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영국의 오페라

아프터피스로부터 시작한 영국의 오페라

정준극 2013. 7. 24. 13:44

아프터피스로부터 시작한 영국의 오페라

발라드 오페라와 사보이 오페라로 발전

1656년 '로우드 공성'이 첫 영국 오페라

 

영국의 첫 오페라를 제작한 윌렴 데이브난트 경

 

영국은 유럽 대륙과 도버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기 때문인지 유럽의 문화와도 떨어져 있다는 인식을 준다. 오페라의 경우에도 대륙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프랑스와 독일-오스트리아에서 계속 발전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영국의 오페라는 더딘 발걸음을 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고래로 영국에서는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들이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대표적인 작곡가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로시니, 도니체티, 벨리니, 베르디, 푸치니와 같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비제, 구노, 생 생스, 베를리오즈, 마이에르베르와 같은 프랑스의 작곡가, 모차르트, 베버,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독일-오스트리아의 작곡가들의 명성과 업적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할 형편이다. 그러므로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Made in UK는 별로 알아주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만이 내세울수 있는 특별한 오페라 장르가 있다. 길버트와 설리반(G&S)이 합작하여 내놓은 이른바 사보이 오페라들이다. '펜잔스의 해적' 'HMS 피나포어' '미카도' '곤돌라 사공' 등 오페라의 사촌쯤 되는 오페레타 겸 뮤지컬 스타일의 G&S 상품들이 영국의 체면을 유지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사보이 오페라 덕분인지 오늘날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뮤지컬 장르도 실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 주도했다는 것은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그나저나 너무 영국의 오페라를 경시하면 곤란하므로 헨리 퍼셀과 벤자민 브리튼은 높이 존경받아야 마땅한 오페라 작곡가라는 점을 덧 강조코자 한다. 그리고 독일에서 건너온 조지 프리데릭 헨델도 영국의 오페라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

 

'펜잔스의 해적'에서 메저 제느랄과 딸들

 

17세기 초반에 이탈리아를 위시한 유럽 대륙에서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고작 아프터피스(afterpiece)라는 별로 대단치 않은 형태의 음악 드라마 공연이 있었고 이어 프랑스의 마스크(masque)가 수입되어 주로 궁정에서 공연되었다. 이들 아프터피스와 마스크는 앞으로 나타날 영국의 본격 오페라를 준비하는 역할이었다고 할수 있다. 아프터피스라는 것은 마치 뒷풀이나 마찬가지로 연극이 끝나고 나서 잠시 노래도 부르고 익살극도 펼치는 간단한 공연을 추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돈을 내고 들어온 관중들에게 그나마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자 했던 것이다. 마스크는 원래 간단한 마스크를 쓰고 나와서 연극도 하고 춤도 추며 노래도 부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나중에는 마스크가 귀찮아서 그냥 공연을 하게 된 프로그램이다. 그래도 명칭은 계속 마스크라고 불렀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마스크는 무대장치가 대단히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다는 특징이 있다. 하기야 프랑스 사람들의 사치는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로운 입장이니 이해가 된다. 영국에서도 마스크 공연은 우선 눈요기가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국의 궁전에서 마스크를 공연한다고 하면 일꾼들이 무대 장치를 만드느라고 몇날 밤을 꼬박 지새울 정도였다. 화려한 스타일의 마스크는 영국의 궁정을 거의 3백년 동안이나 지배하였다. 마스크의 레퍼토리는 보통 프랑스에서 수입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영국의 노브랜드 제품도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벤 존슨(Ben Jonson)의 Lovers Made Men(1617)이다. 그나저나 마스크는 프랑스 오리진이지만 출연자들은 순전히 이탈리아 방식으로 이탈리아어 가사에 의한 노래를 불렀다.

 


마스크는 종종 뮤지컬로 발전하였다. 사진은 '피핀'(Pippin).


