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아라벨라’와 피아커
오페라 '아라벨라'에서 만드리카가 아라벨라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는 뮌헨에서 태어났으며 바바리아 지방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처럼 비엔나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와 인연이 깊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부터 1924년까지 5년동안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의 감독을 맡아했기 때문에 비엔나에서 살았다. 비엔나와의 또 다른 인연도 있다. 그의 오페라인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와 ‘아라벨라’(Arabella)가 모두 비엔나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두 오페라에서 차이가 있다면 세팅에서 1백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다는 것이다. ‘장미의 기사’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 치하였던 1740년이 배경이다. ‘아라벨라’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치하였던 1860년이다. ‘장미의 기사’는 당시 귀족사회의 과시하는 듯한 화려함이 담겨 있고 ‘아라벨라’에는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의 피날레 장면. 조피, 옥타비안, 마샬린
오페라 ‘아라벨라’는 마차택시인 피아커(Fiaker)와 관련이 있다. 비엔나의 명물인 피아커무도회(Fiakerball)의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1870년대에 비엔나에서 피아커노래(Fiakerlied)를 불러 대단한 인기를 차지했던 ‘피아커밀리’(Fiakermilli)라는 실제인물을 ‘아라벨라’의 배역으로 삼았다. ‘피아커밀리’는 피아커무도회의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이다. 잠시 ‘아라벨라’의 줄거리를 소개코자 한다. 봘트너(Waldner)백작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걱정이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다. 아라벨라와 츠덴카(Zdenka)이다. 아버지 봘트너 백작은 아름답게 생긴 아라벨라를 부자집에 시집보내어 덕을 볼 생각이다. 둘째 딸 츠덴카는 어려서부터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여 남자 옷을 입혀서 남자처럼 키웠다. 아버지는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서 츠덴카를 사교계에 데뷔시킬 생각이 없다. 아버지는 아라벨라를 시집보낸 후에 츠덴카를 세일로 아무에게나 시집보낼 생각이다. 아버지는 재산이 많은 옛 친구에게 아라벨라의 사진을 보내어 비록 나이는 대단히 많지만 그 친구를 아라벨라와 결혼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옛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조카인 만드리카(Mandryka)가 아라벨라의 사진을 보고 반하여서 청혼하기 위해 비엔나로 온다. 모두 피아커무도회에 참석한다. 재산이 많은 만드리카를 만난 아버지는 기뻐한다. 아라벨라도 만드리카에게 마음이 쏠린다.
아라벨라의 무대
한편, 장교인 마테오가 언니 아라벨라를 사모하여서 청혼코자 한다. 그 마테오를 동생 츠덴카가 좋아한다. 여기에서 츠덴카가 약간의 장난을 친다. 마테오가 언니 아라벨라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안 츠덴카는 언니가 묵고 있는 호텔 방의 열쇠를 마치 아라벨라가 마테오에게 보낸 것처럼 슬쩍 보낸다(그런데 사실은 츠덴카의 방 열쇠이다). 마테오는 아라벨라가 자기를 진짜 좋아해서 자기 방으로 은근히 오라는 것으로 알고 마음이 들뜬다. 마테오가 아라벨라의 방 열쇠를 받은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만드리카는 기분이 좋지 않다. 만드리카는 아라벨라에게 일부러 보이려는 듯 피아커무도회의 마스콧인 피아커밀리라는 아가씨에게 수작을 건넨다. 이 장면을 본 아라벨라는 만드리카를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기분이 상한다. 마테오가 아라벨라의 방인줄 알고 들어갔더니 실은 츠덴카의 방이었다. 마테오는 아라벨라가 이미 만드리카에게 마음을 쏟다고 생각하여 그만 아라벨라를 포기하고 츠덴카에게 마음을 돌린다. 마음이 너그러운 아라벨라는 모두를 용서한다. 그래서 결국 아라벨라와 만드리카가 맺어지고 츠덴카와 마테오가 맺어진다.
