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카를로 게수알도의 특별한 인생

정준극 2011. 5. 10. 12:53

작곡가 카를로 게수알도의 특별한 인생

17세기 마드리갈의 거장, 음악가 중에서 가장 잔혹한 살인자

 

카를로 게수알도 공자

 

17세기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거장인 카를로 게수알도(Carlo Gesualdo: 1566-1613)는 지체높은 베노사의 공자로서 콘차백작(Count of Conza)이라는 신분의 귀족이었다. 그는 작곡가이면서 뛰어난 루트, 하프시코드, 기타 연주자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전위적이라고까지 할수 있는 현대적인 강력한 표현의 마드리갈로서 유명했다. 하지만 게수알도가 세계적으로 더 유명해진 사연이 따로 있다. 사람을 여러 명이나 죽인 악명 높은 살인자였다는 것이다.  무슨 살인을 어떻게 했기에 악명이 높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 아닐수 없다. 신앙심이 깊어서 마드리갈과 같은 종교음악만을 중점적으로 작곡했던 그가 살인마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의 삼촌은 성인으로 시성된 훌륭한 분이시며(성 카를로 보로메우스) 그의 어머니는 교황 비오4세의 조카가 되는 사람인데 그런 입장에서 살인마가 되었다니 어떻게 된 것인가?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 지방의 베노사 전경. 트로이전쟁 이후 그리스의 영웅 디오메데스가 설립한 도시라고 한다.

 

카를로 게수알도는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 나폴리왕국의 한 파트인 베노사(Venosa)에서 태어났다. 공식적으로는 1566년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지만 실상 1560년인지, 또는 1561년인지 분명치 않다. 게수알도는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1560년에 베노사를 영지로 받아 공국으로서 통치한 영주였다. 게수알도의 삼촌은 유명한 성 카를로 보로메오(St Carlo Borromeo)로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성 칼 보로메우스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성 칼 보로메우스는 페스트가 물러가도록 기적을 베푼 성인으로 유명하며 비엔나의 칼스키르헤(Karlskirche: 칼교회)는 성 칼 보로메우스에게 봉헌한 교회이다. 그리고 게수알도의 어머니는 교황 비오4세(Pius IV)의 조카가 된다.  이만하면 게수알도는 상당한 집안의 사람이며 더구나 대단히 종교적인 인물이라고 말할수 있다. 게수알도는 어릴 때부터 다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살인 얘기로 들어가 보자.

 

젊은 시절의 카를로 게수알도. 그는 친사촌(First cousin)인 마리아 다발로스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리아가 두번째 결혼도 실패하여 미망인이 되자 두 집안의 주선에 따라 기꺼이 결혼하였다.

 

게수알도는 1586년, 대략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돈나 마리아 다발로스(Donna Maria d'Avalos)라는 귀족 여인과 결혼하였다. 이름에서 돈나(Donna)라는 것이 붙은 것만 보아도 단번에 귀족 출신임을 알수 있다. 마리아 다발로스는 페스카라(Pescara) 후작의 딸이었다. 마리아 다발로스가 게수알도와 결혼할 때에 몇 살인지는 정확치 않다. 게수알도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마리아는 게수알도와 친사촌간이었다. 당시에는 사촌간의 결혼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게수알도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결혼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게수알도가 베노사 영주의 대를 이을 아들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서둘러서 마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두번이나 결혼했던 경험이 있으며 또한 첫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이까지 낳은 경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을수 있다는 보장은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마리아는 요새 말로 섹시하였으며 그 분야에 대하여 대단히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첫 남편도 부부관계에 너무 정력을 쏟은 나머지 제명에 죽지 못하였다고 하니 마리아의 능력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런 마리아가 신앙심이 깊은 게수알도와 결혼하였으니 순탄치 못하리라는 것은 짐작코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과연! 마리아 다발로스는 게수알도와 결혼한지 2년쯤 지나서 안드리아(Andria)공작인 젊은 화브리치오 카라파(Fabrizio Carafa)라는 사람과 사랑에 빠져 밀회를 하기 시작했다. 공작은 결혼하여 네 아이까지 둔 형편이었다. 아무튼 그러기를 2년 이상이나 계속하였다. 어찌나 비밀스럽게 밀회를 하였던지 남편 게수알도는 2년이 지나도록 눈치를 채지 못하였다. 하지만, 남편 게수알도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 온 동리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남녀간의 불륜은 언젠가는 탄로가 나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게수알도도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어느날, 게수알도는 하인 몇명과 함께 집에서 50 마일 떨어져 있는 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나 함께 사냥을 떠나기로 하고 부인인 마리아에게는 아무리 빨라도 다음 날에나 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친척들을 만나 사냥을 떠나면 다음날, 또는 며칠 후에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리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부인 공작을 불러 들였다. 하인들도 다 내보냈다. 공작은 '이제 그만 만나자!'고 간청하였지만 마리아가 '나는요, 사랑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관계를 계속하였다. 한편, 게수알도는 아내 마리아의 행동이 아무래도 수상하여서 마리아 몰래 집 열쇠를 하나 더 만들었다. 지체 높은 백작이 집 열쇠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일은 없다. 그건 하인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설마 게수알도가 엑스트라 열쇠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게수알도는 사냥을 간다고 하고 집을 나와서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아내 마리아와 공작이 침대에서 딩굴고 있는 현장을 잡았다. 게수알도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팔 다리를 절단하였다. 게수알도는 하인들을 시켜 두 사람의 토막난 시체를 저택의 정문 앞에 놓도록 하여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했다. 게수알도는 지체 높은 귀족이기 때문에 당국의 고발을 당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렇지만 아내 마리아나 정부인 공작의 가족들이 복수를 하러 덤벼 들면 곤란하므로 우선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피신하였다.

