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와 피아노

비엔나의 자랑 뵈젠도르퍼(Bösendorfer) 피아노

정준극 2010. 11. 23. 12:22

비엔나의 자랑 뵈젠도르퍼(Bösendorfer) 피아노

 

빈필하모닉의 본부이며 비엔나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비엔나악우회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 뵈젠도르퍼 피아노 점포. 뵈젠도르퍼슈트라쎄 12번지이다. 뵈젠도르퍼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 이름이다. 멀리 보이는 교회건물은 칼스키르헤이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훌륭한 피아노가 만들어지지 않을수 없다. 19세기에는 비엔나에 약 150개의 피아노 제조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제품은 뵈젠도르퍼(Bösendorfer) 피아노이다. 뵈젠도르퍼 피아노는 18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이그나즈 뵈젠도르퍼(Ignaze Bösendorfer: 1796-1859)가 1828년에 처음 만들기 시작한 피아노이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피아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미국 맨해튼에서 만들기 시작한 슈타인웨이(Steinway and Sons)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뵈젠도르퍼 피아노는 슈타인웨이보다 무려 25년이나 먼저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비엔나의 음악인들은 뵈젠도르퍼를 세계 최고의 피아노라고 믿고 있다.

 

세계적인 뵈젠도르퍼 피아노의 일반 모델

 

세계의 3대 피아노라고 하면 비엔나의 뵈젠도르퍼, 베를린의 베흐슈타인(Bechstein), 그리고 뉴욕의 슈타인웨이(Steinway)를 꼽는다. 혹자는 일본의 야마하, 또는 독일의 쉼멜(Schimmel)이나 이바흐(Ibach)를 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뵈젠도르퍼는 슈타인웨이와 함께 세계 최고의 피아노 순위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비엔나의 뵈젠도르퍼 피아노 제조회사는 지금으로부터 180여년 전 문을 열었다. 1828년이라고 하면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해이다. 이그나즈 뵈젠도르퍼가 뜻한바 있어서 현재의 칼스플라츠 인근에 피아노 제조공장을 차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비엔나는 세계 음악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비엔나에서 작곡활동을 했고 연주회를 가졌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브람스, 브루크너, 요한 슈트라우스, 주페, 아르놀트 쇤버그, 구스타브 말러, 휴고 볼프, 카를 체르니 등등. 이들은 모두 비엔나 특유의 음악문화를 가꾸고 완성하기 위해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비엔나를 음악의 도시로 가꾼 데에는 이들 작곡가들의 역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길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한 사람을 꼽는다면 바로 뵈젠도르퍼이다. 뵈젠도르퍼가 피아노로서 비엔나의 음악문화 조성을 위해 기여한 바는 실로 다대하였다. 훗날 비엔나의 유명한 음악신문인 노이에 무지칼리세 프레쎄(Neue musikalische Presse)는 뵈젠도르퍼의 업적에 대하여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뵈젠도르퍼는 비엔나에 새로운 소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하늘로부터는 천상의 소리를 가져오고 사람들로부터는 마음속의 소리를 가져와서 새로운 소리를 만들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의 창시자인 이그나즈 뵈젠도르퍼

 

이그나즈 뵈젠도르퍼는 1796년(혹은 1794년) 비엔나에서 목공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뵈젠도르퍼는 목공으로서의 재능도 훌륭했지만 음악적인 소질도 뛰어났다. 뵈젠도르퍼는 비엔나예술아카데미(현재의 비엔나미술대학교)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19세부터는 당대의 피아노 제작가인 요셉 브로드만(Joseph Brodman)의 도제(徒弟)가 되었다. 뵈젠도르퍼는 1828년 스승인 브로드만이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한푼 두푼 모아 두었던 돈을 털어서 스승의 피아노 공장을 인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뵈젠도르퍼가 32세 때였으며 도제생활 13년만의 일이었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뵈젠도르퍼 피아노의 탄생과정이다. 뵈젠도르퍼 피아노가 어떤 점이 훌륭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다만, 프란츠 리스트의 코멘트를 소개함으로서 뵈젠도르퍼 피아노에 대한 평판을 대신한다. 리스트는 뵈젠도르퍼를 만나고 나서 ‘뵈젠도르퍼는 완벽하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꿈꾸었던 피아노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라며 감탄했다. 리스트는 뵈젠도르퍼로 연주하면 마치 노래를 부르듯 멜로디가 아름다우며 음량이 풍부하고 명료하기 때문에 애용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집에서나 연주회장에서나 평생을 뵈젠도르퍼만을 고집하였다.

 

프란츠 리스트가 프란츠 요셉 황제, 엘리자베트 왕비의 앞에서 뵈젠도르퍼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다.

