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세계/팔레스타인

필라스틴(Filastin)이 뭐길래?

정준극 2014. 9. 26. 15:30

필라스틴(Filastin)이 뭐길래?

 

필라스틴이란 말은 팔레스타인을 아랍어로 그렇게 부르는 말이다. 아랍 주민들은 필라스틴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어느새 영어식으로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의 아랍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팔레스타인이 어쩌고 저쩌고라고 하는 대신에 필라스틴이 어쩌고 저쩌고 라고 얘기하면 보다 친밀감을 갖게 될것이다.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날이면 날마다 전투기의 폭격과 대포의 포격, 그리고 이스라엘 병사들과 민병대처럼 보이는 아랍 사람들의 총격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 중동의 이오지마라는 인식부터 갖게 된다. 이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이 땅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간의 일반적인 영토 분쟁과는 달리 상당히 감정이 개입된 분쟁이다. 그러므로 뿌리도 깊고 감정의 골도 깊은 분쟁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그 분쟁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해할수 없다는 것부터 인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 국기

 

팔레스타인은 원래 지역의 이름이다. 팔레스타인은 서쪽으로 지중해에 면하여 있고 동쪽으로는 요단강에 이르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지역적으로 무슨 다른 점이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 내에 이스라엘도 있고 '팔레스타인 국가'(State of Palestine)라는 나라도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북으로 레바논, 북동으로 시리아, 동으로 요르단, 남동으로 사우디 아라비아, 남으로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서쪽의 지중해만 제외하면 여러 다른 나라들에게 포위 된 것처럼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이 얼마나 전략적인 요충지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서 존재하여 있고 최근에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이름을 갖게 된 국가가 함께 있어서 날이면 날마다 싸우고 있는 것이다. 왜 싸우는가? 서로 자기들이 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천년을 살아왔으므로 세계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든 것은 하나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나가던지 조용히 살던지 양자택일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우리야말로 수천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었으므로 우리 땅인데 어느날 갑자기 유태인들이 몰려와서 살기 시작하더니 나라를 선포하고 자기들 영토이니 그렇게 알라고 한다면서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은 대체로 요르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넘어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기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유태인들이 들어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고 살자 그렇다고 이스라엘 국민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졸지에 나라도 없고 영토도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되찾자고 해서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O)을 조직하여 투쟁하기 시작한 것이 현대판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이다. 그후 팔레스타인해방전선은 '우리도 정부를 가지자'라고 생각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근자에는 여차여차해서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State of Palestine)이라는 국가이다. 영토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의 몇 개 지역을 영토로 삼고 있다. 그런데 가자지구는 아직도 이스라엘이 상당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국가'에게 완전히 통치권이 넘어간 상태는 아니다. '팔레스타인 국가'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2013년 유엔에서였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멕시코 등등 많은 나라들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사태는 아직도 복잡하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오랜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내와야 했다. 이 지역은 종교적, 문화적, 상업적, 정치적으로 마치 교차로와 같아서 그야말로 복잡한 이력을 지녀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아브라함 신앙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팔레스타인의 과거 역사를 짚어보자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간단히만 말하자면 이 지역은 과거에 수많은 민족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점령했던 곳이다. 고대 이집트, 가나안, 블레셋이라고 하는 필리스틴, 트예커, 고대 이스라엘, 아시리아(아수르), 바빌로니아(바빌론), 페르시아(파사), 고대 그리스, 로마, 비잔틴 제국, 초기의 무슬림(우마야드, 아바시드, 셀주크, 화티미드), 십자군, 후기 무슬림(아유비드, 맘루크, 오토만), 1차 대전 후에는 영국,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요르단의 하셰미트 왕국(요단강 서안지역), 이집트 공화국(가자 지구)이 지배하였다. 그리고 현대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요단강 서안에 설치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접경 철조망. 이스라엘 쪽에는 지뢰가 묻혀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더 이상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경고를 말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거의 맞먹는다. 선사시대로부터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농사를 짓고 문명을 발전시킨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독립적인 가나안 도시국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은 인근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크레테, 시리아(수리아)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 애초부터 얼마나 복잡한 문화를 지닌 지역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16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기 이집트 신왕국의 지배를 받아 마치 봉분왕 처럼 행세를 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13세기에 이르러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정확치 않다. 성서에 따르면 모세와 여호수아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애급)로부터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시나이 반도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지만 고고학자들은 분명히 그런것 같지는 않다고 내세우고 있다. 그러던 중에 남부 유럽에서 해양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일부인 필리스틴(Philistines)이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착했다. 말이 좋아서 해양생활이지 이들은 짐작컨대 서부 아나톨리아 또는 남부 유럽, 특히 에게해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침략하고 노략을 일삼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청동시기 말기에 아나톨리아, 시리아, 가나안, 키프러스(구브로), 이집트(애굽) 등을 침략하였고 그때 현재의 팔레스타인도 침략하여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후 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 통일 왕국이 기원전 1020년에 수립되었으나 100년도 되지 않아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리 되었다.

