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씨는 누구인가?
씨씨는 누구인가? 공식 직함은 두 가지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비(Empress)이면서 헝가리 왕의 왕비(Koenigin)라는 두 가지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인으로서 씨씨는 누구인가? 프란츠 요셉 황제의 왕비이며,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둔 어머니이다 (첫째 딸은 세살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씨씨의 시어머니는 씨씨의 이모였다.
씨씨의 아버지: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과 어머니 루도비카 대공비
씨씨 서거 1백주년
1998년, 오스트리아 전국은 씨씨(Sissi)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거리마다 씨씨의 초상화가 물결을 이루었으며 씨씨에 대한 연극, 뮤지컬, 전시회, 영화 리바이벌, 책자 발간 등 할수 있는 한의 기념행사가 줄을 이었다. 지금까지 씨씨를 그린 영화는 세편이나 있었다. 모두 195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그 중에서 세기의 미인 로미 슈나이더(Romy Schneider)가 씨씨 역할을 했던 ‘영원한 내 사랑 씨씨’ (Sissi, Forever my Love)가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영화는 씨씨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으로 재개봉되었다. 극장 앞은 인산인해였다.
로미 슈나이더(Romy Schneider)가 씨씨 역을 맡았던 영화
프란츠 요셉의 족보
먼저 씨씨의 남편인 프란츠 요셉 황제의 족보부터 살펴보는 일이 순서일 것이다. 너무 멀리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겠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로부터 시작해 보자.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고 전성기였다. 서쪽으로는 독일의 일부, 남쪽으로는 스위스 일부와 이탈리아 북부, 동쪽으로는 헝가리,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폴랜드 일부가 모두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였다. 잘 아는 대로 유럽 국가들은 왕실 간의 결혼으로 서로 인척을 이루며 지냈다.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 여러 나라와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들 들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한 경우는 대표적이다. 공연히 얘기가 곁길로 들어갔음을 사죄하며 다시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프란츠 요셉까지의 족보를 관찰해 보도록 하자.
마리아 테레자에서 아들 요셉 2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를 무려 14명이나 두었다(어떤 기록에는 15명). 그 중에서 첫째 아들 요셉 2세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국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 모차르트는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로부터 요셉2세 기간중에 비엔나에서 활동하였음을 부기한다. 요셉 2세 황제는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인 레오폴드가 형님인 요셉 2세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그 레오폴드는 일찍이 스페인 공주 마리아와 결혼하였는바 다행하게도 몇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음 황제 자리는 당연히 레오폴드의 큰 아들 프란츠 2세였다. 유럽의 왕실 족보를 슬며시 들여다보면 같은 이름이나 비슷한 이름 들이 많아서 상당히 혼잡하다. 어쩔 수 없다. ‘그저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리아 테레자의 둘째 아들로서 형 요셉 2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레오폴드
요셉 2세에서 프란츠 2세
레오폴드의 큰 아들로서 새로 황제가 된 프란츠 2세는 공식적으로 2남 4녀를 두었다. 큰 아들이 페르디난드였다. 나중에 아버지 프란츠 2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그 또한 무슨 영문인지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인 프란츠 찰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프란츠 찰스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하였다. 결국 다음 황제 자리는 프란츠 찰스의 아들인 청년 프란츠 요셉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 프란츠 요셉이 씨씨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프란츠 요셉의 아버지인 프란츠 찰스가 '황제 자리에 뜻이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형이 세상을 떠난 후 황제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 온 때에는 이미 너무 늙어서 황제 자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던 처지였다. 프란츠 찰스의 형인 페르디난드 황제는 82세라는 늙은 나이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생에게 황제 자리가 온 때에는 아무리 동생이었지만 나이가 76세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입장에서 황제고 뭐고 귀찮았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동안 황제의 친동생으로서 모든 영화는 누렸으니 황제가 된들 별로 달라질게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악성 베토벤은 바로 요셉 2세 시대에 비엔나에서 활동하였다.