17세기 전반의 영국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기간이었다. 청교도혁명이란 것이 일어나서 영국이 잠시 공화국이 되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1649년부터 1653년까지 4년 동안, 그리고 1659년부터 1660년까지의 1년 동안 공화국으로 있었다. 이때의 공화국을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 of England)라고 불렀다. 1649년에 청교도혁명이 일어나면서 국왕 챨스 1세는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우리나라는 인조가 임금이 된지 얼만 안되던 때였다. 올리버 크롬웰에 의한 잉글랜드 연방은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것은 모두 배격하였다. 그야말로 청교도적인 생활을 강요하였다. 당연히 연극이니 마스크니 하는 공연도 전면금지 조치를 받았다. 극장들은 거의 모두가 문을 닫아야 했다. 이때문에 영국의 오페라는 사실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러던 중, 1656년에 시인 겸 극작가 겸 임프레사리오인 윌렴 데이브난트(William Davenant: 1606-1668) 경이 '로우드 공성'(The Siege of Rhodes)이라는 작품을 만들어서 당국에 공연허가를 신청했다. 이 작품은 데이브난트 경이 대본을 쓰고 다섯 명의 작곡가들이 음악을 완성한 것이었다. 다섯 명의 작곡가는 헨리 러스(Henry Lawes), 매튜 로크(Metthew Locke), 캡틴 헨리 쿡(Captain Henry Cooke), 챨스 콜만(Charles Coleman), 조지 허드슨(George Hudson)이다. 데이브난트 경은 '로우드 공성'에 대한 공연허가를 신청할 때에 이 작품을 오페라라고 부르지 않고 '레시타티브 뮤직'(Recitative music)이라고 했다. 대화체의 대사에 음악을 붙인 작품이라는 의미였다. '로우드 공성'의 스토리는 1522년 오토만 터키군이 지중해의 작은 섬인 로우드를 공략하여 로우드의 기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펼친 것이다. 올리버 크롬웰은 오토만 터키 군에 대항한 기독교 기사들의 숭고한 전투를 찬양하여서 이 작품의 공연을 승인했다. 그런데 이 오페라를 공연할 극장이 없었다.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브난트 경은 런던 러틀랜드에 있는 자신의 저택 뒷마당에 무대를 설치하고 첫 공연을 가졌다. 이것이 영국의 첫 오페라이다. 오늘날 이 작품의 스코어는 분실되어서 어떤 음악인지는 알수 없지만 공연의 내용을 스케치해 놓은 것은 남아 있어서 규모 정도만 알수 있을 뿐이다. '로우드 공성'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데이브난트 경은 계속하여 '페루에서 스페인의 잔혹함'(The Cruelty of the Spaniards in Peru: 1658),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 이야기'(The History of Sir Francis Drake: 1659)를 내놓았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은 원래 해적으로서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를 물리친 국가적인 영웅이었다. 올리버 크롬웰 정부는 기본적으로 스페인을 싫어하였다. 그것은 블라디 메리라는 별명을 가진 메리 여왕 때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스페인을 등에 업고 영국 성공회를 지극히 탄압하였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공화국은 그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스페인을 싫어하고 있었는데 데이브난트 경이 스페인을 비난하는 내용의 작품(오페라)을 공연하겠다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승인했다. 그후 크롬웰의 정부가 물러나고 다시 영국의 왕권이 회복되자 궁정을 중심으로하여 외국, 특히 프랑스의 공연작품(오페라)가 환영을 받게 되었다. 크롬웰의 공화제가 물러나고 왕권이 회복된 것을 '영국 회복'(English Restoration)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역사의 단편이다. 1673년에 토마스 섀드웰(Thomas Shadwell: c 1642-1692)가 '사이케'(Psyche)라는 오페라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것은 1671년에 몰리에르의 극본에 장 바티스트 륄리가 작곡한 같은 타이틀의 프랑스의 '코미디 발레'를 모방한 것이었다. 한편, 이제는 임프레사리오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이브난트 경은 1673년에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he Tempest)를 오페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매튜 로크와 존슨이 음악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으로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오페라라고 부르기에는 음악도 그렇고 조금 미흡한 작품이었다.

 

데이브난트의 '템페스트'가 나오고 토마스 섀드웰의 '사이케'가 나온 때로부터 10년 후인 1683년에 바로크 작곡가로 유명한 존 블로우(John Blow: 1649-1708)가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라는 오페라를 발표했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연극이건 오페라이건 주제가 그리스 신화 또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므로 이번에도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오페라가 나왔던 것이다. 오페라의 주제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비너스와 아도니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영어로 된 영국의 첫 오페라로 간주되고 있는 작품이다. 존 블로우는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스승이었다. 존 블로우의 후계자인 헨리 퍼셀은 1689년에 '디도와 이니아스'(Dido and Aeneas)를 완성했다. '디도와 이니아스'는 헨리 퍼셀의 대표작일뿐만 아니라 영국 초기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런데 퍼셀은 그의 오페라에서 이탈리아 스타일의 레시타티브를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표준 모델을 따르지 않고 각 장면이 독립적인 작품에 치중하였으며 간혹 프랑스의 마스크(Masque) 형태로 작곡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퍼셀이 1692년에 내놓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요정의 여왕'(The Fairy-Queen)이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아리아를 부르는 등 음악적으로 주도적인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극에서처럼 대사로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음악은 다른 사람들이나 합창단이 맡도록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셀은 영국에서 순수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러한 노력을 계속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36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헨리 퍼셀의 '디도와 이니아스'