 

게수알도가 아내 마리아와 공작을 살해할 때에 하인들 한 두명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하인들의 증언을 통해 살인현장의 모습이 비교적 자세하게 전달될수 있었다. 게수알도는 우선 하인을 시켜 공작을 칼로 찔러 죽이도록 했다. 공작의 몸에는 칼로 찔린 자국이 많았다. 한편, 아내 마리아는 게수알도가 직접 살해했다고 한다. 게수알도는 마리아를 몇 번이나 칼로 찔렀는데도 죽지 않자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야!'라고 소리치며 계속 칼로 찔렀다고 한다. 그리고 공작을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 머리에 권총을 한 발 쏘았다고 한다. 공작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공작은 여자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여자로 변장하여서 게수알도의 저택으로 스며 들어왔던것 같았다. 대신, 공작의 남자 옷은 침대 옆에 가즈런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시인들은 게수알도의 살인사건을 시로 쓰느라고 바뻤다. 특히 나폴레옹 시대의 시인들은 너도나도 게수알도의 살인사건을 시로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전대미문의 엽기성 살인사건에 대하여 신문들도 정성을 다하여 보도했다. 하지만 게수알도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체 높은 귀족이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밝혀진 경찰보고서를 보면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자세히 알수 있었다. 살인사건의 후문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센세이셔널 한 것은 게수알도가 마리아에게서 얻은 둘째 아들까지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둘째 아들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아기였다. 일설에 의하면, 게수알도는 어린 아들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 본 후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죽였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게수알도는 아기를 들고 아기가 숨을 쉬지 못할 때까지 세차게 흔들어서 죽였다고 한다. 한편, 게수알도는 첫 째 아들도 출생을 의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첫 째 아들에 대하여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게수알도는 둘째 아들을 집어 들고 벽에 내던져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막으려던 유모까지 죽였다고 한다. 또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게수알도는 장인이 딸 마리아가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복수를 하려고 찾아 오자 장인까지 죽였다고 한다. 게수알도는 마리아와 공작을 죽인후 혹시나 그들의 가족이 복수를 해 올 것으로 짐작하고 종자들을 무장시켜 대비케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기록들에 의하면 게수알도가 장인과 둘째 아들을 죽였다는 내용은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지 약 6년후, 즉 1594년 경, 게수알도는 페라라(Ferrara)의 공작인 알폰소 2세의 조카 레오노라(Leonora: 어떤 자료에는 엘레오노라)와 재혼하였다. 그 지경에 게수알도는 당시 이탈리아 음악활동의 중심지인 페라라로 가서 지냈으며 이때 레오노라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페라라는 마드리갈이 활발했던 곳이어서 게수알도로서는 가서 활동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게수알도는 페라라에 있을 때에 그의 첫번째 마드리갈집을 출판하였다. 게수알도는 페라라에 있으면서 그야말로 만족할 만한 작곡 활동을 하였다. 몇 년후 게수알도는 두번째 아내 레오로나와 함께 고향 베노사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페라라의 음악적 분위기를 잊지 못하는 게수알도는 베노사에서도 그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저택에는 새로운 조류를 지향하는 작곡가들과 유명 성악가들이 자주 왕래하였다. 부유했던 게수알도는 개인 성악가들과 연주자들을 고용하여 자기의 저택에서 자주 음악회를 열었다. 게수알도는 음악 이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듯한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집이 나폴리에서 출판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페라라의 공주 엘레오노라가 게수알도를 관찮게 생각하여서 결혼코자 했으나 가톨릭 신부인 엘레오노라의 이복오빠가 '그런 인간과 어떻게 결혼한단 말인가?'라며 극구 반대하자 게수알도는 그 오빠를 찾아가서 단칼에 목을 그어 죽이고 시체를 강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엘레오노라를 납치하여 시골에 있는 자기의 또 다른 성에 가두어 놓았다고 한다. 결국 게수알도는 엘레오노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게수알도가 음악에 정진하면 할수록 새로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는 멀어만 갔다. 드디어 아내 엘레오노라는 게수알도가 자기를 학대하였다고 주장하며 고소하였다. 엘레오노라는 대단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알아 모시는 에스테(Este) 가문이었다. 엘레오노라는 게수알도와 이혼하려고 했으나 가톨릭 국가에서의 이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엘레오노라는 집에 있기가 싫어서 이곳 저곳을 여행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모데나(Modena)에 자주 가서 지냈다. 모데나에는 엘레오노라의 오빠가 영주로 있었다. 분노한 게수알도는 모데나에 있는 엘레오노라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어 집으로 돌아오라고 요청하였다. 훗날 세실 그레이(Cecil Gray)라는 작가는 엘레오노라가 상당히 정숙한 여인이었음에 틀림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게수알도가 엘레오노라를 죽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수알도의 말년은 심한 스트레스때문에 힘겨운 것이었다. 그가 실제로 여러 사람이나 죽였는지는 근거가 없어서 잘 알수 없지만 아무튼 살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다보니 게수알도에게는 자학의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말년의 그는 매일 하인을 시켜 자기를 때리게 했다고 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게수알도를 하인이 몽둥이로 때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게수알도는 그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별도의 하인을 두기까지 했다. 게수알도는 성자들의 유물, 예를 들면 손가락 뼈 같은 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성자의 유물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심적 고통을 치유하며 죄 값을 덜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게수알도는 심지어 자기 삼촌인 성 칼 보로메오를 통해 성자들의 유물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나폴리 구시가지 서쪽에 있는 예수 누오보 교회. 1688년 지진으로 파괴되기 전에는 이 교회의 한쪽에 있는 성이그나티우스 채플에 게수알도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였다는 명판이 남아 있다.