 

이스라엘-요르단 국경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경비하고 있다.

 

기원전 740년 경 팔레스타인 지역은 신아시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신바빌로니아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왕(나부코도노소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수많은 이스라엘 지도층 사람들을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아간 것으로 되어있다.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라는 유명한 합창이 나오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는 그 당시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케메니드 제국(Arcaemenid Empire) 때에야 겨우 돌아갈수 있었다. 기원전 330년 경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했다. 그후 이 지역을 놓고 수없는 전쟁이 벌이지다가 기원전 219년부터 200년까지는 셀루시드 제국이 점령했다. 이때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싸워서 셀루시드 병사들을 물리쳤다. '보아라 용사 돌아온다'(See conquring Hero comes)라는 합창이 나오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는 그때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후 셀루시드 제국에서는 내전이 일어났고 그 틈을 타서 유대 산악지대에 있던 하스몬 가문이 셀루시드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과감히 선언했다. 이어 하스몬 가문이 주도하여 유대-사마리아-이두메아-이투리아-갈리리를 규합하는 일종의 연맹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유대는 원래 유대 산악지대의 작은 부족국가였으나 그후로 세력을 확장하여 다른 모든 부족 국가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유대가 마치 팔레스타인 지역을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제국이 유대를 정복했다. 로마제국은 종전의 하스몬 왕국을 다섯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그리고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의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추방하였다. 기원후 132년에는 로마제국의 하드리아 황제가 유대와 갈릴리를 통합하여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라는 이름의 새로운 지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일리아라는 말은 하드리아 황제의 출신지의 이름이다.

 

로마제국에서는 내란이 일어나서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 대제가 반란군을 물리치고 제국을 안정시켰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승전 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것은 역사적으로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을 핍박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나저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나중에 성녀로 시성될 만큼 대단한 기독교 신앙의 인물이어서 예루살렘 성지를 찾아가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유물들을 발굴하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교회들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로부터 팔레스타인은 세계 각지로부터 수도승들과 신학자들이 평생에 제발 한 번 가보고 싶은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이때 사마리아 봉기가 일어났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아랍 사람들이 더 위축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기원후 7세기에 마호메트(570-632)가 나타나서 이슬람교가 생기자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기독교 나라들과 자주 전쟁을 일으켰다. 이슬람 신자들인 무슬림들은 우선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그러던 중 636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복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속하여 있는 성지 예루살렘은 유태교의 성지이기도 했고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했지만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했다. 이슬람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이스마일을 제사 지내려던 장소가 예루살렘이며(현재의 바위 돔 사원) 예언자 마호메트가 승천한 곳도 바로 그 장소라고 믿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가 된 것이다. 661년에 마호메트의 후계자라는 알리가 암살을 당하자 무아위야(Muawiyah) 1세가 이슬람세계의 칼리프로서 예루살렘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 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사원인 '바위 돔'(바위 사원: Dome of the Rock: Masjid Qubbat As-Sakhrah)이 세워졌다. '바위 돔'의 장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지내려고 했던 바위가 있다는 곳이다. 아무튼 '바위 돔'이라고 하던, 바위 돔 사원이라고 하던 이 건물은 이슬람 건축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로서 이슬람의 성지가 되어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 돔 사원'

