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궁전/락센부르크

합스부르크와 함께 6백여년

정준극 2013. 9. 8. 16:22

합스부르크와 함께 6백여년

 

 

락센부르크의 프란첸스부르크

 

락센부르크 궁전(슐로쓰 락센부르크)은 비엔나 교외에서 가까운 곳에 있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의 락센부르크 마을에 있다. 락센부르크 궁전이 합스부르크의 소유가 된 것은 1333년이다. 그후로 락센부르크 궁전은 쇤브룬과 함께 합스부르크 황실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여름에만 사용한 것은 아니며 봄철에도 간혹 사용하였다. 숲에서 사냥도 하고 호수에서 낚시도 했다. 락센부르크 궁전의 중심 건물이라고 할수 있는 블라우어 호프에서는 황실의 여러 사람들이 태어났다. 마이엘링의 비극으로 유명한 루돌프 황태자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루돌프 황태자의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와 어머니인  씨씨가 비엔나에서 결혼식을 올리고나서 신혼여행을 온 곳도 이곳이었다. 블라우어 호프는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인 1745년 경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옛 건물에 비하여 새로운 건물이므로 노이에스 슐로쓰(Neues Schloss: 신 궁전)라고도 불렀다. 블라우어 호프는 화려한 로코코 디자인이다. 같은 경내에 있는 또 하나의 성은 프란첸스부르크 성이다. 오스트리아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가 된 프란츠 1세를 기념하여서 붙인 이름이다. 프란츠 1세 황제는 락센부르크의 확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터였다. 오늘날 락센부르크 궁전은 이벤트, 회의, 콘서트 등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옛날 가구와 미술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락센부르크 궁전은 박물관의 역할도 하고 있다. 락센부르크의 교회는 뭐 대단한 것도 아니게 보이지만 알프스 북쪽에서 하이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건물이라면서 중요시하고 있다. 교회의 공사는 1683년에 시작하여 1703년 끝냈다. 카를로 안토니오 카를로네라는 건축가가 주도했다. 1703년에 공사가 끝났다고 하지만 미진한 면도 있어서 계속하여 1724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궁전의 정원은 1780년에 영국 정원으로 재단장되었다. 전체 정원에는 몇개의 인공 호수가 마련되었다. 그 인공섬에 프란첸스부르크 성이 자리 잡고 있다.

 

 

락센부르크 자연공원의 산책길

 

락센부르크 궁전에서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여러 가족들이 태어났다.

- 기젤라 대공녀(1856년 탄생, 1932년 뮌헨에서 사망).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벳 황비의 딸.

- 루돌프 황태자(1858년 탄생, 1889년 비엔나 근교의 마이엘링에서 사망).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벳 황비의 아들.

- 엘리자벳 마리 대공녀(1883년 탄생, 1963년 비엔나에서 사망).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의 딸.

 

샤를르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은 1917년에 락센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벳(씨씨)은 결혼식을 마치고 락센부르크로 신혼여행을 왔다.

 

 

락센부르크 공원

                   

락센부르크 궁전의 운명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비엔나 시당국은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에(우리나라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해) 전쟁으로 파괴된 락센부르크 궁전과 주변의 공원을 시소유로 만들었다. 오스트리아에는 더 이상 합스부르크 황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황실 소유의 모든 건물들 등은 새로운 공화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던 것이고 락센부르크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락센부르크 마을은 1938년 독일과의 합병 이후에 비엔나 시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에 비엔나 시에서 떨어져 나와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락센부르크 성에는 1972년에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 International Institute for Applied Systems Analysis: Internationale Institut für angewandte Systemanalyse)가 입주했다. IIASA는 당시 동서 냉전임에도 불구하고 동구의 과학자들도 초빙하여 지구적인 문제들의 연구를 추진했다. 동서 냉전이 와해된 이후에는 세계 각지의 연구원들이 모여 세계 변화에 따른 국제적인 또는 국가적인 문제들을 파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락센부르크 궁전의 한쪽에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필름보관소(필름 아카이브)가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국제반부패아카데미(International Anti-Corruption Academy)가 있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훈련하고 있다.

 

 

락센부르크의 블라우어 호프에는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가 있다. 이이아사라고 부른다.

