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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트라베스티(Travesti)

정준극 2011. 7. 4. 10:57

오페라의 트라베스티(Travesti) - 바지역할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과 케루비노. 케루비노는 '바지 역할'이다.

     

이탈리아어의 트라베스티(Travesti: 영어의 Travesty)는' 가장하다', '모방하다'는 뜻이다. 그런 용어가 오페라나 연극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복장을 입고 남자의 역할을 맡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되었다. 오페라에서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역할을 맡도록 하던 시기에 남자들의 바지는 무릎까지 오는 타이트한 것이었다. 그런 바지를 트라베스티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런 바지를 입고 등장하는 여자들을 트라베스티라고 불렀다. 그런 바지를 영어로는 브리치(Breech 또는 Britch)라고 하며 독일어로는 호제(Hose)라고 부른다. 그래서 '브리치 역할'(Breeches role), '팬츠 역할'(Pants role), '트라우저 역할'(Trouser role), 독일어로 '호젠롤레'(Hosenrolle)라고 하면 모두 여자가 바지를 입고 남자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오페라에서 반드시 남자 바지를 입지 않더라도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하면 모두 '바지 역할'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경우에 '바지 역할'은 젊은 남자가 대상이며 메조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가 맡는다. 그렇게 나오면 관중들은 비록 그가 여자라고 해도 모른척하고 남자로 생각하고 관람한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옥타비안은 남자이지만 처음부터 여자가 맡는다. 모니카 그룹(Monica Groop)

   

여자로 나왔다가 잠시 남자 옷으로 바꾸어 입는 역할은 '바지 역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휘델리오'(Fidelio)에서 주인공인 레오노레가 남장을 하고 휘델리오로 등장하지만 아무리 남장을 했어도 남자로 보아주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베르디의 '리골레토'(Regoletto)에서 질다(Gilda)가 남장을 하고 나오는 장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질다가 '바지역할'을 맡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페라에서 '바지 역할'의 대표적인 경우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케루비노(Cherubino),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에서 옥타비안(Octavian), 글룩의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에서 오르페우스(Orpheus: 오르페오)이다. 어떤 오페라가 처음 공연되었을 때에 소프라노가 남자 역할을 맡도록 했다고 해도 오늘날에는 소프라노 대신에 테너가 맡도록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샤브리에의 '레뚜알'(L'etoile)에서 라줄리(Lazuli)는 소프라노가 맡도록 되어 있지만 오늘날에는 통상 테너가 맡는다.

 

오페라 '휘델리오'에서는 레오노레가 남장을 하고 휘델리오로 가장하지만 '바지 역할'은 아니다.

 

연극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고 나와도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또한 남자가 맡아야 하는 역할을 여자가 맡는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피터 팬'이다. 피터 팬은 소년이지만 주로 소녀가 맡는다. 제작자에 따라 남자 역할을 여자가 맡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유명한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는 어느때 햄릿을 맡은 일이 있다. 아마도 제작자가 사라 베른하르트의 인기를 생각해서 남자로 무대에 내세워도 인기 만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연극에서 '바지 역할'이라고 하면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남자인척 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오페라에서는 남자 역할을 여자가 처음부터 남자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것이 오페라이다.

 

사라 베른하르트가 '햄릿'을 맡은 일이 있다.

 

[오페라에서의 '바지 역할'의 변천]

 

역사적으로 볼때 '바지 역할'을 하는 경우는 관중들의 취향에 따라서 변해왔다. 여자가 무대에 서는 것이 희귀한 시절에는 관중들의 눈요기를 위해서라도 여자들이 '바지 역할'을 많이 맡았다. 관중들은 비록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지만 짧은 바지를 입은 여자들의 각선미라도 볼수 있어서 흥미로워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여성의 '바지 역할'이 별다른 흥미꺼리가 되지 않자 카스트라토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카스트라토는 어린 소년들이 변성기가 되기 전에 나중에 아빠가 되는 것을 포기토록 하여 여성과 같은 고음을 유지토록 한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의 음성은 여성처럼 높으면서도 힘차고 강력하여 환영을 받았다. 특히 여성 관중들의 환영은 열광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남성 카스트라토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자 작곡가들은 카스트라토 대신에 메조소프라노를 등장시켜 영웅적인 남성 역할을 맡도로 했다. 바로크와 일부 벨칸토 시대의 주인공들이 그러했다. 예를 들면 탄크레디(Tancredi)이다. 그 시기에 메조소프라노인 리에타 알보니(Marietta Alboni)와 로사문다 피사로니(Rosamunda Pisaroni)는 특별히 남성 역할에서 뛰어났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와서는 카스트라토가 맡았던 역할을 남성 테너가 맡도록 하는 경향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카운터 테너를 육성하고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다.

 

탄크레디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매릴린 혼(Marilyn Horne)

 

오페라의 배역을 정할 때에 메조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를 기용해야 할지, 또는 카운터 테너를 기용해야 할지는 어려운 문제였다. 예를 들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서 오를로프스키 공자의 경우이다. 메조소프라노를 기용하면 오를로프스키 공자가 여자처럼 보여서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목소리는 소년과 같기 때문에 공자로서의 풍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카운터 테너를 기용하면 남자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목소리가 여자와 같아서 바람직하지 않게 된다. 더구나 노래가 아닌 대사를 할 때에는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러므로 '바지 역할'의 여성을 기용해야 할지, 또는 카운터 테너를 등장시켜야 할지는 경우에 따라 결정 되어야 할 것이다.

 

'박쥐'에서 오를로프스키 공자(가운데)는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요즘에는 카운터 테너가 맡기도 한다.

     

요즘에는 스커트 역할(Skirt role)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것이다. 주로 코믹한 오페라에서 그렇다. 못생긴 이복언니 또는 노파의 경우에 그렇다. 하지만 그런 역할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는 브리튼의 컬류 리버(Curlew River)에서 매드우먼(Madwoman: 미친여자)이다.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녀는 메조소프라노가 맡도록 되어 있지만 요즘에는 테너가 더 자주 맡고 있다. 이 경우에 테너는 한 옥타브 아래의 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오빠인 헨젤, 정령인 샌드맨과 듀맨(Dewman)은 명칭에서 볼수 있듯이 남자를 말하지만 전통적으로 여성이 맡고 있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바지입은 사람)은 메조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가 맡는다. 마녀는 전에는 메조소프라노나 콘트랄토가 맡았지만 요즘에는 테너(또는 카운터 테너)가 맡는 경우가 있다.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바지역할은 '가면무도회'에서 오스카르의 경우뿐이다. 구스타브 3세의 비서로 나오는 오스카르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맡는다. 현재까지의 오페라 중에서 바지역할이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피가로의 결혼'에서 케루비노와 '장미의 기사'에서 옥타비안을 생각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바지역할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에 등장하는 오를로프스키 공자는 일반적으로 메조소프라노 맡지만 테너가 맡을 수도 있다. 베토벤의 '휘델리오'에서 레오노레는 남장을 한 소프라노이지만 바지역할이라고 간주하지는 않는다. 베르디의 '운명의 힘'에서 레오노라도 한때 남장을 하고 다니지만 바지역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군복을 입은 케루비노. 원래 남자역할이지만 일반적으로 메조소프라노 맡는다. 대표적인 바지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