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수도원의 영욕

아우구스틴교회(Augustinerkirche) 수도원

정준극 2011. 1. 20. 18:37

아우구스틴교회(Augustinerkirche) 수도원

Augustin Friars - Augustinian Friary with the Augustinian Church(Augustinerkirche)

 

아우구스티너슈트라쎄에서 본 아우구스틴 수도원과 교회. 오른쪽은 로브코비치 궁전으로서 현재는 극장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베토벤의 에로이카가 초연되었던 에로이카 홀이 있다.

 

비엔나의 도심에는 놀랍게도 세 곳의 수도원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도원이라고 하면 저 먼 산중에 있는 건물로 생각하지만 비엔나의 경우에는 구시가지에 몰려 있다. 아우구스틴교회에 속한 수도원, 카푸친교회에 속한 수도원, 프라이융의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이다. 이 세 수도원과 교회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파트에서 누차 설명하였으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원' 편에서는 간단 설명코자 한다.

 

아우구스틴교회에서 거행된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의 결혼식. 아우구스틴교회는 합스부르크 황실 사람들의 결혼식장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시스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아우구스틴교회(아우구스티너키르헤)와 수도원은 호프부르크 궁전 옆에 있는 요셉스플라츠(요셉광장)의 한쪽에 있다. 교회 입구는 요셉스플라츠의 한 모퉁이에 있지만 수도원은 그로부터 카푸치너키르헤에 이르는 아우구스티너 슈트라쎄에 걸쳐서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겨울 궁전이다. 아우구스틴교회는 1327년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1세(Friedrich der Schoene)가 수도원과 함께 설립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틴교회는 호프부르크 궁전 교구의 교회로서 역할을 하였다. 아우구스틴교회의 아름다운 고틱 내부는 18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이 교회의 공식명칭은 장크트 아우구스티너키르헤(St Augustinerkirche)이지만 비엔나 사람들은 편의상 그냥 아우구스티너키르헤라고 부른다.

 

아우구스틴교회(아우구스티너키르헤)  중앙제단. 만왕의 왕 그리스도.

 

아우구스틴교회가 합스부르크 황실의 전속교회로서 교구교회의 지위를 얻은 것은 17세기에 가서의 일이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전속교회이니만치 합스부르크 황족들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1736년에는 저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로레인의 프란시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며 1810년에는 마리 루이제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결혼식이 열렸고 1854년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루돌프 황태자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의 결혼식도 이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예전에는 아우구스틴교회에 속한 수도원이 흥성하였으나 현재는 검은 옷을 입은 6-7명의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수도승들이 남아서 교구와 관련된 업무를 보고 있을 뿐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황제를 추모하는 제단

 

교회의 웅장한 회랑은 1330-1339년에 거장 디트리히 란트너(Dietrich Landtner)가 완성한 것이다. 완성은 하였지만 정식으로 봉헌된 것은 1349년 11월 1일이었다. 처음에는 독자적인 건물로서 높은 첨탑과 함께 위용을 자랑하였지만 이후 호프부르크 궁전이 점차 확장되는 바람에 이제는 호프부르크의 부속건물처럼 보이는 신게가 되었다. 밖에서 보면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알기 어렵지만 정작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샹들리에와 함께 아름다운 모습을 볼수 있다. 교회 내부에는 원래 18개나 되는 부속 제단(Side Altar)이 있었다. 그러다가 요셉2세의 치하인 1784년 교회의 내부를 고틱 양식으로 복구할 때에 거의 대부분 다른 곳으로 옮기던지 폐쇄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부속 제단이 마련된 것은 극히 최근인 2004년이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칼1세(1887-1922)에게 봉헌된 제단이다. 칼1세는 재임중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성자로 시성되는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제국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세워지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아우구스티너키르헤의 오르간. 매주 오전 11시 미사에서는 슈베르트의 미사곡등을 장엄하게 연주한다. 이 교회 성가대가 취입한 CD도 판매한다. 훌륭한 연주이다.