                              

                   

이제 락센부르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락센부르크에는 공원과 호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락센부르크 마을이 있고 세개의 성이 있다. 우선 고성(Altes Schloss)이 있었다. 고성은 공원으로부터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중세에 락센도르프 군주들이 요새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에 합스부르크가 소유하게 되었다. 알브레헤트 2세 공작(당시 오스트리아의 군주는 공작의 칭호를 가졌다)은 고성의 탑 중의 한 곳에 고틱 양식의 예배처(카펠레)를 건설했다. 그런 사실이 1332년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후 알브레헤트 3세는 성밖에 마을이 조성되도록 권장했고 고성도 확장하였다. 오늘날 알테스 슐로스(고성)는 자취만 남아 있다. 왜냐하면 1683년 터키 의 비엔나 공성 때에 락센부르크의 거의 모든 것도 약탈되거나 파괴되었고 그때 고성도 당연히 터키의 먹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터키가 물러간후 복구작업과 함께 고성의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그후 다시 전쟁을 거치면서 고성은 자취만 남아 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락센부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일도 있다. 샤를르 6세 황제가 1713년 저 유명한 '국사조칙'(Pragmatische Sanktion)을 작성한 곳이 바로 락센부르크였다. 국사조칙은 아들이 없는 샤를르 황제가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수 있도록 명시한 조칙이다. 이와 함께 티롤로부터 보헤미아와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에 속한 영토라는 것을 다시한번 천명한 문서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11년 후, 샤를르 6세 황제는 이곳에서 스페인의 필립 5세와 평화협정을 맺고 샤를르로서는 더 이상 스페인의 왕관을 주장하지 않겠으며 반면에 필립 5세는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1925년부터 1938년 나치와의 합병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락센부르크 궁전은 음악 및 체육 학교로 사용되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온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현재는 아파트 건물이 들어섰다. 아파트의 계단이나 천정에 간혹 옛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락센부르크 궁전 경내에는 국제반부패아카데미도 자리잡고 있다.

 

두번째로는 블라우어 호프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이 성은 이미 15세기부터 있어왔다. 당시 그 주변은 자유 경작지였으나 그후 17세기에 세바스티안 폰 블뢴슈타인이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그때의 건물을 블라우어 호프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전해내려온 것이다. 18세기에(1715) 블라우어 호프는 당시 소유주인 제국의 부수상인 프리드리히 카를 폰 쇤보른의 희망에 따라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축되었다. 그때 재건축을 맡은 사람이 유명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였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1762) 블라우어 호프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소유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궁정 건축가인 니콜로 파카씨(Niccolo Pacassi)로 하여금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여 황실의 휴양궁전(Lustschloss)가 되도록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락센부르크를 사랑하여서 자주 와서 지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만 이곳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아들인 요셉 2세 황제도 이곳을 무척 좋아했다. 비엔나의 그 딱딱하고 힘든 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와 해방을 맛볼수 있는 곳이 락센부르크였기 때문이었다. 그후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 황비도 이곳을 자주 찾아왔었다. 특히 엘리자베트 황비는 비엔나의 호프부르크를 싫어하여서 이곳에 와서 두 자녀를 출산하였다. 둘째 딸 기젤라와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였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에 락센부르크의 카우니츠 궁과 게스트 하우스인 '춤 슈테른'(Zum Stern) 등은 자선수녀회의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다.

 

 

프란첸스부르크와 호수

                             

락센부르크 교회는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일반에게 오픈하고 있지 않아서 유감이다. 이 교회는 물론 근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의 교회는 17세기에 터키의 침략 때에 완전히 파괴된바 있다. 현재의 교회는 폐허가 된 옛 교회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물론 터키가 물러간 후에 다시 짓기도 했다. 1693년 레오폴드 1세가 정초석을 놓아 건축을 시작하여 1739년에 완공했다. 별것도 아닌 교회를 그렇게 오랜 기간에 걸쳐 지은 것은 우선 1724년에 불어 닥친 폭풍 때문에 종탑이 완전히 무너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관 부분을 다시 디자인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어서 그렇게 떠들다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다른 집들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변형을 겪어야 했다. 현재 약국으로 되어 있는 곳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학교로 지정한 건물의 한쪽에 있다. 학교는 체육과 음악 등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곳으로서 1971년까지도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락센부르크 시청(라트하우스)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도 원래는 일반 농가였으나 알브헤레트 3세 공작이 취득한 이래 보수와 리모델링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원래는 2층이었으나 1900년에 한 층을 더 올렸다. 시청 벽면에는 1962년에 비엔나 시당국과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정부가 공동으로 락센부르크 마을을 재건키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옛날 시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현재의 시청 옆에 짙은 황색의 건물로 아직 남아 있다.

