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사랑하시는 제자는?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 - 1

정준극 2009. 9. 25. 10:19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 - 1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가 누구일까? 그건 누구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항이다. 열두제자 중에서 수석제자라고 할수 있는 베드로(피터)를 가장 사랑하셨을까? 생각해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다짐하였으며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를 맡기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만 천국가는 열쇠를 맡겼기 때문인지 로마가톨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바티칸의 국기에는 열쇠 두개가 그려져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며 다른 하나는 안에서 문을 열 때 쓰는 열쇠이다. 그런 베드로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그러더냐?'라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만이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세주로소이다'라는 정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러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대단히 칭찬하시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기록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드로를 말하는 것일까? 성경에는 '사랑하시던 제자'가 베드로라고 명시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 그렇다고 제자 중에서 설마 가롯 유다는 아닐 것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는 제자이지만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넘긴 자가 아니던가!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롯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시었다. ‘나를 어서 팔아넘겨라’는 뜻이다. 그런 가롯 유다를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괴변을 좋아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므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가롯 유다를 가장 사랑하셨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억지주장이 아닐수 없다. 경외서의 하나인 '유다복음서'에는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은 예수의 지시에 의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유다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야 말로 구원에 대한 하늘의 뜻을 가장 정확히 깨닫고 있어서 예수께서 가장 신임하고 중임을 맡길수 있었던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유다를 배반자로 보 있으며 섭리의 실현자라고 보지는 않고 있다. 더구나 가롯 유다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만방의 교회는 유다야말로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였다는 주장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일축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여기 있는 이 제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올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렇게들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당사자는 좋아서 죽을 지경일 것이며 자자손손 영광으로 생각했겠지만 자기야말로 예수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서 예수께서 왕이 되시면 총리대신쯤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다른 제자는 속이 상해서 이를 박박 갈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수께서는 말씀만은 ‘내가 사랑하는 제자’라고 하시면서도 정작 이름이 무엇인지는 발표하지 않았다.  제자들 간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라고 언급한 것은 최후의 만찬 때와 십자가상에서의 딱 두번이다. 복음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복음서를 쓴 저자들도 약속이나 한듯 한 사람도 '사랑하시는 제가'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제로부터 누구인지 추측해 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림. 루벤스 작품. 이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할수 있다. 누구? 아리마데 요셉? 니고데모? 세베대의 아들 요한? 막달라 마리아?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미지의 사람? 오랜 논란꺼리이다. 위의 그림에서는 사도 요한,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자들의 모습을 찾아 볼수 있다. 그림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막달라 마리아라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예수께서 언급하신 ‘사랑하시는 제자’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한편, 이에 앞서서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에도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요한복음 13장 23절의 말씀이다. 즉,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울정도로 예수와 허물없이 지낼수 있는 제자는 누구일까? 사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신학자들에게 가장 신비스러운 궁금증의 하나였다. 그 제자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십자가 가까이에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잘 모셔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최후의 만찬에서의 사랑하시는 자가 십자가 아래에 있던 그 제자인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다. 아무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니 속상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한편, 요한복음 21: 24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순전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기억에 의해 기술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므로 만일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그보다도 왜 예수께서는 그 제자를 가장 사랑하셨을까? 이런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 안젤로 브론치노 작품. 이들 중에 한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일 것이다. 

 

궁금증을 풀어 나가기에 앞서 또 다른 궁금증이 있다.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는 것이다. 다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그런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에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 중의 하나가 예수의 품에 기대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끝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왜 다른 복음서(공관복음서)에는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왜 요한복음에만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

 

성경에는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 사람이 세베대(Zebedee)의 아들 요한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세베대의 부인의 이름은 살로메(Salome)로서 성모 마리아의 새 동생이라는 것이다. 즉, 살로메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Anna)가 세 번째로 결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성모 마리아는 안나가 첫 번째 남편인 요아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예수와는 이종사촌간이 된다.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딸로서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한 그 여자가 아니다. 그 살로메는 아주 근년인 1950년대에 오스카 와일드라는 극작가가 만들어 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오는 살로메가 성모 마리아의 새 동생이라는 주장이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세베대와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요한의 동생으로 야고보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적어도 형제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요한과 야고보는 오리지널 열두 제자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오리지널이라고 한 것은 가롯 유다가 자살한 이후 새로 구성된 제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요한이 썼다고 믿고 있다.

 

슬픔의 인간 그리스도: 세명의 천사와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주었던 물건들을 들고 있다. 십자가, 채찍을 칠 때 묶었던 기둥과 밧줄,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박았던 못과 우슬초,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과 그리스도가 목마르다고 하셨을 때 신포도주를 적셔서 주었던 해면이다. 드레스덴 대성당 보관.

