환영하였다. 비엔나 사람들은 비엔나를 방문한 술탄과 그 일행에 대하여 너무나 흥미로워했다. 곧이어 터키풍의 의상이나 문화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1차대전 당시 오토만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1차 대전 기간중에는 터키의 아타튀르크(Atatürk)가 두 번이나 비엔나를 방문하였다. 그중 한번은 오토만제국의 황태자인 바히데딘(Vahiddedin)과 함께 방문하였다. 바히데딘 황태자는 나중에 술탄 메메트 6세(Mehmet VI)가 되었다. 메메트 6세는 오토만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자 오토만제국은 근대국가인 터키로 출범하였다. 근대 터키를 세운 사람은 아타튀르크였다. 아타튀르크는 비엔나의 카테지 사나토리움(Cottage Sanatorium)에 와서 치료를 받은 일이 있다. 현재 이 요양원은 학교이다.

 

   터키풍 디자인의 그문덴 도자기

 

오스트리아와 터키 두 나라가 좋던 싫던 교류했던 역사는 비엔나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그분야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터키의 비엔나’를 자세히 보고 싶다면 아마도 1주일은 걸린다. 1구에만 약 30곳의 터키 관련 장소가 있다. 주로 두 번에 걸친 터키의 비엔나 공성의 잔재이다. 어떤 것들은 흥미롭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재미있기도 하다. 하이덴슈쓰(Heidenschuss) 3번지의 건물에는 어떤 터키 기병이 칼을 들고 있는 작은 조각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터키의 제1차 비엔나 공성 때에 터키군에 다이 체르케즈(Day Cerkez)라는 병사가 있었다. 체르케즈는 터키가 비엔나 성벽의 한쪽을 허물고 비엔나 시내로 진입하려 할때 가장 앞장서서 용감하게 돌진한 병사였다. 마침 그때 뒤에서 어떤 오스트리아 병사가 그를 칼로 찔러 겨우 진격을 막을수 있었다. 다이 체르케즈는 포로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황제는 이용감한 터키 병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친히 만나 그의 용감함을 치하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싸우다가 부상당한 곳의 건물에 그를 기념하는 조각을 세우도록 했다. 그로부터 이 거리는 체르케즈거리(Cerkez meydani)라고 부르게 되었다. 터키에서 발행한 비엔나 지도에 그렇게 적혀 있다. 한편, 비엔나 사람들은 터키 병사의 조각상에 대하여 하이덴슈쓰의 전투에서 터키군을 물리친 기념이라면서 오히려 좋아했다. 터키 병사의 조각상이 있는 거리를 나중에 하이덴슈쓰라고 부르게 되었다. 콜마르크트의 입구에 있는 건물에도 터키군 기병상이 있다. 위풍도 당당하게 창을 들고 말을 타고 있다. 말은 방금이라도 뛰쳐 오를 것 같은 자세이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보통 지나가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콜마르크트의 건물 위에 있는 터키군 기병

4구 콜쉬츠키가쎄에 있는 콜쉬츠키 기념상. 커피를 서브하는 모습이다.