 

퍼셀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영국에서의 오페라에 대한 인기는 시들해졌다. 그러다가 1730년대에 토마스 아느(Thomas Arne: 1710-1778)가 등장하여 영국 오페라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토마스 아느는 '룰 브리타니아'(Rule! Britannia!)라는 노래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작곡가이다. '룰 브리타니아'는 영국의 애국가라고 부를 정도로 오늘날까지도 온 영국 백성들이 무슨 집회만 있으면 심심하던 차에 부르는 노래이다. 토마스 아느는 그야말로 다작의 작곡가였다. 이런저런 형태의 무대작품만해도 1백여편이나 남겼다. 대표적인 오페라는 '알프레드'(Alfred), 그리고 '토마스와 샐리'(Thomas and Sally)이다. '알프레드'는 당시 프리드릭 왕세자를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 오페라의 피날레에 저 유명한 '룰 브리타니아'가 나온다. '토마스와 샐리'는 '어느 뱃사람의 귀환'이라고도 부르는 오페라로서 영국이 섬나라인 것을 생각하면 일반 대중들이 좋아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토마스 아느는 그 후에 등장하는 헨델로 하여금 영국의 오페라가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지를 제시해 준 사람이었다. 토마스 아느는 전체가 노래로 된 이탈리아 스타일의 코믹 오페라를 영국에서도 처음 시도한 사람이었다. 그의 '헨리와 엠마'(Henry and Emma: 1749), '돈 사베리오'(Don Saverio: 1750)등은 성공은 못했지만 '토마스와 샐리: 1760)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스'(Artaxerxes: 1862)는 영어로 된 최초의 완성된 오페라 세리아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아르타세르세스'는 1830년대까지 수십년동안 계속 공연되었으니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토마스 아느의 또 다른 오페라인 '마을에서의 사랑'(Love in a Village: 1762)은 스타일도 새로웠지만 내용도 재미가 있어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공연되는 인기 오페라였다. '마을에서의 사랑'은 현대화된 발라드 오페라였으며 또한 파스티셰 오페라였다. 영국의 전래 민요나 대중가요를 혼합한 것이었다. 토마스 아느는 경쾌하고 부드러우며 산뜻하고 유쾌한 멜로디를 만들어 낸 작곡가였다. 퍼셀이나 헨델과는 사뭇 차이가 나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그후로 영국의 여러 작곡가들은 토마스 아느의 노래 스타일을 모방하거나 심지어는 표절하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토마스 아느의 '아르타세르세스'의 한 장면

 

토마스 아느와 함께 그 시대에 영국의 오페라를 지배했던 인물은 독일에서 온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이었다.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는 몇 십년 동안 영국의 오페라 무대를 빛나게 장식했다.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바로크 스타일이었다.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는 당시에 활동하고 있던 여러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존 프레데릭 람프(John Frederick Lampe: 요한 프리드리히 람페: 1703-1751)이다. 독일 작소니 출신의 존 프레데릭 람프는 영국에서 코믹한 내용의 단편 오페라를 여러 편 작곡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의 '완틀리의 용'(The Dragon of Wantley: 1734)은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보다 더 많이 공연되는 기록을 세웠다. 헨델의 이탈리아 스타일을 모방한 '피라무스와 테스베'(Pyramus and Thesbe: 1745) 역시 람프의 대표작으로 역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존 프레데릭 람프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존 웨슬리)와 친구사이였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의 찬송가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도 여러 편이나 작곡했다. 이같은 상황은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마이클 발프(Michael Balfe: 1806-1870)와 아일랜드 출신인 윌렴 빈센트 월레이스(William Vincent Wallace: 1812-1865)의 오페라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이와는 별도로 모차르트와 마이에르베르 등의 작품들도 계속 영국의 오페라 극장들을 지배하였다.

