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소년합창단

5백년의 연륜과 김보미

정준극 2013. 4. 6. 07:09

Wiener Sängerknaben

 

천사의 소리 비엔나소년합창단(The Vienna Boys' Choir)

 

합스부르크에서 시작된 5백년의 연륜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연습. 아우가르텐 연습실. 어, 이젠 흑인도 있네.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이름정도는 알고 있다. 비엔나소년합창단(Wiener Sängerknaben)은 비엔나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최우수 수출상품 중의 하나이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년합창단이다. 가장 오랜 역사의 소년합창단일뿐만 아니라 가장 훌륭한 음악을 들려주는 소년합창단이기 때문이다. 과연, 비엔나소년합창단은 세계 각국으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연주회를 열어 국위선양은 물론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몇번이나 와서 공연을 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이만한 효자 수출상품을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우리는 비엔나소년합창단이 하나인줄 알지만 실은 4개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하나 또는 두 팀은 본부인 비엔나에 머물러 있고 다른 두 세 팀은 그저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회를 갖는다. 안 간데가 없을 정도이다. 저 북방 알라스카로부터 태평양의 산호섬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찾아가서 노래를 불렀다. 아시아에서는 아마 일본에 제일 많이 갔을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중에 나치와 한 통속이었기 때문에 당시 나치의 한 가족인 오스트리아와도 마음을 통하며 지냈고 그런 감정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인지 서로들 좋아한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오스트리아-일본의 친선우호를 다지는 매개체이다. 공연히 일본 얘기로 들어갔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본래의 주제인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얘기로 돌아가면, 비엔나소년합창단은 4개의 별개 팀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는데 각 팀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들의 이름을 붙였다. 즉, 브루크너합창단, 하이든합창단, 모차르트합창단, 슈베르트합창단이다. 이들 4개 합창단은 1년에 토탈 약 3백회의 연주를 하며 청중은 50만명 이상이나 된다. 각 합창단은 1년에 9-11 주의 순방연주회를 갖는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비엔나악우회의 황금홀에서 열린 말러 교향곡 제9번의 연주회에도 출연하였다. 오르간 아랫쪽 하얀 옷을 입은 출연자들이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단원들이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역사는 5백년이 넘는다. 세계에서 그만한 역사를 지닌 합창단, 특히 소년합창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1998년에 5백주년을 기념하였으며 2013년으로서는 창설 515주년을 기록한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일찍이 1498년 7월 7일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가 설립했다. 1498년이라고하면 우리나라는 연산군 시대로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던 해이다. 당시 인스부르크에 있다가 비엔나로 궁정을 옮긴 막시밀리안 황제는 소년합창단을 구성하여 호프카펠레(Hofkapelle: 궁정오케스트라)의 한 팀으로 활동하도록 했다. 막시밀리안 1세 때에는 합창단의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합창단을 베이스 2명과 보이스 소프라노 6명으로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황제가 별것을 다 지시했다. 그후 합창단의 인원은 조금 더 보강되어 14명에서 20명까지 늘어났다. 합창단의 중심되는 역할은 궁정교회의 미사에서 성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통이 남아서인지 지금도 비엔나소년합창단은 매주일마다 호프부르크 궁전에 있는 궁정교회(부르크카펠레 또는 호프카펠레)에서 진행되는 미사에 참가하여 성가를 부른다.

 

비엔나의 슈테판대성당에서 노래하는 비엔나소년합창단

                                       

막시밀리안(1459-1519) 황제가 교회 성가대에 어린 소년들을 포함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은 순전히 그의 부인인 부르군디의 마리아의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교회음악을 개혁코자 하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의도도 반영되었다고도 본다. 부르군디는 오늘날 프랑스 북부과 네덜란드 일대에 있었던 왕국이었다. 부르군디의 마리아(1457-1482)는 아버지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자녀로서 나라를 물려 받았다. 그러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였다.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황제는 부르군디의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서 일순간에 부르군디까지 관할하게 되어 권세와 부유함이 더욱 높아졌다. 브루군디의 마리아가 얼마나 재산이 많았느냐하면 그의 별명이 '부자 마리아'(Maria the Rich)인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부르군디에 있을 때에 부르군디의 궁전에서는 이미 소년들로 합창단을 구성하여 무슨 행사 때마다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것을 설명코자 함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의 영향을 받은 막시밀리안 황제도 기왕이면 비엔나에서도 소년들을 합창단원으로 기용하여 궁정의 중요한 행사 때 또는 교회에서의 미사에서 노래를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궁정소년합창단(호프쟁거크나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전신)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찬란한 왕관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보석이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와 브루군디의 마리아(메리)

