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테너 대분석

플라시도 도밍고 이야기

정준극 2013. 4. 13. 10:30

원래 바리톤이었으나 테너가 되었다가 다시 바리톤으로 돌아간

노익장 플라시도 도밍고 이야기

 

플라시도 도밍고는 1959년, 그가 18세 때에 멕시코 시티에서 멕시코국립오페라단의 멤버가 되고자 오디션에 참가했었다. 바리톤으로 참가했다. 심사위원들은 도밍고의 음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 도밍고에게 '당신은 바리톤이 아니라 테너요, 테너!'라고 말해주었다. 그로부터 2년후 도밍고는 멕시코의 몬테레이(Monterrey)에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를 불렀다. 바리톤이었던 그가 테너 주역으로서는 처음 맡은 역할이었다. 그리하여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테너 중의 한 사람인 플라시도 도밍고의 놀라운 경력이 시작되었다. 말할 나위도 없이 플라시도 도밍고는 세계 정상의 테너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스리 테너의 일원으로서 세계에 군림했다. 그런데 오늘날 파바로티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카레라스도 중병을 앓았던 여파인지 연로해 지면서 연주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도밍고는 달랐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휘자이며 연출자이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오페라 지휘를 했다. 또 오페라 제작과 연출에도 관여하고 있다. 2010년 현재 도밍고는 로스안젤레스 오페라와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의 운영을 책임맡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오페라에 출연하고 있다. 과연, 노익장이 따로 없다. 그는 1941년 1월 생이다.

 

젊은 시절의 도밍고

 

2010년으로 도밍고는 69세가 되었다. 다른 성악가들 같았으면 이미 무대에서 떠나 있을 나이였다. 그런데 도밍고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시몬 보카네그라'에 출연하였다. 그것도 타이틀 롤이었다. 그리고 테너가 아닌 바리톤으로였다. 도밍고를 잘 알고 지내던 몇몇 평론가들은 도밍고가 몇년 전부터 바리톤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도밍고는 테너 역할을 맡으면서도 근간에 지휘자들에게 고음의 음정을 1도 또는 2도까지 내려 달라고 계속 요청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작 바리톤인 보카네그라를 맡게 되자 사람들은 어떤 소리를 낼 것인가를 두고 궁금해 했다. 14세기 제노아 공국의 고뇌에 어린 총독의 역할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도밍고의 음성이 지친듯이 들렸다. 그건 보카네그라의 이미지에도 적합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역시...'라는 소리들이 나왔다. 그런데 간혹 낮은 소리를 낼 때에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아서 흉성을 이용하여 억지로 굵은 소리를 내는듯 했다. '아무래도...'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밍고는 근년에 볼수 없었던 신선한 노래를 불러서 '과연!'이라는 소리와 함께 만장의 청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몬 보카네그라의 플라치도 도밍고. 그는 우선 당당한 체구로서 무대를 압도한다.

 

도밍고는 이듬해인 2011년,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로스안젤레스에서 보카네그라를 다시 맡았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바리톤이 주역인 경우는 거의 없다. 있다면 '나부코'와 '시몬 보카네그라' 정도일 것이다. '두 사람의 포스카리'는 바리톤과 테너가 공동 주역이다. 보카네그라는 베르디가 창조한 위대한 바리톤 역할이다. 잔인하도록 강인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연민의 정이 스며 있는 인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카네그라가 아멜리아의 진짜 정체를 밝히면서 피에스코와 부르는 듀엣은 전체 오페라를 압도하는 석권이다.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챨스 오스본(Charles Osborne)은 도밍고의 보카네그라 역에 대하여 '그는 마치 거대한 석상처럼 무대를 지배하였다'며 찬사를 보냈다. 보카네그라는 도밍고를 위한 역할이었다. 도밍고는 2011년에 또 하나의 베르디 바리톤에 도전하였다. '두 사람의 포스카리'에서 총독을 맡은 것이다. 총독의 역할은 보카네그라와 여러 면에서 흡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도밍고는 보카네그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인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두 사람의 포스카리'에서 총독을 맡은 플라치도 도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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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시티에 도밍고 기념상 제막