 

 

락센부르크 시청, 오른쪽의 진노란 색의 건물이 구시청이다.

                                  

궁전광장(슐로스플라츠)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그뤼네 하우스(Grünne-Haus)가 있다. 간혹 팔레 디트리히슈타인(Palais Dietrichstein)이라고도 하는 건물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딸 마리 크리스틴과 사위인 작센 테센의 알베르트를 위한 매입한 집이다. 비엔나 시내에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알베르트 대공이 살던 집을 개조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실역을 소개하지 않을수 없다. 1935년까지 뫼들링과 락센부르크를 연결하는 철도가 있었고 락센부르크의 종착역이 황실역(카이저반호프)이다. 지금은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락센부르크 공원의 숲

 

공원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을수 없다. 원래 락센부르크의 공원은 로트링겐의 프란시스 스테판이 조성한 것이다. 로트링겐의 프란시스 스테판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한 로트링겐 왕가의 사람이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서프라이스 선물로 락센부르크에 별 모양 디자인의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들의 아들인 요셉 2세가 프랑스식 정원을 영국식 정원으로 변경했다. 요셉 2세 황제는 여동생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에서 힘든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프랑스가 미워서 영국식 정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후 프란시스 1세(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함)가 또 한번 손질을 하였다. 락센부르크 정원과 프란첸스부르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으로 좀더 파고 드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계몽군주라고 하는 요셉 2세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꾀하였으나 사실상 실현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2세의 개혁정책은 프랑스 혁명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개혁이란 것이 무엇인가? 시민들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것이 아니었고 위에서 지시하는 식의 사회개혁이었으니 성과가 좋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1792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시스 2세는 처참하고 폭력으로 얼룩진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프란시스 2세의 모토는 '전체주의로 돌아가자'(Back to absolutism)였다. 그런 연고로 프란시스 2세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보이기 위해서 락센부르크의 정원를 손질하고 호수에 프란첸스부르크를 세웠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을 시작한 로트링겐의 프란시스 스테판.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고 나서 프란시스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국정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도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시스 2세는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스트리아을 제국으로 선포하고 프란시스 1세 황제가 되었다. 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그로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도 겸하였으니 한 사람이 황제의 자리를 두개나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06년에 프란시스 2세 황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사임하였고 더 이상 후임을 선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600여년 연륜의 신성로마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무튼 프란시스 2세와 프란시스 1세는 같은 사람이다. 오스트리아는 1804년까지 대공이 군주로 있는 국가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기 800년 경부터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 유럽의 상당부분을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러다가 샤를르 6세 황제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어질 형편이 되었다. 샤를르 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오스트리아의 군주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고 싶었으나 다른 나라들의 반대가 심해서 그럴수가 없었다. 샤를르 6세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결혼하는 남편이 합스부르크의 가문을 이어 나가도록 했다. 독일 로트링겐(로레인)의 프란시스 스테판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였다. 그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서 프란시스 2세가 오스트리아의 군주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프란시스 2세라고 부른 것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를 시작한 사람이 프란시스 1세이므로 그의 계통을 잇는 다는 의미에서 프란시스 2세라고 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나서자 프란시스 2세는 평소부터 미워하던 프랑스가 왕이 아니라 황제를 가진 나라가 되자 속이 상해서 허울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명칭보다는 실질적인 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프란시스 1세 황제가 되었다. 나중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와 대타협을 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프란시스 1세 오스트리아제국 황제. 딸을 나폴레옹과 결혼시키도 했다.