                       

비엔나소년합창단은 5백년이 넘는 연륜을 기록하면서 수많은 뛰어난 음악인들을 배출하였다. 작곡가로서는 야코부스 갈루스(Jacobus Gallus), 프란츠 슈베르트, 칼 첼러(Karl Zeller) 등이 비엔나소년합창단 출신이다. 위대한 지휘자가 된 인물로는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펠릭스 모틀(Felix Mottl), 게오르그 틴트너(Georg Tintner),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등이 있다. 성악가로 진출한 단원들은 헤아릴수 없이 많아서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한마디만 더 한다면 하이든 형제(요제프, 미하엘)가 슈테판성당의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지휘자였던 게오르그 로이터(Georg Reuter)가 궁정소년합창단(비엔나소년합창단의 전신)의 지휘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혹 호프부르크 궁전에 가서 노래를 부른일도 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심할 것 같아서 한마디 곁들였다. 그건 그렇고 지나간 수세기 동안 비엔나소년합창단을 위해서 일을 했던 작곡가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대표적인 이름들만 내세워보면 프랑스 플레미쉬 작곡가인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 1450-1517),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파울 호프하이머(Paul Hofhaimer: 1459-1537), 보헤미아 출신의 하인리히 이그나즈 프란츠 비버(Heinrich Ignaz Franz Biber: 1644-1704), 오스트리아의 요한 요제프 푹스(Johann Joseph Fux: 1660-1741),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인 안토니오 칼다라(Antonio Caldara: 1670-1736), 개혁오페라를 주도한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1714-1787),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7) 등이다.

 

호프부르크의 부르크카펠레의 주일 미사에서 노래하는 비엔나소년합창단

 

비엔나소년합창단은 초기에 궁정소년합창단(호프쟁거크나벤: Hofsängerknaben)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18년 1차 대전의 여파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탄생하자 호프카펠레와 호프쟁거크나벤은 해체되었다. 소년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한때 호프카펠레의 책임을 맡았던 요제프 슈니트(Josef Schnitt) 신부가 1920년 초에 합창단을 재편성하고 명칭도 비너 쟁거크나벤(Wiener Sängerknaben: 비엔나소년합창단)으로 바꾸고는 새출발을 모색하였다. 요제프 슈니트 신부는 당국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개인 경비를 털어서 소년합창단을 운영했다. 그리고 소년합창단의 유니폼도 새로 바꾸었다. 과거에는 제국 사관생도의 복장에 단검을 차도록 했었다. 요제프 슈니트 신부는 흰색과 파란색의 세일러 복장을 택하였다. 사방에 바다라고는 찾아볼래야 볼수 없는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세일러의 복장이냐고 말하겠지만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저 멀리 아드리아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아드리하해의 트리에스테(현재의 이탈리아)에 상당한 규모의 해군기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일러복은 당시 비엔나 상류층 아이들의 표준복장이었다. 오늘날 신입 단원에게 전통의 세일러복을 수여하는 것은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중요한 의식으로 되어 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은 세일러복 상의의 가슴에 오스트리아 엠블렘을 부착한다. 그런 전통은 미국의 월트 디즈니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월트 디즈니는 1961년에 Almost Angel이라는 비엔나소년합창단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했다. 아우가르텐 궁전에서 촬영했다. 그때 디즈니는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오스트리아의 국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단원들의 유니폼에 오스트리아의 엠블렘을 붙이자고 제안하였다.