오페라 ‘아라벨라’에 등장하는 ‘피아커밀리’는 실제 인물이었다. 원래 이름은 에밀리 투라체크(Emilie Turaczek)이었다. 1848년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초테보르라는 곳에서 태어나 비엔나에 와서 가수가 된 사람이다. 에밀리는 노래를 너무나 잘 불러서 얼마 후에는 비엔나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가수가 되었다. 에밀리는 1874년에 피아커 마부인 데멜과 결혼했다. 그래서 이름도 에밀리 데멜이 되었다. 에밀리는 피아커노래를 잘 불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피아커밀리’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그것이 에밀리의 예명이 되었다. 피아커밀리는 1889년에 4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명한 극작가인 휴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은 피아커밀리의 짧은 생애를 안타까워하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아라벨라’의 대본을 쓰면서 피아커밀리를 영원히 살아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비엔나에서 피아커밀리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피아커밀리가 요들송을 부르는 가수인줄로 알았다. 더구나 피아커밀리는 긴 부츠에 짧은 남자 바지를 입고 사냥꾼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알았다. 오페라 ‘아라벨라’에서 피아커밀리의 역할은 높은 경지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다. 고음을 3옥타브 위의 D까지 내야 했다. 피아커밀리는 실제로 요들송을 부르는 것처럼 두성(頭聲)으로 고음을 냈다. 일반적으로 피아커밀리는 비엔나 민요가수(Wr. Volkssängerin)라고 부른다.
피아커밀리. 피아커 마부인 L. Demel과 결혼하였다.
피아커라는 말은 파리의 호텔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파리의 생 피아크르(St Fiacre) 호텔은 처음으로 마차를 대여해 주는 일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생 피아크르 호텔의 마차택시를 Fiacre cab 이라고 부르다가 간단히 Fiacre라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이것이 비엔나로 와서 Fiaker라는 단어가 되었다. 파리의 생 피아크르 호텔은 어찌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성 피아크르는 원래 7세기경 아일랜드의 성자였다. 산중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때문에 약초와 들풀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다. 산에서 캔 약초로서 병자들을 치료하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성 피아크르는 아무래도 아일랜드에 있으면 은둔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여 프랑스의 시골로 건너왔다. 처음 정착한 곳이 파리 동북부의 세이느 에 마르느(Seine-et-Marne)지방이었다. 성 피아크르가 머물던 마을이 현재의 모(Meaux)이다. 마침 모 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성 파로(St Faro)가 주교로 있었다. 성 피아크르가 살던 마을이 오늘날의 생 피아크르(St Fiacre)이다. 성 피아크르는 이곳에서 여인숙을 지어 여행자들, 특히 순례자들이 쉬어 갈수 있도록 했다. 그후 성 피아크르는 성 파로 주교의 배려로 인적이 드믄 산중에서 은둔하며 지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성자가 오신 사실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성 피아크르를 존경하여 되도록 혼자 지내게 하였지만 병자가 있으면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17세기에 파리에 있는 어떤 호텔 주인은 예전에 성 피아크르가 여인숙을 세우고 여행자들을 도왔다는 것을 상기하고 그를 존경하여서 자기의 호텔 이름을 생 피아크르라고 지었다. 그리하여 생 피아크르 호텔이 생기게 되었고 이어 그 호텔에서 마차를 대여해 주기 시작하자 피아크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피아크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비롯한 것으로 ‘전쟁 왕’이라는 뜻이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병거(마차)를 타고 달리며 적을 무찌르는 사람은 대개 왕이나 영웅이었다. 또 다른 뜻으로는 까마귀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산에서 까마귀가 약초를 잘 찾아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슈테판성당 옆에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피아커의 행렬
17세기에 파리에서 마차택시가 생겨서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비엔나 사람들은 비엔나에서도 마차택시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의 피아크르는 독일어로 피아커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마 유럽에서 비엔나만큼 피아커가 많이 운영되었던 곳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통은 계속 이어져서 현재에도 피아커들이 많이 운영되고 있다. 수백년 동안 피아커 문화에 젖어 있다가 보니 피아커와 관련된 여러 용어들이 생겨나지 않을수 없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커는 말이 끄는 승객용 마차를 말하지만 커피 이름이기도 하다. 피아커 커피는 모카 커피(에스프레소와 비슷한 블랙커피)에 럼이나 코냑을 살짝 넣고 여기에 휘핑 크림을 얹은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 한 잔 마시면 속이 훈훈하기 때문에 피아커들이 즐겨 마셨다(피아커라는 단어는 마차라는 뜻이지만 마부도 의미한다). 물론 요즘에는 웬만한 카페에서 아무나 쉽게 주문할수 있다. 피아커 커피는 아인슈패터 처럼 유리잔에 담아 마신다.