 

팔레스타인은 878년도부터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이집트의 관할 아래에 있으면서 자치구역처럼 지내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툴룬 왕조가 시작되었다. 툴룬 왕조를 시작한 아마드 이븐 툴룬,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한 이크쉬디드는 모두 예루살렘에 묘소가 있다. 그정도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관계도 깊었다. 969년에는 화티미드(Fatimids)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그리고 1073년에는 오늘날 터키를 이룬 셀주크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그러다가 1098년에 화티미드가 다시 정복했고 화티미드는 1099년에 십자군이 와서 공략하는 바람에 예루살렘을 내주고 말았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여 통치한 것은 거의 100년에 이른다. 그러다가 1187년에 아유비드(Ayyubids) 왕조를 시작한 살라딘의 군대가 밀려오는 바람에 내주고 물러났다. 그로부터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아유비드가 지배하였다. 여기서 잠시 화티미드와 아유비드가 무엇인지 설명하자면, 화티미드는 모하메트의 유일한 딸인 화티마를 추종하거나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무슬림으로서 실은 시아파 이스람에 해당한다. 화티미드는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세력을 펼치다가 10세기말부터 12세기 초까지는 중동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반면, 아유비드는 쿠르드 오리진의 무슬림 왕조로서 화티미드의 이집트 총독인 살라딘이 스르로 술탄이라고 칭하고 창시한 왕조이다. 아유비드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발흥하였다가 12-13세기에는 중동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거대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들에게 빼앗기자 유럽에서는 다시 십자군을 조직하여 성지를 탈환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래서 제7차 십자군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역시 별다른 활동도 하지 못하고 지리멸멸하게 되었다. 제7차 십자군의 여파로 이집트에서는 맘루크 술탄 왕조(Mamluk Sultanate)가 생겼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자 십자군의 잔당들은 지중해 쪽으로 물러나서 그곳에서 거의 100년 동안 연명하며 지냈다.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을 이번에는 동방의 몽고 제국이 공격하였다. 몽골 족들이 팔레스타인에처음으로 발을 디뎌 놓은 것은 1260년이었다. 몽골 군대의 사령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도인 키트부가(Kitbuga)였다.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고 있던 이집트의 이슬람은 1486년에 맘루크와 오토만 터키가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친선을 다짐하자 곤란한 형편이었는데 마침내 1516년에 오토만 터키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자 쫓겨나고 말았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다시 정복한 것은 그로부터 약 3백년이 지난 1832년이었다. 그러는데 영국이 중재를 자처하고 나서서 1840년에 레반트(Levant) 지역, 즉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 동부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의 통치권을 오토만 터키에게 돌려주었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문제가 많았다. 그 기간동안에 팔레스타인에서는 두번의 커다란 봉기가 일어났었다. 하나는 1834년의 아랍 농민 봉기였고 다른 하나는 1838년의 드루즈(Druze) 봉기였다. 이들 봉기는 커다란 효과를 보지 못했지만 반면에 이집트에 있던 아랍 농민들과 과거에 알리를 추종하던 병사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 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때문에 팔레스타인은 갑자기 인구가 많아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가자지구가 그러했다. 그러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시온주의라는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각지에서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고향을 찾아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히브리어를 부활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영국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발푸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영국은 군대를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현재의 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은 1922년에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신탁통치하도록 양해했다. 그리하여 요단강 서안지구는 영국이 직접 관리하였고 요단강 동편은 트랜스조단(Transjordan)이라고 하는 반자치 지구로 만들어서 하쉬마이트 가문이 통치토록 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국민주의적 봉기를 하였다. 이들 아랍인들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오는 것도 당연히 반대하였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저항은 영국에 의해 극심하게 압박을 받았다.