 

따지고 보면 복음서의 진짜 저자들이 과연 누구인지도 아직 분명치 않다. 마태복음이라고 해서 반드시 마태(매튜)가 썼다는 증거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누가복음이라고 해서 마가(마크)와 누가(루크)가 썼다는 근거가 없다. 다만, 교회가 관습적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으며 나아가 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와 저 유명한 요한계시록도 사도 요한이 썼다고 믿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요한이 썼다고 믿는 것은 1장 1-2절의 기록 때문이다. 즉,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증언하였다고만 되어 있을 뿐 실제로 요한이 썼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도 요한이 복음서와 서한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를 단순히 제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저자라고 보고 있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요한이 요한복음의 최종 저자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다. 요한복음서는 문장이 수려한 그리스어로 적혀 있었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된 신학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기록으로 시작한다. 대단히 철학적이며 높은 신학의 경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갈릴리 호수의 평범한 어부에 지나지 않는 요한이 그런 훌륭하고 논리적인 문장과 신학적인 주장을 썼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부 요한의 일상어는 아람어였을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어를 마스터하여 요한복음을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부들에게 그리스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갈릴리 호수를 떠나서 그리스까지 가서 생선을 팔았나?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 러시아 이콘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요한복음이 되었든지 요한계시록이 되었든지 요한의 기억을 기본으로 하여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요한은 예수의 모든 행적과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고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요한은 예수와 이종사촌간이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의 친족관계는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보다 진하면 진했지 덜하지 않다고 한다. 요한이 예수의 친족(사촌)이기 때문에 예수의 행적과 관련하여 요한이 보고 들은 모든 사항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고 더 정확하다고 볼수 있다. 그리하여 요한의 얘기를 전해 들은 사람이 나중에 유려한 그리스어와 깊은 신학적 지식으로서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요한을 대신하여 정리하여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을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확신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학자들은 요한보다 더 적당한 '사랑하시는 제자' 후보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요한보다 더 적당한 후보자인지를 살펴보자. 그 전에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몇가지 전제조건들을 살펴보자.

 

1. ‘사랑하시는 제자’는 반드시 예수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라는 용어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반드시 오리지널 열두 제자 중의 한사람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도 요한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2. 성경에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말할 때에 일반적으로 ‘그가’(He) ‘그를’(Him) ‘그의’(His)로 표현하였다. 만일 ‘사랑하시는 제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고 남자로 알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가’ 등의 남성형으로 불렀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랑하시는 제자’는 남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일설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3. 성모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후 그 ‘사랑하시는 제자’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요한복음 19: 27). 한편, 사도행전 1: 14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승천 이후에 이른바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하는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그리고 그 이후의 기간에 나사렛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지냈다. 그러므로 이상의 두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에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루살렘 또는 그 인근에 집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누구일까? 

4. 예수가 체포되어 유태교 지도자들 또는 빌라도로부터 심문을 받는 내용은 요한복음이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도 가장 자세하다. 요한복음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직접 썼던지 또는 그 ‘사랑하시는 제자’의 자료를 기본으로 다른 사람이 적었던지 여하간에 그 사람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는 회당, 또는 빌라도가 있는 로마총독부까지도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볼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당국과 잘 통하는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제사장과 제사장들만이 회의를 할수 있는 장소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유태교에서도 무시못하는 인물이라는 증거가 아닐수 없다. 그러한 배경의 사람이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5. ‘사랑하시는 제자’는 십자가의 처형 때에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십자가상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말씀을 하시자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제자로 알려져서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머지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실 때에 숨이 있지도 않았다. 끝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었다.

6.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비교적 자주 갔었다. 만일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면 그의 집에서도 유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자주 만났을 것이다. 복음서 중에서는 요한복음만이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도 간혹 예루살렘에 가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복음서에는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기록이 없을수 있다는 것이다.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 당하는 그리스도. 게리트 반 혼소르스트(Gerrit Van Honthorst) 작품.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이런 장소에도 들어가 심문 장면을 자세히 보고 들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생각해 보건대, 예수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비밀스런 제자, 즉 숨겨놓은 제자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있었다. 요한복음 19: 39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라는 구절이 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지체가 높았던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를 개인적으로 만나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하여 순순히 승낙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또 다른 영향력있는 사람은 니고데모였다. 요한복음 3: 1-21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바리새인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원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상원의원 또는 참의원인 셈이었다. 아무튼 예수는 예루살렘에 두명 이상의 친구 또는 비밀스런 제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였고 이에 따라 성모 마리아는 예수의 승천후 예루살렘에 머물며 지냈던 것이다. 따라서 아리마대의 요셉이나 니고데모 중의 하나야 말로 공식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볼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아리마대의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제외한 다른 후보자에 대하여도 청문회를 가져보자.

 

Pietro Perugino 012.jpg
아리마데의 요셉. 피에트로 페루지노 작품의 '비탄'의 일부. 아리마데는 유대의 한 성읍으로서 현재는 어느 장소인지 확실치 않다. 일설에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5km 떨어진 마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