 

존 프레데릭 람프의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한 장면

 

18세기와 19세기에 영국에서는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세리아가 오페라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존 게이(John Gay: 1685-17332)의 '거지 오페라'와 같은 발라드 오페라, 유럽의 오페레타, 그리고 사보이 오페라로 대표되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경쾌한 오페라들은 아무리 오페라 세리아가 대세이지만 놀라운 인기를 끌며 공연되었다. 특히 길버트(대본)와 설리반(음악)에 의한 사보이 오페라는 영국 본토 뿐만 아니라 영국의 유니온 잭이 휘날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인기를 끌었다. 그러는 중에 존 바네트(John Barnett: 1802-1890)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발자취를 따라 영국적인 낭만 오페라를 만들고자 했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존 바네트의 대표작은 1834년의 '산속의 정령'(The Mountain Sylph)이다. 그래도 이 오페라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산속의 정령'은 대화체의 대사가 나오지 않는 작품으로 영국 오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이른바 Sung-through(완송)의 모델이다. 이같은 스타일은 훗날 길버트 설리반의 '이올란타'(Iolanthe)에서 다시 시도되기는 했다.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아서 설리반은 여러 사보이 오페라들을 작곡했지만 그랜드 오페라는 단 한 편을 남겼다.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를 바탕으로 삼은 동명 오페라였다. 흥미롭게도 '아이반호'에 대하여는 1876년경부터 영국의 여러 젊은 작곡가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도나도 오페라로 만들고자 시도 했지만 성공을 거둔 작품은 없었다. 한편, 설리반은 비록 자기의 사보이 오페라들이 라이트 오페라(Light opera)로 분류되고 있지만 사실은 영국 오페라/오페레타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보이 오페라는 프랑스의 오페레타와 비교할 때에 영국의 오페레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어쩐 일인지 영국에서는 프랑스 오페레타가 19세기 후반, 즉 1870년대 말까지 런던 극장의 무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프랑스 오페레타의 대본이 영어로 번역될 때에 이상하게도 도무지 뜻을 알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번역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프랑스 오페레타를 보러 갔다. 아마 여자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고 흔들면서 추는 캉캉 춤이 신기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길버트와 설리반은 1890년대에 과거의 가볍고 경쾌한 작품에 비하여 보다 무겁고 순수한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도 특이한 사항이었다. 예를 들면 '런던탑의 경비병'(The Yeoman of the Guard), '하돈 홀'(Haddon Hall), '아름다운 돌'(The Beauty Stone) 등이다.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진정한 그랜드 오페라로는 '아이반호'가 유일하다. '아이반호'는 기록적으로 155회의 연속 공연을 가졌다.

 

길버트-설리반의 '런던탑의 경비병'

                    

영국의 오페라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보다 독자성을 띠게 되었다. 그동안의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의 영향, 프랑스 오페레타의 영향, 독일적 낭만주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영국적인 오페라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이러한 노력의 선두에는 랄프 본 윌렴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러틀랜드 바우튼(Rutland Boughton: 1878-1960)이 있으며 그리고 마침내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을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 오늘날 영국 작곡가의 오페라로서 세계 오페라 극장의 표준 레퍼토리로 꾸준히 올라가 있는 작품으로는 드라마틱한 면에서나 음악적인 면에서 벤자민 브리튼의 작품 만한 것이 없다. 20세기의 또 다른 영국의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1979년부터 뉴욕에서 활동했던 리챠드 베네트(Richard Bennett: 1936-2012), '펀치와 주디'의 작곡가인 해리슨 버트위슬(Harrison Birtwistle: 1934-), '태버너'(Taverner)가 대표작인 피터 막스웰 데이비스(Peter Maxwell Davies: 1934-) 등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영국의 오페라를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곡가로서는 아무래도 토마스 아데스(Thomas Ades: 1971-)를 들지 않을수 없다.

 

오페라라고 하면 무조건 대본이 이탈리아어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독일어나 프랑스가 되어야 그럴듯한 입장에서 20세기에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작곡가들도 영어 대본의 오페라들을 만들어서 세계 시장에 내놓아 좋은 평판을 받은 경우가 많다.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 1898-1937)의 '포기와 베스'는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지안 카를로 메노티(Gian Carlo Menotti: 1911-2007)도 영어 오페라들을 상당수 내놓아서 국제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칼라일 플로이드(Carlisle Floyd: 1926-) 등은 오페라와 대중적인 뮤지컬 스타일을 가미한 작품들을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1937-) , 마크 아다모(Mark Adamo: 1962-), 존 아담스(John Adams: 1947-), 제이크 히기(Jake Heggie: 1961-) 등이 계속 영어 대본의 오페라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영어권 출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어 대본의 오페라를 내놓은 작곡가들도 있다. 예를 들면 독일 출신의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1926-2012)의 '바싸리드'(The Bassarids: Die Bassariden), '강가에서'(We Come to the River)등은 영어 대본으로 되어 있다.

 

한스 베르너 헨체의 영어 대본 오페라인 '바싸리드'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