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기의 왕비 씨씨

아우구스틴교회에서의 결혼식

정준극 2011. 11. 25. 04:12

화려한 결혼식

 

바바리아로부터 엘리자베트의 비엔나 입성은 배를 타고 들어오는 것으로 준비 되었다. 1854년 4월 20일, 엘리자베트는 뮌헨의 정든 집을 떠나 린츠로 향하였다. 린츠에서 왕궁 사신의 영접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4월 22일 해군 제독의 안내를 받아 배를 타고 비엔나에 도착하였다. 도나우 강변의 누쓰도르프 선창에는 커다란 환영 건물이 세워졌다. 황제가 직접 마중하였다. 구름같이 몰려든 시민들은 환호 소리는 멀리 칼렌버그까지 메아리쳤다. 호프부르크 궁전에 여장을 푼 엘리자베트는 이틀 후인 4월 24일 호프부르크 궁전에 부속되어 있는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결혼예식을 올렸다. 70명의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참가했으며 주례는 요제프 오트마르 폰 라우셔 대주교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이 교회에서 결혼하였으며 나중에 황태자 루돌프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도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비엔나 남쪽 합스부르크의 별장인 락센부르크 성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나중에 씨씨는 락센부르크의 끝없이 펼쳐진 숲길에서 승마를 즐겨했다. 락센부르크성에서는 기젤라 공주, 루돌프 황태자, 그리고 훗날 루돌프 황태자의 딸인 엘리자베트가 태어났다.

 

아우구스틴 교회에서의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스(씨씨)의 결혼식 장면 (판화)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과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은 온 유럽이 떠들썩할 정도로 대단한 축제 분위기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종황제 시절로서 대원군과 민비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그런 결혼식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비엔나 시민들은 아름다운 왕비를 보려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황제 만세! 씨씨 만세!’...시민들은 엘리자베트의 애칭을 부르며 환호하였다. 성당에서는 축하의 종이 울렸다. 밤새 축포가 터져 비엔나의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축하 무도회가 호프부르크의 대무도회장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헝가리의 귀족들도 대거 참가하였다. 엘리자베트의 고향 뮌헨, 그리고 황제가 씨씨에게 청혼하였던 바드 이슐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렇게 하여 엘리자베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비가 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

                 

힘겨운 궁정 생활

어린 왕비 엘리자베트에게 이제 자유라는 것은 사라졌다. 모든 것이 왕실의 법도에 따라 철저하게 규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시종 역할을 하는 귀족 부인들은 16세의 어린 새댁 엘리자베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참견하였다. ‘밥을 먹을 때는 이렇게 먹으셔야 하옵니다. 세수는 이 시간에 하셔야 하옵니다. 오후 2시 5분에는 아무개 공작부인을 만나셔야 하옵니다. 공작부인과 얘기 나눌 때에는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옵소서. 침수에는 10시 35분에 드셔야 하옵니다. 화장실에는 우리 시종들과 같이 가셔야 하옵니다.....’등등 실로 개인적인 시간은 한 순간도 없었다. 16세의 어린 왕비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더구나 시어머니 되는 이모 조피의 간섭과 '너의 친정에서는 이렇게 배웠냐?'라면서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일은 한계를 지난 것이었다. 저 멀리 고향 집을 떠나서 비엔나의 어마어마한 궁전에 살아야 하는 씨씨는 점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 귀찮았다. 그래서 간혹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잠옷 차림으로 남편 프란츠 요셉 황제가 신하들과 회의를 하는 장소에 들어와 '여보, 언제 끝나?'라고 말하는 것 등이었다. 이런 엉뚱한 행동들은 결국 시어머니 조피의 마음에 한가지 결심을 하도록 해주었다. '손자 손녀가 생기면 며느리에게 맡길수 없다. 내가 직접 황실의 방식대로 키우겠다'는 결심이었다.