 

비엔나악우회의 황금홀에서 노래하는 비엔나소년합창단

 

비엔나소년합창단이 비엔나의 아우가르텐 궁전에 본부를 정한 것은 1948년의 일이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단원들의 수가 100 명에 이르게 되자 일반 아이들과 마찬가지의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원들에 대한 정규적인 학교 교육은 실상 오래전부터 실시되어 온 것이지만 이번에는 아우가르텐 궁전에 유치원으로부터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단원들의 정상 교육에 치중키로 했다. 물론, 단원들은 막대한 시간을 순회연주에 기여해야 하며 또한 연주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해도 본부에서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하며 여가시간을 갖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므로 그런 모든 점을 감안하여 커리큘럼을 작성하고 있다. 그러면 단원들은 어떻게 선발하는가? 기본적으로 자원하면 검토하여 선발한다. 초기에는 10세에서 14세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했다. 오늘날에는 7세 또는 8세에 예비단원으로서 준비과정을 거치며 9세가 되면 음악적 테스트를 통하여 후보자를 선정하고 이어 1년간의 훈련을 통하여 최종 단원으로 선발된다. 마지막 1년의 기간 중에는 노래를 훌륭하게 부를줄 알아야 하며 아울러 다른 단원들과 공동생활을 충분히 수행할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다가 변성기가 되어 더 이상 소프라노와 알토의 소리를 내기가 어렵게 되면 나가야 한다. 다만, 희망자에 한하여 합창단원으로는 활동하지 않지만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교육은 계속 받을수 있다. 그러자면 아우가르텐에 계속 머무를수 있다. 단원들의 교육과정 중에는 외국어가 필수이며 악기도 하나 이상은 연주할수 있는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드라마와 무대에 대한 훈련도 받는다. 단원들은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리허설을 갖는다. 가족과의 면회는 주말에만 가능하다. 아우가르텐은 학생들을 위해 스케이트장과 수영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여름에는 티롤의 알프스 산록에 있는 학교에 가서 지낸다.

 

아우가르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비엔나소년합창단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단원이 되면 연주여행을 많이 다녀야 한다. 세계의 곳곳을 여행할수 있다. 그것도 하나의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처음으로 해외 연주회를 가진 것은 1932년이었다. 요제프 슈니트 신부의 지도로 유럽의 몇몇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진 것이었다. 어느때는 장기간의 연주여행을 떠날 경우도 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1932년 이래 미국에만 50여회의 연주여행을 갔다. 아무 때든지 체크해 보면 네 합창단 중에서 두 합창단은 항상 연주여행을 나가고 없다. 최장으로는 3개월까지 비엔나에서 떠나 있을 때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연주여행에서는 개인행동이 철저하게 규제되고 있다. 모두들 팀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만일 연주여행 기간 중에 변성이 되면 합창단에서 탈퇴해야 한다. 소년들은 여행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단체행동을 한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일반 소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단원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성을 부르지 않고 이름만 부르도록 하고 있다. 자기들이 스타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이 백악관 연주후 부시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2008년 1월.

 

비엔나소년합창단이 매주 일요일에 호프부르크 궁전에 있는 궁정교회(부르크카펠레 또는 호프카펠레)에서 미사를 돕기 위해 성가를 부르는 것은 1498년 이래의 전통이다. 오늘날 궁정교회에서의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노래는 비엔나 관광의 필수코스가 되어 있다. 세계최고의 소년합창단의 노래를 들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궁정교회에 가서 미사에 참여하더라도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모습은 보기가 어렵다. 교회 뒤편 윗층의 오르간 있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모습을 볼수가 없다. 그래서 근자에는 제단이 있는 곳에 대형 모니터를 설치하여 오르간이 있는 곳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화면으로 볼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교회 당국은 그것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관광객들이 상당수인 회중들이 미사에는 생각이 없고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노래에만 정신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78년에 궁정교회에서의 노래가 금지된 일이 있었다. 합창단에서 제명된 어떤 소년의 부모가 합창단 당국이 오스트리아 아동노동법을 위반했다고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적으로 큰 스캔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모는 심지어 자기들의 아이가 합창단에서 성적으로 학대를 받았다고까지 주장했었다. 사태는 평온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이미지가 손상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합창단은 궁정교회의 미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은 간혹 오페라에도 출연한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세 소년으로 출연한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비엔나소년합창단에는 잔잔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우선 예술감독을 여성이 맡았다. 아네스 그로스만(Agnes Grossmann)여사였다. 아네스 그로스만 여사는 1997년부터 몇가지 변화를 시도하였다. 우선 연주여행을 되도록이면 축소하는 것이었다. 대신, 아이들에 대한 학교 공부를 강화하였다. 레퍼토리에서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추가하였다. 과거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고전적인 음악을 하이라이트로 삼았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변화는 1998년부터 소녀 단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소녀단원이라니? 그것은 비엔나소년합창단의 5백년 역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13년 현재까지 여자 아이들이 단원으로 응모한 일은 없다. 한편, 아네스 그로스만 감독은 비엔나에서의 콘서트에만 치중하는 별도의 어린이합창단을 만든다는 계획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직 성사되지는 않았다. 2001년부터는 제랄드 비르트(Gerald Wirth)가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21세기에 들어와서 또 다른 변화를 감당해야 했다.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이 새로운 어린이합창단을 구성한 것이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과거로부터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어린이들이 나오는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는 의례 출연하였다. 특히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당연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카타르 연주회