비엔나의 랜드마크인 슈테판성당에도 한두가지 터키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남탑의 꼭대기에 얹어 놓았던 황금 반달이다. 이 황금 반달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에 대한 전설은 아직 남아 있다. 술탄 술라이만(Suleyman)이 1529년 비엔나를 점령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비엔나 성밖에서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바라본 술라이만은 군사들에게 저 탑만은 포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비엔나를 점령한 후에 모스크의 미나렛(첨탑)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였다. 그러나 비엔나 점령은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날 술라이만은 황금으로 만든 별과 반달을 페르디난트에게 전하면서 이것을 슈테판성당의 첨탑 위에 얹어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첨탑 꼭대기에 있는 술라이만의 황금별과 반달을 보고 병사들이 용기백배하여 ‘어서 가서 슈테판성당을 점령하자’고 나설 것이라는 계산에서 였다. 페르디난트는 당장 황금별과 반달을 슈테판성당의 남탑 꼭대기에 올려놓도록 하고 병사들에게 ‘자 보아라. 저 별과 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이다. 그러하니 터키군을 곧 몰아내게 될 것이다’라면서 오히려 사기를 북돋우었다. 과연, 터키군은 추위와 전염병에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다. 황금별과 반달은 1680년에 복십자가(Double cross)와 쌍두의 독수리로 교체되었다. 그때의 황금별과 반달은 칼스플라츠에 있는 비엔나박물관(비엔나시립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슈테판성당 남탑의 꼭대기에 얹어 놓았던 별과 반달 모양의 황금 조각. 현재는 비엔나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새로 설치한 복십자가 쌍두의 독수리 복제품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꼭대기 쯤에 아래 사진에서 보는 대로 밖을 내다볼수 있는 곳에 움푹 들어간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가 한 군데 있다. 이른바 '슈타렘버그 자리'(Stahremberg-Bankerl)라고 부르는 곳이다. 1683년 터키군이 비엔나를 포위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을 때 비엔나 방어군 사령관인 에른스트 뤼디거 슈타렘버그 백작(Erunst Rudiger Graf von Starhemberg)이 불편하지만 이 자리에 걸터 앉아서 지상에서의 터키군 동향을 예의 관찰하고 필요한 작전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면 전령이 그 높은 계단을 죽어라고 뛰어 내려가서 인근 부대에게 명령을 전달하였고 다시 계단을 헐떡거리면서 올라와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고 한다. 별 것을 다 기념한다.

 

슈타렘버그의 자리

 

제2차 터키의 비엔나 공성 때에 비엔나의 방어자였던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버그 백작은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쇼텐키르헤의 납골당에 안치해 달라고 유언으로 말했다. 그리하여 그의 석관은 쇼텐키르헤(아일랜드교회)의 수도원 교회의 납골탄(슈티프트그루프트)에 있다. 슈타렘버그 백작의 석관의 건너편에는 야소미어고트라고 하는 하인리히 2세의 석관이 놓여 있다. 야소미어고트 공작은 바벤버그 왕조가 비엔나에 정착하는 것을 주도한 군주이다. 야소미어고트 공작은 비엔나의 가톨릭 신앙을 높이기 위해 독일에서 활동하던 아일랜드 수도승들을 초청하여 현재의 프라이융에 수도원과 교회를 짓고 선교활동을 하도록 지원했다. 그 수도원과 교회가 쇼텐슈티프트와 쇼텐키르헤이다. 쇼텐키르헤의 중랑(하우프트쉬프)의 한쪽 벽면에는 슈타렘버그 백작을 추모하는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일종의 비명이다. 전쟁의 여신과 같은 사람이 커다란 방패를 들고 있는데 방패에는 슈타렘버그 백작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방패는 비엔나를 방어했다는 의미가 있다. 방패의 옆에는 터키인으로 생각되는 사람이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다. 비명(碑銘)에 써 있는 문구 중에는 터키인을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이 있는데 그 말은 바로 이 터키인을 보면 이해할수 있는 말이다. 슈타렘버그의 머리 위에는 천사가 월계관을 씌어 주려고 하는 모습의 조각이 있다.

 

 

쇼텐키르헤 벽면의 슈타렘버그 비명. 오른쪽은 에른스트 뤼디거 그라프 폰 슈타렘버그.

 