 

2차 대전도 끝났다. 나치에 의해서 유태인들 수백만명이 희생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홀로코스트였다. 요행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은 유태인들은 고향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은 1947년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유엔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유태 독립국가와 아랍 독립국가로 분할하는 사항을 투표로 결정키로 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특별국제기구를 만들어 통치토록 하는 안도 상정되었다. 아랍측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하며 유엔안을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유태인들은 1948년 5월에 이스라엘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을 지지하는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유엔이 제안한 분할계획 보다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요르단은 오늘날 서안(웨스트 뱅크)이라고 알려진 지역을 장악했다. 사태가 이쯤되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밥도 못먹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8년 9월에 가자 지구에서 전팔레스타인정부(All-Palestine Government)를 선포했다. 이스라엘 측은 이스라엘이 이미 자기들의 영토라고 선언한 지역 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마을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를 나크바(Nakba)라고 한다. '혼돈'이라는 뜻이다. 나크바를 통해서 7만채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집들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70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집을 잃고 원래부터 살고 있던 마을에서 쫓겨나야 했다. 집을 잃은 이들은 광야에서 텐트 생활을 하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1948년부터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과의 전쟁 중에 또는 그 이후에 아랍 나라들에서 난민 취급을 받으며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기들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너도 나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것이 과연 적법한 것인지, 어째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인지 등등은 줄곧 문제점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가자 지구가 이스라엘의 위협에 놓이게 되자 가자에 있던 전팔레스타인정부(아랍어로는 Hukumat 'umum Filastin)는 카이로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가자지구가 이집트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카이로에 온 전팔레스타인정부를 필요없는 존재라고 해서 해산시켰다. 이집트 군부는 가자에 대한 군사정치를 실시하였다. 팔레스타인 국민운동은 다시 진영을 갖추어야 했다. 가자지구와 요단강 서안지역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두곳에 대한 연고권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해야 했다. 이와 함께 인근 나라들에 산재하여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주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후 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과 요단강 서안을 요르단으로부터 가져갔으며 이집트로부터는 가자 지구를 찾아 갔다. 유엔을 포함하여 많은 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비난했지만 이스라엘은 국가의 생존에 관한 사항이라서 양보를 할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이스라엘은 새롭게 차지한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고 유태인들이 가서 살도록 했다.

 

요단강 서안의 유태인 정착촌. 마치 요새같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고향을 찾아주기 위해 국제적으로 동분서주했다. 국제사회는 그런 PLO에 대하여 일종의 동정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석유때문에 중동국가들을 무시할수 없는 처지가 되자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하여도 인식을 새롭게 가지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대표하는 정식 기구가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한편,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이스라엘에 항거하는 팔레스타인 봉기(Palestinian Intifada)가 계속되었다. 그것을 제1차 봉기라고 부른다. 그 저항운동은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Oslo Peace Accords)로서 막을 내리긴 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오슬로 협정에 의해 '팔레스타인국가당국'(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 PNA 또는 간단히 PA)이 생겨났다.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타결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팔레스타인당국'은 가자지구의 일부와 요단강 서안지구(동예루살렘은 제외)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대표하는 기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 봉기는 2000년에 시작하여 2005년까지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로부터 철수했으나 반면에 요단강 서안에는 철조망을 설치했다. 한편, 팔레스타인당국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입법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총선을 실시했고 강성인 하마스(Hamas)가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마스는 2007년부터 가자 지구를 콘트롤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가 세력을 확장하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도발을 끊이지 않자 2008년과 2009년, 그리고 2014년에 가자 지구에 대한 군사작전을 펼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같은 군사행동은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불러온 것이기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자 시가지

 

팔레스타인당국은 자기들도 남들처럼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그 하나가 유네스코에 가입한 것이다. 팔레스타인당국은 2011년 10월에 유네스코에 '팔레스타인 국가'(State of Palestine)라는 명칭으로 정식회원에 가입하였다. 이듬해인 2012년에는 '팔레스타인 국가'가 유엔 총회에 비회원 옵서버 국가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것은 유엔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하나의 독립 국가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이후 '팔레스타인 국가'는 유엔의 다른 기구들에 합류할 기회가 생겼다. 이것이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부족하더라도 넓은 양해를 바란다.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기를 흔들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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