                          

그런데 슈타츠오퍼로서는 비엔나소년합창단이 너무 자주 연주여행을 가기 때문에 이들의 출연을 주선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보니 무대연습이 충분치 못할 경우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자 아이들의 출연은 별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슈타츠오퍼는 아무래도 별도의 어린이(소년소녀)합창단을 가지는 것이 신상에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엔나소년합창단으로서는 라이발이 생긴 셈이었다. 슈타츠오퍼는 자체 어린이합창단의 학교 교육을 위해 별도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에 속한 아이들 중의 일부는 아우가르텐의 학교보다는 슈타츠오퍼의 학교를 더 선호하고 있다. 교육 분위기가 더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슈타츠오퍼의 어린이합창단원들은 오페라 출연료를 직접 받는다. 비엔나소년합창단에 있으면 출연료를 개인적으로 받는 일은 없다. 한편, 사람들은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좀 더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레퍼토리에서 현대음악을 좀 더 배려해야 한다는 견해였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은 자체 이미지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팝음악을 부르고 음반으로 취입도 했다. 아이들이 전통적으로 무대에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춤(율동)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입어왔던 전통적인 세일러복도 개량하여 좀 더 친숙하고 편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무언가는 변하고 있다. 그러던차에 2010년에는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성폭행 사건이 문제가 되었다. 실은 196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일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여덟명이나 되는 단원들이 합창단의 직원들, 또는 다른 단원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얘기였다. 이미 지나간 사건이었고 혐의로만 끝났지만 아무튼 모두들 충격이 컸었다. 이 사건이 대두되자 비엔나소년합창단은 아이들이 개인전화를 사용할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메일도 개인라인을 이용할수 있도록 허용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원으로는 아시아인도

 

2012년에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5백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지휘자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아시아인이었다. 그리고 그 아시아 여성은 바로 한국인이었다.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졸업한 김보미라는 여성이었다. 그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와서 레겐스부르크의 대학교에서 가톨릭교회음악 및 음악교육을 공부했다. 현재는 비엔나 음대(비엔나공연예술 및 음악대학교)에서 음악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한 그가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지휘자(음악감독)로 임명된 것이다. 솔직히 비엔나가 놀랐고 세계가 놀랐다. 김보미는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네개의 합창단 중의 하나인 모차르트합창단의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25명 단원들을 음악적으로나 단체생활에 있어서나 리더로서의 책임을 지고 있다. 김보미는 2010년 루체른에서 아놀드 쇤버그 합창단을 지휘한 경력이 있다. 2013년에는 모차르트합창단을 인솔하고 아시아 연주여행을 간다. 김보미의 첫 지휘는 2012년 9월에 비엔나 악우회에서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국장으로 근무하고있는 한국의 한필수 박사가 자랑스런 김보미 양을  치하하기 위해 2013년 봄에 아우가르텐을 방문하여 단원들을 격려하고 선물을 전달했다고 한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첫 여성 지휘자인 한국의 김보미. (사진: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