슈테판성당의 대종(大鐘)은 1945년 전쟁 중에 건물이 포격을 받아 화재가 나는 바람에 파손되었다. 성당 당국은 부서진 종의 잔해와 여기에 군사박물관에 있던 터키의 대포알들을 모아서 녹여서 새로운 종을 만들었다. 터키의 기여가 이런데서 나타날 줄은 생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 종및 금속 주물협회가 이 사역을 맡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종이 '품메린'(Pummerin)이다. '마리아 종'(Marienglocke)이라고도 부른다. 1951년 9월 5일에 주조되었으며 이듬해인 1952년 4월 26일에 비엔나에 도착하여 비록 임시 장소이지만 그날로 슈테판성당에 설치되었다. 처음 종이 울린 것은 다음날 교황청 미사때였다. 품메린은 오버외스터라이히주가 슈테판성당에 기증한 것이다. 그로부터 품메린은 오스트리아의 부활과 단결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푸메린은 '상황을 새롭게 고취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경기가 악화되었을 때 경기회복을 위해 당국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것도 푸메린(영어로 Boomer)이다. 새로운 푸메린의 무게는 2만 130 Kg 이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종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유럽 전체로 볼때는 쾰른 대성당의 종(2만 3천 5백 kg), 이탈리아 로베레토의 마리아 돌렌스 성당의 종(2만 2천 7백 kg)에 이서 세번째로 무거운 종이다. 푸메린의 높이는 약 3 미터이며 지름은 3. 14 미터이다. 새로운 품메린에는 새개의 부조가 만들어졌다. 하나는 무오수태의 복되신 마리아의 모습이며 또 하나는 1683년 오토만 터키가 비엔나를 공성하는 장면이고 나머지 하나는 1945년 슈테판성당에 포탄이 날아와서 대화재가 일어난 장면이다. 슈테판성당의 종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711년 12월이었다. 요셉 1세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당대의 주물전문가인 요한 아하머(Johann Achamer)가 제작했다. 그때에도 터키군이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에 사용했던 쇠대포알을 녹여서 종을 만들었다. 그때에 종이름을 품메린이라고 붙였다. 품메린은 요제핀종(Josephinische Glocke)이라고도 불렀다.

 

슈테판성당의 품메린. 터키군이 남긴 대포알도 상당히 사용하여 만들었다.

 

14구의 하더스도르프(Hadersdorf)에는 터키의 돌(Türkensteine)이라는 것이 있다.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서 잘 찾아보기가 힘들다. 1789년 유명한 장군인 기데온 루돈(Gideon Loudon)이 오토만제국의 베오그라드를 탈환하고 승전기념으로 그곳에서 묘비들과 오토만 문자가 새겨진 석조물들을 가져와 하더스도르프에 놓아둔 것이다. 가장 최근의 비엔나의 터키 기념물은 18구 튀르켄샨츠파르크(Turkenschanzpark)에 있는 분수일 것이다. 유누스-엠레 분수(Yunus Emre-Brunne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991년 터키정부가 오스트리아정부에게 기증한 것이다. 유누스-엠레는 14세기 터키의 유명한 시인이다. 현재 분수가 세워져 있는 장소는 터키의 제1차 비엔나 공성 때에 오스트리아군의 기습을 우려하여 터키군이 요새를 만들어 놓은 곳이다.

 

하이덴슈쓰에 있던 터키 기병. 현재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서 모습을 볼수 없다.

 

캐른트너슈트라쎄의 말타교회 건너편 건물의 벽에는 터키풍의 모자익 그림이 있다. 하렘을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건 터키풍이 아니라 유럽의 중세풍일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헨가쎄의 그리헨바이젤 식당에는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 때에 터키군이 쏜 대포알 3개가 액자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이 식당은 터키의 포격을 받았지만 포탄은 벽에 박혔을 뿐, 건물은 파손되지 않았다고 한다. 터키의 대포알을 기념으로 간직해 놓은 곳은 여러 군데에 있다. 터키군이 퇴각하면서 두고 간 커피자루를 쿨치키(콜쉬츠키: Franz Georg Kolschitzky)라는 사람이 가져다가 비엔나에 커피를 유행시켰다는 얘기는 잘 알려진 것이다. 비엔나가 자랑하는 세계적 커피판매 회사인 율리우스 마이늘(Julius Meinl)의 로고는 터키소년이 타르부슈라는 빨간 터키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이제 비엔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터키사람들은 무섭고 흉악한 적군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이 되었다.


