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수도원의 영욕

빌헤링(Wilhering)수도원

정준극 2011. 2. 5. 11:50

빌헤링(Wilhering)수도원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인 로코코 양식의 빌헤링수도원 교회

 

빌헤링 수도원은 오베르외스터라이히의 빌헤링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으로 린츠에서 약 8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8세기에 재건한 건물들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로코코 양식으로 이름나 있다. 빌헤링 수도원은 빌헤링에 살고 있던 울리히와 콜로 형제가 세상 떠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들의 고성을 수도원으로 기증하여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아우구스틴 수도회에 속하였으나 얼마후 창설자인 울리히가 슈티리아의 라인(Rein) 수도원으로부터 시토회 수도사들을 데려오는 바람에 시토회 수도회의 소속이 되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수도원은 계속 쇠퇴하여서 창설한지 40년이 지난 때에는 단 두명의 수도승들만 남아 있는 거대한 건물이 되었다. 제4대 수도원장인 하인리히는 1185년에 빌헤링 수도원을 라인 수도원의 모수도원인 에브라흐(Ebrach)수도원의 관할아래 두었다. 그리하여 에브라흐 수도사들이 옮겨와서 발전을 이룰수 있었으나 미약하기는 전과 다름 없었다.

 

장엄함과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빌헤링 수도원 교회의 내부

 

그후 빌헤링 수도원은 여러 기존 수도원들의 후원을 받아 재발족하였다. 즉, 현재 체코공화국의 비쓸 브로드(Vyssl Brod)수도원, 오베르외스터라이히의 엥겔스첼(Engelszell)수도원,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조이젠슈타인(Sausenstein) 수도원의 협조를 받았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수도원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빌헤링 수도원은 1928년에는 볼리비아에 아폴로 수도원을 개척수도원으로 설립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기간중에는 문을 닫을뻔 하기도 했다. 당시 수도원장이던 에라스무스 마이어라는 사람은 수도원의 상당 재산을 처분하여 돈으로 만든후 뉘른베르크로 도주하는 사태도 있었다. 마이어는 뉘른베르크에서 결혼해서 잘 살았다. 종교개혁과 수도원장의 비리의 여파로 1585년에는 수도원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는 희한한 일도 있었다. 그후 알렉산더라는 수도원장이 취임하여 반개혁운동에 동참하면서 황실의 지원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빌헤링 수도원의 고틱 클로이스터. 옛 모습이다.

 

빌헤링 수도원은 1733년에 대화재에 휩싸여 거의 모든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종전의 건물로서는 오로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회랑과 고딕 양식의 클로이스터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린츠의 요한 하슬링거가 당대의 건축 거장인 마르티노 알토몬테에게 의뢰하여 로코코 양식으로 재건축하였다. 알토몬테는 중앙제단도 완성하였다. 천정화는 알토몬테도 작업에 참여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바르톨로메오가 대부분 완성하였다. 화려한 스투코는 거장 요한 게오르그 위블헤르와 미하엘 화이히트마이르의 작품이다. 그리하여 빌헤링의 교회는 오늘날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포탈. 오리지널 모습이다.

 

1940년에 빌헤링 수도원은 나치에게 강제 수용되었다. 수도승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어떤 수도승들은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또 어떤 수도승들은 강제로 입대하였다. 당시 수도원장이던 베른하르트 부르크슈탈러는 1941년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다. 1945년에 미군이 진주하여 수도원을 접수했다. 수도승들이 돌아왔다. 수도원 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다. 현재 빌헤링에는 약 30명의 수도승들이 기거하고 있다. 오늘날 빌헤링 수도원은 삼림, 농사, 온실재배 등을 통하여 재정을 자립하고 있다. 빌헤링 수도원의 소유인 퀴른버그 숲은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