 

씨씨의 시어머니인 조피

 

그래도 신혼 처음에는 남편 프란츠 요셉의 다정한 말이나마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얼굴을 구경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공식적인 연회석상 등에서는 얼굴을 볼수 있었지만 옛날 이슐의 강가에서 만나 웃고 떠들던 시절처럼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다. 대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츠 요셉이 해야 할 공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보다도 젊은 황제 프란츠 요셉으로서 국정에 소홀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시간을 좁혀 놓는 것이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황비의 생활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내가 청혼을 받아 들였단 말인가, 이게 어디 지옥이나 다름없는 생활이지 뭐란 말인가? 아~~~’ 하지만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왕실에 적응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엘리자베트 왕비

 

첫 딸과의 생이별

결혼한 이듬해, 17세의 씨씨는 첫 딸을 낳았다. 시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조피(Sophie)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씨씨의 손에 이 아이를 기르면 안 된다고 생각을 실현키로 했다. 제 멋대로 기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 조피는 씨씨와 협의도 없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딸 조피를 데려갔다. 씨씨는 딸을 돌려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시어머니는 완강하였다. 황실의 법도대로 기르려면 씨씨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씨씨의 실망은 무척 컸다. 실망이라기보다는 분노였다. 이로부터 씨씨와 시어머니와의 사이는 냉전으로 일관했다. 첫 딸 조피는 태어 난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씨씨는 이 모든 것이 시어머니의 그 못된 주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소연 할 데가 없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벳 황비의 딸인 기젤라, 그리고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

 

큰 딸 조피가 태어난 이듬해 씨씨는 연년생으로 둘째 딸 기젤라를 낳았다. 기젤라는 오래오래 살았다. 바바리아 왕국의 레오폴드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76세까지 살았다. 둘째 딸 기젤라가 태어 난지 2년후, 씨씨는 기다리던 왕자를 생산하였다. 루돌프였다. 그리고 10년 후, 셋째 딸 발레리를 낳았다. 셋째 딸도 오래 살아서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씨씨의 둘째 딸 기젤라(왼쪽)과 셋째 딸 마리-발레리(오른쪽). 마리-발레리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를 많이 닮았다.

 

지금까지 씨씨의 결혼과 그 후의 생활에 대하여 기록에 남아 있는대로 설명하였거니와 사실을 더 심각하고 더 힘든 결혼생활이었다. 페터 파렌찬(Peter Parenzan)과 브리기테 코르빈(Brigitte Korvin)이라는 쓴 쇤브룬 궁전 소개서에 씨씨에 대한 설명이 있기에 옮겨본다. 아마도 씨씨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아닌가 싶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의 약혼은 1853년 8월 19일에 바드 이슐에서 진행되었다. 프란츠 요셉이 씨씨에게 청혼한지 이틀 후이다. 씨씨는 그로부터 약 8개월 동안 결혼 준비를 했다. 약혼으로부터 결혼까지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씨씨가 16세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혼식의 시작은 1853년 4월 9일부터 였다. 씨씨가 바바리아의 집을 떠나 비엔나로 향한 날로부터 사실상 결혼식 분위기는 진행되었던 것이다. 씨씨는 친정 집에서 8개월 동안 지내면서 장래의 황비로서 기본교육을 받았다.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쌓아야 했다. 프랑스어도 공부했다. 당시 비엔나의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부가 가지고 가야하는 혼수도 준비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공주들 같으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와 결혼하는 것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감미롭고 환상적인 것이겠지만 아직도 소녀적인 감상에 젖어 있는 씨씨에게는 모든 것이 두려웠고 앞으로의 일이 악몽으로 생각되었다. 분면한 것은 씨씨는 궁정 생활에 익숙해 있는 다른 아가씨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씨씨도 그렇게 생각하고 어서 궁정생활에 익숙해야 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씨씨에게 '걱정되는 일은 없느냐? 도와 줄 일은 없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씨씨는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 4월 24일 하루 전에 비엔나에 도착했다(어느 자료에는 4월 22일 도착했다고 되어 있다). 씨씨는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가장 특별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씨씨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마차를 타고 호프부르크 궁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씨씨가 여행을 하며 오는 내내 마찬 안에서 울기만 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씨씨가 감정에 휩싸여서 눈물을 흘렸다고 설명했지만 사실상 씨씨는 자기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여서 울음을 멈출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씨씨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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