1862년 콜치키가 터키군으로부터 커피를 가져와 전파한 것을 기념하는 작은 조각. 어린 터키 아이가 타르부슈를 쓰고 커피 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조각의 명칭은 마이늘 모르(Meinl-Mohr)이다. 모르는 검은 무어인이라는 뜻이다.

 

17구 헤르날스의 헤르날저 하우프트슈트라쎄(Hernalser Hauptstrasse) 180 번지에는 이른바 '터키십자가'(Turkenkreuz)라는 것이 있다. 1683년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때에 도른바흐 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깃들여 있는 십자가이다. 전투가 끝난 후에 주민들이 그 장소에 석재 십자가를 세웠다. 일종의 빌트슈토크(Bildstock)였다. 그리스도가 도와주어서 그나마 무사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십자가였다. 세월이 흐르자 석재는 마모되었다. 이에 1951년에 십자가를 크게 보수하여 거의 새로 세웠다. 마침 1951년은 헤르날스 구가 설립된지 900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헤르날저 하우프트슈트라쎄에 있는 터키십자가

 

20구 브리기테나우의 포르스트하우스가쎄(Forsthausgasse) 22번지에는 성 요한 카피스트란(St Johann Kapistran) 교회가 있다. 이 교회의 입구에 6미터 높이의 거대한 부조판이 세워져 있다. 부조에는 성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노(St Giovanni da Capestrano: 1366-1456)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성 요한 카피스트란(성 조반니 카피스트라노)는 오른 손에 커다란 십자가 형태의 깃발을 쥐고 있다. 깃발에는 Allein im Kreuz ist Heil(십자가 안에서만 승리가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겸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1456년 오토만 제국이 기독교 국가들을 침공하자 분연히 십자군을 이끌고 대항하여 오토만 제국의 격퇴시킨 인물이다.

 

성 요한 카피스트란 교구교회 전면의 카피스트란 기념부조. 높이 6 미터이다. Allein im Kreuz ist Heil 이라고 적혀 있다.

 

비엔나가 오토만 터키의 두번째 공성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형편에 있을 때에 폴란드왕 얀 조비에스키 3세가 분연히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다른 나라의 구원군과 함께 비엔나 북쪽의 칼렌버그 산정에 모여 하나님께 승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이어 터키군을 급습하여 격퇴시킨 내용은 모두들 잘 아는 사실이다. 지금도 칼렌버그의 성 요셉 교회에 가보면 입구의 벽면에 얀 조비에스키의 그같은 위대한 행동을 찬양하는 기념부조가 설치되어 있다. 그것이 1683년 9월 13일이었다. 얀 조비에스키는 비엔나를 구원하고 나서 비엔나의 황궁에 연결되어 있는 아우구스틴교회를 찾아와서 로레토카펠레에서 감사의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 그를 찬양하도다(Grosser Gott wir loben dich)라는 내용의 테 데움(Te Deum)을 소리 높이 불렀다. 그후 얀 조비에스키 왕은 슈테판성당과 암 호프 교회도 찾아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비엔나시는 비엔나를 구원한 그의 공로를 크게 찬양하여서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그에게 월계관을 씌어 주었다. 아우구스틴 교회는 1683년에 얀 조비에스키 왕이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여 3백주년을 맞이하는 1983년에 기념명판을 제작하여 길거리쪽 벽면에 설치했다.

 

 

아우구스티너키르헤의 얀 조비에스키 기념명판. 오른쪽은 슈테판성당 후면에 있는 조반니 카피스트라노(요한 카피스트란) 기념상. 터키인을 십자가로 제압하는 모습이다.

 

19구 되블링의 크로텐바흐슈트라쎄(Krottenbachstrasse) 106번지(구스타브 피크 가쎄 2번지)에는 길거리에 커다란 대리석 부조가 설치되어 있다. 1968년에 에두아르드 로비츄코(Eduard Robitschko)가 제작한 것으로 1683년 터키의 공성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기독교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의 사이에 대포가 있는 그림으로 칼렌바그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터키의 비엔나 공성(2차)에서 칼렌버그 전투를 상징하는 기념 조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