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러시아

미치슬라브 봐인버그(Mieczyslaw Weinberg)

정준극 2011. 6. 6. 10:12

미치슬라브 봐인버그(Mieczyslaw Weinberg)

 

미치슬라브 봐인버그

 

미치슬라브 봐인버그(Mieczyslaw Weinberg: Moisey Vainberg: Moishe Samuilovich Vaynberg: Mieczylaw Wajnberg: 1919-1996)는 폴란드-유태계의 소련 작곡가이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1939년 이래 소련에 가서 살았으며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와중에서 온 가족을 잃은 사람이다. 그는22개의 교향곡과 17개의 현악4중주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에 이어 소련의 세 번째 위대한 작곡가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름의 스펠링을 놓고 여러 논란이 있다. 폴란드어로서는 Mieczyslaw Wajnberg이다. 소련에서는 아직도 Moisey Samuilovoch Vaynberg라고 쓴다. 바르샤바의 이디쉬극장에서는 그의 작품을 연주할 때에 Moishe Weinberg라고 쓴다. Moishe는 소련어의 Moisey와 같은 표현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폴란드어의 애칭형으로 Metek 라고 부른다.

 

봐인버그(또는 베인버그: 웨인버그)는 1919년 바르샤바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슈밀(Shmil: Szmuel 또는 Samuil Moiseyevich)봐인버그는 바르샤바 이디쉬극장 스칼라에서 처음에느 바이올리니스로, 나중에는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동한 사람이다. 이때에 장래의 위대한 작곡가인 미치슬라브는 이미 10세 때에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어머니 소니아(Sonia: 1888-1943)는 바르샤바의 이디쉬극장에서 배우로 활약하던 사람이었다. 미치슬라브의 친척들은 이미 1903년 몰다비아의 수도인 베싸라비아(Bessarabia)에서의 유태인 학살 때에 희생당한 일이 있다. 그같은 사건은 미치슬라브의 가족들이 직접 핍박을 당한 전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미치슬라브는 12살 때에 바르샤바음악원(현재는 프레데릭 쇼팽음악대학교)에 들어가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는 피아노 학생이었지만 작곡에도 재능을 보여 이미 학생 때에 현악4중주를 작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다가 1939년 폴란드가 나치의 침공을 받자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하기 위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그의 부모와 여동생 에스터는 바르샤바에 남아 있다고 나치가 바르샤바를 점령하자 게토로 끌려갔고 끝내는 트라브니키(Trawniki)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소련으로 간 미치슬라브는 민스크에 정착하여 그곳 음악원에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독일이 소련 영토를 침공하는 전쟁이 터지자 그는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로 소개되었다. 그는 타슈켄트에서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한 유태인 배우의 딸인 나탈리아 보브시(Natalia Vovsi)와 결혼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만났다. 쇼스타코비치는 미치슬라브의 재능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평생 친구로서 지내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를 만난 것은 젊은 미치슬라브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다. 훗날 미치슬라브는 ‘쇼스타코비치를 만난 것은 내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과 같은 귀중한 사건이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지극한 권유에 따라 1943년 모스크바로 옮겼다.

 

소련 당국은 1948년에 이른바 츠다노브시키나(Zhdanovshchina)에도 금지조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다. 츠다노브시키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인 안드레이 츠다노프가 내놓은 독트린으로서 소련의 모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은 당의 노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치슬라브는 당의 음악활동으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하였다. 즉, 아무리 작곡활동을 해도 연주할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미치슬라브는 극장이나 서커스를 위해서 음악을 작곡하여 겨우 연명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에는 유태인 부르조아 국수주의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미치슬라브가 체포된 것은 실은 그의 장인이 1952년에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주로 유태인 의사들의 스탈린 암살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구실로 체포된것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은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조작된 사건이었다는 것이 판명된바 있다. 아무튼 미치슬라브가 체포되자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미치슬라브의 무죄를 주장하여 석방은 되었지만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아무런 활동도 할수 없었다. 미치슬라브에 대한 제재는 스탈린의 사후 공식적으로 복구되었다.

 

이후 미치슬라브는 모스크바에서 계속 살았다. 작곡을 했고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도 하였다. 쇼스타코비치와 미치슬라브는 이웃에 살았다. 그래서 거의 매일 같이 서로 만나 음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지냈다. 그때에 미치슬라브 봐인버그는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를 포함한 러시아의 유명 연주가들과 교류를 하며 이들을 통하여 자기의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 미치슬라브 봐인버그는 말년에 장내염증인 크론병(Crohn's disease)에 걸려 3년동안 집에 칩거하며 고통을 받았다. 물론 작곡은 계속하였다. 그는 1996년 1월 3일 숨을 거두기 몇 달 전에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미치슬라브 봐인버그는 22개의 교향곡, 실내교향곡과 소교향곡을 포함한 오케스트라 작품, 17개의 현악4중주곡, 8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24개의 첼로를 위한 전주족, 6개의 첼로 소나타, 6개의 피아노 소나타, 기타 수많은 기악곡을 작곡했으며 또한 40편에 이르는 영화음악을 작곡하였고 오페라도 작곡했다. 오페라는 7편을 작곡했다. 2006년에 초연된 ‘승객’(Passazhirka)은 대표작이다. 최근 그의 피아노5중주곡, 피아노 트리오, 첼로 작품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으며 자주 연주되고 있다.

 

[미치슬라브 봐인버그의 오페라 수첩]

● 승객(The Passenger. 1967-68)  ● '마돈나와 병사'(The Madonna and the Soldier. 1970)  ● '달타냥의 사랑'(The Love of d'Artagnan. 1971) ● '축하'(Congratulations!. 1975) ● '레이디 마그네시아'(Lady Magnesia. 1975. 버나스 쇼 원작) ● '초상화'(The Portrait. 1980. 고골 원작) ● '바보'(The Idiot. 1985. 도스토예브스키 원작)

 

오페라 '승객'의 한 장면. 아우슈비츠에서 SS 대원으로서 유태인 수감자들을 감독하던 여자와 수감자였던 유태인 여인의 전후 브라질로 가는 여객선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그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