                

아우구스틴교회가 합스부르크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한쪽에 있는 로레토(Loreto) 채플 때문이다. 중앙제단의 옆에 있는 로레토 채플에는 합스부르크 상당수 역대 군주의 심장이 은제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다. 합스부그크 군주들의 시신은 카푸친교회 지하의 황실납골당(Kaisergruft: Imperial Crypt)에 보관되어 있지만 아우구스틴교회에는 황실 가족 54명의 심장이 별도로 보관되어 있다. 교회내부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장소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무덤이다. 교회로 들어가면 회랑의 오른쪽에 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서 그의 무덤은 1805년 거장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가 조각작품으로 완성한 것이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작센의 알베르트 공작과 결혼했었다. 여섯 명의 사람들이 왼쪽에서부터 피라밋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에는 천사가 있고 사자 한마리가 엎드려 있다. 왼쪽의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젊은 여인은 이미 무덤 속으로 들어서 있어서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처음 세 사람은 미덕(Virtue)과 그의 시녀들을 상징한다. 뒤에 있는 세 사람은 자비(Charity)를 상징한다. 그런데 앞의 세 사람과 뒤의 세 사람을 단순히 미덕과 자비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뒤의 세 사람은 인간의 세 연령단계를 의미한다. 즉, 소년, 청년, 노년이다. 아무리 연령 층이 다르다고 해도 죽음 앞에서는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합스부르크 황실 사람들의 심장을 보관한 영묘(헤르츠그루프트)

 

카노바의 피라미드는 무덤을 말한다. 고대의 파라오들은 후세들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카노바의 피라미드는 입구가 넓어서 누구나 들어올수 있도록 했다. 입구의 상단에는 간단한 문구로서 죽은 사람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상단에는 죽은 사람의 모습을 메달리온으로 만들어서 설치해 놓았다. 왼쪽의 천사와 사자는 영광을 상징한다. 카노바는 1792년에 교황 클레멘트 13세를 위한 기념비를 만들 때에도 천사와 사자를 두어 영광을 상징하게 했다. 1805년에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했을 때 그는 이 피라미드 영묘를 보고 너무 감동하여서 30분이 넘게 바라보았다고 하며 결국은 카노바에게 자기를 위한 영묘도 이런 스타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영묘는 파리의 앵밸리드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거장 안토니오 카노바가 1805년에 완성한 마리 크리스티나의 영묘. 애도하는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슬픔에 젖어 있는 천사와 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우구스틴교회는 성가연주로서 유명하다. 매주 일요일 11시 미사 때면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합창단이 아름다운 미사곡들을 연주한다. 그래서 관광객들의 방문도 심심찮게 이루어지고 있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1814년 10월, 아우구스틴교회에서 F 장조 미사곡의 두번째 연주를 직접 지휘하였다. 이때 오르간은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가 연주했다. 슈베르트의 F 장조 미사곡은 리히텐탈 합창단이 그해 8월 처음 연주했다.아우구스틴교회에는 두개의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아우구스틴교회의 성가대와 오르간. 1976년 리거(Rieger)가 제작한 오르간이다.

 

아우구스티너키르헤에는 1683년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 3세가 오토만 터키군의 공성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던 비엔나를 구출한 것을 기념하여 교회 외부 벽면에 명판을 설치했다. 조비에스키는 칼렌버그에 운집하여 있다가 1683년 9월 13일 오토만 터키군을 몰아내는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조비에스키가 참여하는 감사미사가 아우구스틴교회의 로레토카펠레에서 테 데움으로 거행되었고 이어 슈테판대성당과 궁정교회에서도 감사미사가 열렸다.

 

아우구스틴교회 벽에 설치되어 있는 얀 조비에스키 감사 명판


아우구스틴 교회와 수도원 공중사진. 호프부르크가 알베르티나의 중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