2008년 8월 25일은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날이다. 멕시코 시티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의 기념상이 제막되었기 때문이다. 음악가 중에서 위대한 작곡가의 기념상은 세계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등. 그러나 성악가의 기념상은 별로 많지 않다. 있다고 한다면 노르웨이가 낳은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인 키르스텐 플라그슈타트 기념상이 오슬로에 있고 아제르바이잔이 낳은 위대한 베이스인 페오도르 샬리아핀의 기념상이 카잔과 키슬로보드스크에 있으며 마리오 델 모나코의 기념상이 플로렌스에 있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기념상들은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를 추모하여 설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생존하여서 활동 중인 성악가에 대한 기념상을 세운 경우이다. 멕시코 시티에 세운 플라시도 도밍고의 기념상이다. 얼마나 존경했으면 살아 있는 사람의 기념상을 세웠을까? 더구나 도밍고는 멕시코 사람도 아니다. 스페인 사람이다. 멕시코 출신도 아닌데 기념상을 세운 것이다. 멕시코를 대단히 사랑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도밍고는 멕시코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멕시코를 위해서 많은 봉사와 기여를 했다. 한가지만 예로 든다면, 도밍고는 1985년 멕시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도밍고는 모국인 스페인에서보다 멕시코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멕시코 시티에서 제막된 플라시도 도밍고 기념상


2010년은 멕시코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해였다. 1810년 9월 16일에 스페인의 통치에 대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2010년은 또한 멕시코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멕시코 혁명으로 국민들의 민권과 민주주의가 수립되었다. 또한 2010년에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멕시코를 위해 제작한 레코드 앨범이 나오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였다. 멕시코의 독립과 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에 담고서 앨범을 제작하였다고 본다. 도밍고의 앨범에 들어 있는 첫번째 노래는 Mexico Lindo y Querido 라는 것이다. '나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멕시코'라는 뜻이다. 도밍고는 멕시코와 무관한 사이가 아니다. 그는 스페인에서 태어났지만 불과 8세 때에 부모와 함께 멕시코로 이주해서 지냈다. 도밍고는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기 위해 멕시코 시티의 국립음악원에 입학했다. 도밍고는 국립음악원에서 오히려 성악적인 소질이 발견되어 성악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도밍고의 첫 오페라 데뷔는 멕시코의 몬테레이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를 맡은 것이었다. 도밍고는 두번 결혼했다. 그런데 부인이 모두 멕시코 여자였다. 첫번째 부인인 아나 마리아 게라 쿠에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1958년에 멕시코 시티에서 태어났다. 호세 플라시도 도밍고 게라이다. 도밍고는 1962년에 재혼했다. 두번째 부인은 뛰어난 소프라노인 마르타 오르넬라스(Marta Ornelas)였다. 마르타 오르넬라스는 1962년에 멕시코에서 '올해의 성악가' 선정되기도 했다. 마르타 오르넬라스는 두 아들, 플라시도 프란치스코와 알바로 마우리시오를 기르는 일에 주역하기 위해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그만 두었다. 도밍고는 전세계에서의 오페라 공연과 콘서트 때문에 수도없이 여행을 다녀야 했지만 언제나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을 하나의 사명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1985년에 멕시코에서는 큰 지진이 일어났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있었다. 도밍고는 의연금 모금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여러번 개최하였다. 도밍고 자신도 그해 지진으로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의 친척이 네명이나 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국민들은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도밍고의 노력에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도밍고의 기념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제작은 알레한드라 수니가(Alejandra Zuniga)가 맡았다.  그리하여 2010년 8월 25일에 멕시코 시티에서 제막되었다.


2009년 12월 도밍고가 멕시코 시티의 독립천사상 앞서 마리아치 2000과 함께 '메히코 린도 이 쿠에리도'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