프란츠 2세
그건 그렇고, 동생인 프란츠 찰스가 누구하고 결혼 했는가 하니 독일 바바리아 국왕 막시밀리안 요셉의 셋째 딸 조피(Sophie)와 결혼했다. 막시밀리안 바바리아 국왕은 1남 4녀를 두었다. 큰 아들 루드비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드비히 1세 바바리아 국왕이 되었고 둘째 딸은 프로시아 국왕과 결혼하였다. 셋째 딸 조피가 바로 앞서서 말한 대로 중매가 잘 들어와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별 영양가도 없는 둘째 아들 프란츠 찰스와 결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나중에 형님 황제가 후사가 없이 요단강을 건너자 영양가 없던 이 찰스 양반이 바로 다음 황제 후보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서 말한 대로 형님 황제가 너무 늙어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기의 인생도 얼마 후면 종 치게 될 운명이서서 미안하지만 황제 자리에는 취미가 없다는 고상한 선언과 함께 자기 아들을 다음 황제로 적극 추천하였으니 바로 그가 바로 씨씨의 남편이 되는 프란츠 요셉이다. 일설에 의하면 프란츠 찰스라는 양반은 좀 멍청해서 도저히 제국의 황제에 오를 만한 위인이 못되므로 측근에서, 특히 독일 출신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부인(조피)이 적극 만류하였다고 한다. 자기 아들 프란츠 요셉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황대비 마마인 자기가 궁중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지도 모른다.
프란츠 2세에서 페르디난드
여기서 잠시 프란츠 요셉의 할아버지인 프란츠 2세의 자녀들에 대한 얘기를 다시한번 짚어 보고자 한다. 프란츠 2세 황제에게는 2남 4녀가 있었다. 장자 페르디난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이 죽었고 이에 동생인 프란츠 찰스가 당연히 다음 황제 자리에 올라야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약간 멍청하기도 했지만 너무 늙어서 자기 아들인 프란츠 요셉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기로 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머지 네명의 딸에 대한 얘기를 해 보자면, 큰 딸 마리 루이제(Marie Louise)는 나폴레옹 1세 황제와 결혼하였고, 둘째 딸 레오폴디네(Leopoldine)는 브라질 황제와 결혼하였으며 넷째 딸 카롤리네(Caroline)는 독일 작소니 국왕과 결혼하였다. 대단한 집안이다.
페르디난트 1세 황제
페르디난드에서 조카 프란츠 요셉 1세
다시 프란츠 찰스의 아들 딸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큰 아들 프란츠 요셉이 삼촌인 페르디난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니 바로 바바리아의 엘리자베스, 즉 우리의 주인공 씨씨와 결혼한 인물이다. 프란츠 요셉의 둘째 동생 찰스 루드비히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서 총탄에 맞아 죽는 바람에 1차 세계 대전이 촉발되었으니 말이다. 프란츠 요셉의 셋째 동생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였다. 그 당시 저 멀리 멕시코는 바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왕국 식민지였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운명도 참으로 비극이어서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총살을 당했다. 프란츠 요셉은 나중에 프란츠 요셉1세로 불리웠다.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쓰는 프란츠 요셉1세 시대에 활동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젊은 시절)
프란츠 요셉 1세에서 조카의 아들 칼에게
씨씨와 프란츠 요셉은 1남 3녀를 두었다. 하나뿐인 아들은 루돌프 황태자였다. 다음 황제 자리는 황태자인 루돌프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루돌프 황태자가 마리아라고 하는 어떤 몰락한 귀족 집안의 아가씨와 동반자살을 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프란츠 요셉의 동생인 찰스 루드비히의 큰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드를 새로운 황태자로서 책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는사라예보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게 되어 할 수 없이 다음 황태자로서 피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드의 동생의 아들, 즉 조카인 카를이 황태자로 임명되었고 1916년부터 1918년까지 2년 동안 황제 노릇을 하다가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공화제로 전환되는 바람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막강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유럽의 역사는 바로 합스부르크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도 할수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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