 

게수알도는 고독과 회한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의 아벨리노(Avellino)에 있는 자기의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첫번째 부인인 마리아에게서 낳은 아들 에마누엘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지 3주 후였다. 게수알도의 사인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전기작가에 의하면 게수알도는 그의 두번째 부인인 엘레오노라(레오노라)에게 살해 당했을 수도 있다고 썼다. 게수알도의 시신은 나폴리의 '새로운 예수'(Gesu Nuovo)교회에 있는 성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 채플에 안장되었다. 게수알도의 석관은 1688년 지진으로 파손되었다. 교회를 재건할 때에 게수알도의 석관이 있었던 채플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시멘트로 포장되었다. 하지만 그곳에 아직도 게수알도의 석관이 있었다는 명판이 남아 있다. 

 

게수알도가 세상을 떠난 아벨리노의 시가지. 왼쪽 건물이 로사리오교회이다. 이게수알도는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시신은 나폴리로 옮겨져 '새로운 예수교회'(Gesu Nuovo Chiesa)에 안치되었었다.

 

게수알도가 말년에 고통과 번민 속에서 지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알수 있다. 그의 음악에는 그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사랑' '고통' '죽음' 환희' '번뇌' 등이다. 그런 가사는 대부분 그가 직접 쓴 것이다. 물론 16세기의 마드리갈에는 이같은 단어들이 통상적으로 등장하지만 게수알도의 마드리갈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수알도의 특이한 생애를 주제로 한 오페라가 4편이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1993년에 러시아의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tke: 1934-1998)가 Gesualdo라는 오페라를 남겼으며 1998년에는 독일의 프란츠 훔멜(Franz Hummel: 1939-)이 역시 Gesualdo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남겼다. 그리고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음악 작곡가인 스콧 글래스고(Scott Glasgow)가 1998년에 '베노사의 공자'(The Prince of Venosa)라는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2010년에는 프랑스의 마르크-앙드레 달바비(Marc-Andre Dalbavie: 1961-)이라는 작곡가가 Gesualdo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남겼다. 오페라 이외에도 게수알도에 관한 음악작품이 더러 있다. 러시아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960년에 '게수알도를 위한 기념비'(Monumentum pro Gesualdo)를 작곡했고 이탈리아의 살바토레 쉬아리노(Salvatore Schiarrrino)는 1998년에 Luci mie traditrici(죽음의 꽃)라는 현대음악의 극장작품을 썼다. 미국의 피터 맥스웰 데이비스(Peter Maxwell Davis)는 1972년에 '어둠 속의 수퍼 게수알도'(Tenebrae Super Gesualdo)라는 곡을 작곡했다. 게수알도의 작품은 아마 그에 대한 악명 때문인지 18세기에는 잊혀져 있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 재발견되어 음악계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전위 작곡가인 살바토레 스키아리노가 작곡한 오페라 '죽음의 꽃'(The Deadly Flower: Luci Mie Straditrici)의 한 장면. 공작부인인 말라스피나 역에 니나 타란데크(Nina Tarandek)이다. 200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