                                                                  

전체군주주의에 대한 프란시스 1세의 의지는 확고하여서 락센부르크 정원에 있는 그의 기념상에서도 그런 그의 신념을 느낄수 있다. 기념상에서 그의 시선은 하늘 높은 곳을 향해 있지만 그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프란시스 1세는 반드시 나쁜 군주만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여 위상을 높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에 나오는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독일 국가가 있다. 프란시스 1세는 독일 국가들, 즉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래서 가사에는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선한 황제인 프란시스를 보호하소서'(May God save and protect our good Emperor Francis)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재위 기간을 통해서 혹시 민중들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공원에 대하여 좀 더 얘기를 진행해 보자. 프란시스 2세가 아주 잘 가꾸어 놓은 프랑스 정원을 왕창 바꾸라고 지시한 것은 그 시기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프란시스 2세로 말하자면 전문가들도 혀를 홰홰 내두르는 원예가였다. 그래서 그는 화초들과 수목들을 인공적으로 가꾸는 것은 절대 반대였고 자연 그대로 길러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프란시스 2세는 생긴 모습은 까다롭게 생겼지만 실은 상당히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세의 낭만적인 스토리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공원에 기사의 무덤이 있고 기사의 탑이 있다. 고틱식 다리의 디자인도 마치 기사의 갑옷을 보는 듯하다. 다리 부근에는 마치 중세의 동굴을 연상케 하는 동굴도 있다. 동굴은 입구를 돌로 쌓은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신비한 느낌을 주는 동굴이다. 그래서 지극히 인공적인 프랑스식 정원보다는 자연스러운 영국식 정원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프란첸스부르크

                       

프란첸스부르크가 프란시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건물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프란첸스부르크에는 그럴듯한 건물이지만 사람이 거주한 일이 없다. 없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거주용 건물로 지은 것이 아니다. 개인 박물관으로 지은 건물이다. 19세기 초에 지은 프란첸스부르크는 뾰족한 첨탑 등으로 마치 동화에 나오는 장난감 성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프란첸스부르크는 동화 속의 장난감 집이나 다름 없다. 온갖 수집품이 다 모여 있다. 프란시스 1세의 수집벽은 알아주는 것이었다. 황제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별별 물건들을 잘도 수집해 놓았다. 그는 어디를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그저 손가락으로 지적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물건 주인은 아무 말도 없이 그 물건을 잘 포장해서 프란첸스부르크로 보냈다. 어떤 사람들은 황제가 자기의 물건을 특별히 좋아해서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고분고분 물건들을 꾸려 보냈다. 프란시스 1세는 락센부르크의 프란첸스부르크를 통해서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드높이고자 했다. 프란시스 1세가 수집해 온 물건들은 종류도 여러가지이다. 가장 많은 것이 종교적인 물건들이다. 12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클로서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서 가져온 제단 장식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천정 파넬들은 비엔나 북쪽에 있는 그라이펜슈타인(Greifenstein) 성에서 뜯어온 것이다. 현재 그라이펜슈타인은 폐허로 남아 있다. 잘츠부르크의 시청 홀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있다. 츠베틀(Zwettl) 수도원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성에는 합스부르크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그린 그림들도 걸려 있어서 마치 역사 학습장과 같다. 그리고 하찮은 물건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케아에서 사온 물건들은 전혀 아니다. 모두 귀중한 사료가 되는 물건들이다. 14-15세기의 물건들은 국보급이다.

 

 

프란첸스부르크의 가구들

                                

프란첸스부르크에서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로부터 시작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17명 군주의 조각상이 있다. 그런데 프란시스의 1세의 삼촌이 되는 요셉 2세의 조각상을 함께 없다. 대신에 홀의 입구에 장엄하게 서 있다. 이밖에도 프란첸스부르크의 각 방과 벽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의 초상화과 가족 그림 또는 부조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그리고 프란시스 1세의 초상화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여러군데에 걸려 있다. 예를 들면 유리 파넬에 그의 아들들이 양 옆에서 서 있는 그림도 있다. 락센부르크를 방문한다면 프란첸스부르크의 고가구들과 초상화, 조각들을 구경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가이드 투어는 한시간 가량 걸리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서 다시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다. 락센부르크를 둘러보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다. 비록 호수에서 보트는 타지 않는다고 해도 꼬마 기차를 타고 둘러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프란첸스부르크의 어떤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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