 

뵈젠도르퍼는 합스부르크 황실과 관계가 깊었으며 또한 당대의 음악가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뵈젠도르퍼는 합스부르크 황실에 피아노를 공급하였으므로 호프부르크 또는 쇤부른 궁전의 피아노는 거의 모두 뵈젠도르퍼였다. 뵈젠도르퍼 피아노는 1839년 세계산업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페르디난트1세 황제는 이그나즈 뵈젠도르퍼에게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황실 및 궁정 피아노 조달자’라는 타이틀을 하사하였다. 피아노 제작자로서 그런 타이틀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1858년에는 한단계 더 높아져서 황제의 시종장과 같은 높은 귀족의 직위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뵈젠도르퍼는 유럽 각국의 왕실과 귀족 가문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는 비엔나를 대표하는 최고의 악기로서 존경을 받았다. 1859년 이그나즈 뵈젠도르퍼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온 비엔나가 상점을 닫고 애도를 표시할 만큼 성대한 것이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발전시킨 루드비히 뵈젠도르퍼

 

이그나즈 뵈젠도르퍼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루드비히 뵈젠도르퍼가 사업을 맡았다. 루드비히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들어 더욱 훌륭한 피아노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아울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회를 후원하였다. 여러 박람회에서 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수출도 크게 확장하였다. 특히 1889년부터 뵈젠도르퍼 피아노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음악경연대회로서 계속되고 있음은 음악에 대한 루드비히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수 없다. 비엔나시내에 있던 공장은 1860년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공장이 너무 협소하게 되자 1870년 비엔나 4구 그라프 슈타렘버그 가쎄 14번지로 옮겼다. 이곳은 2010년 3월 말까지 뵈젠도르퍼 피아노의 본사였다가 2010년 4월 1일 비너 노이슈타트의 공장으로 본사를 옮겼다.

 

비너 노이슈타트에 있는 뵈젠도르퍼 피아노 공장

 

1869년은 뵈젠도르퍼에게 영광의 해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일본 천황에게 기증하였다. 도쿄에서 일본의 젊은 메이지 천황은 처음으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서양 음악을 들었다. 도쿄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직원이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천황은 커튼 뒤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폴카가 연주되었다. 천황은 피아노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앙코르를 청했다. 19세기에 뵈젠도르퍼는 엘리자베트 왕비(씨씨), 프랑스의 유제니 왕비, 러시아의 짜르 등을 위해 피아노를 만들어 제공하였다. 세계의 피아노 제조자로서 이만한 영광은 결코 없었다. 뵈젠도르퍼는 특별 피아노액션을 개발하였다. 하나로 된 주물 프레임을 사용하였으며 스트링은 교차되도록 하는 오버스트렁 스케일(Overstrung scale)을 도입하였다. 1900년경 작곡가 페루치오 부소니(Ferruccio Busoni)가 바하의 오르간 음악을 피아노로 편곡하면서 뵈젠도르퍼에게 새로운 피아노의 제작을 의뢰하였다. 루드비히 뵈젠도르퍼는 8옥타브에 길이가 290cm가 되는 콘서트 그랜드 오페라를 제작하였다. 오늘날 이 모델은 뵈젠도르퍼를 대표하는 최고제품으로서 ‘임페리알’(Imperial)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루드비히 뵈젠도르퍼가 피아노를 설계함에 있어서는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의 자문을 받았다. 비엔나악우회 건물을 설계한 테오필 한젠(Theophil Hansen), 안톤 그로써(Anton Grosser),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 요셉 호프만(Josef Hoffmann) 등이다. 이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 디자인으로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설계하였다.  

 

테오필 한젠이 설계한 뵈젠도르퍼 피아노

 

루드비히 뵈젠도르퍼는 1872년에 비엔나에서도 유명한 콘서트 홀을 마련하여 피아노 연주회장으로 사용하였다. 개관 기념 연주회 때에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였던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가 연주했다. 프란츠 리스트의 딸인 코지만의 남편으로 지휘자로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뵈젠도르퍼 홀은 1구 헤렌가쎄(Herrrengasse)의 팔레 리히텐슈타인에 있었다. 마구간으로 사용되던 장소였다. 6백석의 홀로서 음향이 대단히 좋았다. 하지만 1913년까지 운영되다가 1차 대전으로 문을 닫았다.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이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뵈젠도르퍼 회사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2010년 10월 6일 1구 돔가쎄(Domgasse)에 있는 모차르트하우스(전에는 휘가로하우스라고 부르던 모차르트 기념관)의 지하에 뵈젠도르퍼 홀을 다시 열었다.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음향은 뛰어난 곳이다. 개관 기념으로는 바흐, 모차르트, 프리드리히 굴다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비엔나의 모차르트하우스 지하에 있는 뵈젠도르퍼 잘(홀)에서의 연주회

 

세월이 흘러 20세기도 중반에 들어섰다. 뵈젠도르퍼의 후손들 중에서는 이그나즈와 루드비히만큼 피아노에 대하여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거대한 회사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1966년 전통의 뵈젠도르퍼 피아노 회사는 미국의 킴벌(Kimball) 피아노 회사에게 팔렸다. 피아노 제조 공장은 비너 노이슈타트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에서 자각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의 은행그룹인 BAWAG/PSK(Bank für Arbeit und Wirtschaft -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a)가 2001년말 뵈젠도르퍼를 인수하였다. 사족: 피아노 한대를 만드는데 1년 걸린다.

 

안톤 그로써가 설계한 뵈젠도르퍼 피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