비엔나의 인기 음식 중에는 피아커굴라쉬(Fiakergulasch)가 있다. 고기로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굽거나 삶은 비엔나소시지로 만든 음식이다. 소시지로는 주로 자허 소시지를 사용한다. 여기에 에그 후라이를 얹어 주고 감자 또는 게르킨(오이와 비슷함)을 곁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빵 덤플링이나 삶은 감자를 곁들인다. 쌀쌀한 날씨에 피아커들에게는 안성마춤의 음식이다. 피아커굴라쉬는 헤렌굴라쉬(Herrengulasch)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자들의 굴라쉬’라는 뜻이다. 자허 소시지는 일반 소시지에 비하여 얇지만 길어서 길이가 발 뼘만하다. 피아커굴라쉬는 비교적 간단한 음식이지만 칼로리가 많아서 아침을 굶고 나온 사람들에게 한 끼의 충분한 음식이다. 그래서 아침에 문을 여는 카페나 식당에서는 대개 피아커굴라쉬를 서브한다.
피아커굴라쉬
피아커발(Fiakerball)은 피아커들의 무도회이다. 일찍이 요셉2세 시대인 1787년에 처음 개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787년이면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초연된 해이다. 처음에는 비엔나 성밖에서 열렸으나 해가 지나면서 차츰 비엔나 시내 쪽으로 장소를 옮겨 왔다. 그래서 결국 링슈라쎄에 있는 우아한 블루멘젤렌(Blumensälen: Flower Halls) 식당에 정착하였다. 피아커무도회는 매년 부활절 전의 재의 화요일(Ash Wednesday)에 열린다. 피아커무도회는 오늘날 다른 무도회에 밀려서 관심을 덜 받고 있지만 188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귀족들도 서로 오려고 했을 정도였다. 피아커무도회의 하이라이트는 음악이다. 왈츠, 폴카, 노래, 행진곡 등등이 연주되었으며 특별히 새로 작곡된 곡들이 선을 보이기도 했다.
비엔나의 피아커
피아커(마부)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피아커리트(Fiakerlied)라고 부른다. 비엔나 고유의 전통노래와 흡사하지만 좀 더 멜랑콜리하다. 피아커를 타고 반시간쯤 비엔나 구시가지 일대를 구경삼아 다니노라면 피아커 마부가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해서 자청해서 노래를 불러주는 경우도 있다. 피아커리트이다. 피아커노래는 피아커들의 속어나 전문용어들이 들어가 있어서 어떤 때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피아커들은 빈(Wien)은 베아나(Weana)라고 부른다. 피아커호프는 대형 호텔이 아니라 마치 마차의 좌석처럼 조용하고 아늑하며 주인이 친절하여 가족과 같은 민박여관을 말한다. 주로 티롤지방에 있는 전통양식의 가정집을 여관으로 꾸민 집들을 피아커호프라고 부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난 곳인 바바리아의 가르미슈-파르켄키르헤에 있는 피아커호프는 대표적인 피아커호프 여관이다.
가르미슈-파르켄키르헤의 피아커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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