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극 집중탐구/수난극이 뭐길래

오버라머가우의 '수난극'

정준극 2015. 4. 19. 17:49

독일 오버라머가우의 '수난극'

Passionsspiele in Oberammergau(Passion Play in Oberammergau)

 

부활절의 1주일 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른다. 종려주일을 지킨 다음날 부터이다. 이 기간에는 세계 각지에서 고난주간 행사가 열린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주제로 연극을 공연하는 것은 중요한 행사의 하나이다. 그런 연극을 Passion Play(수난극 또는 고난 연극)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수난극’은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 있는 오버라머가우(Oberammergau)에서의 연극이다. 현존하는 ‘수난극’으로서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일찍이 1634년부터 공연되어왔다. 또 한가지 오버라머가우의 ‘수난극’이 특별하다는 것은 무려 2천명에 이르는 마을 주민들이 연극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전체 주민이 예전에는 3천명도 채 되지 않았고 지금도 5천명 남짓이므로 그런 중에 주민 2천여명이 연극에 참석한다는 것은 대단한 규모가 아닐수 없다. 오버라머가우의 주민들은 주로 배우로서 고난 행사에 참여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으로서, 무대장치를 돕는 사람으로서도 ‘수난극’에 참여한다. 오버라머가우는 뮌헨 남쪽,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지대에 있는 마을로서 ‘고난 연극’ 이외에도 NATO 학교로 유명하다. 또한 목각 제품은 오버라머가우의 자랑꺼리이다. 주로 성상(聖像)들을 제작한다. [참고사항: 2011년 부활주일은 4월 24일이다.] 오버라머가우 주민들의 수난극 참여노력은 가상하다. 우선 수난극에 참여하려면 오버라머가우에서 20년 이상을 산 토박이여야 한다. 1년전에 이사온 사람이 연극에 참가하겠다면 미안하지만 '안됩니다. 나중에...'이다. 또 한가지 조건이 있다. 연극참가자의 머리나 수염은 가발이나 인조수염이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연극참가자로 선정되면 7개월전부터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깎지 않는다. 완전 자연산!

 

오버라머가우에서의 '고난 연극'의 한 장면

 

오버라머가우가 ‘고난 연극’을 시작한 데에는 유래가 있다. 30년 전쟁 이후 1630년대에 이 마을에도 흑사병의 일종인 페스트가 번져 주민들이 고통을 받았다. 어른의 사망률은 1632년 10월에 한 사람이었는데 1633년 3월에는 20명으로 늘어날 정도였다. 마을의 각 가정에서는 거의 한 사람씩 흑사병으로 죽어나갔다. 주민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만일 페스트를 막아 준다면 매 10년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연극을 공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는지 몇 달후인 1633년 6월에는 단 한 사람만 사망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호하여 주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약속대로 우선 이듬해부터 대규모의 ‘고난 연극’을 시작하였다. 첫 연극에는 마을 주민 약 2천명이 참여하였다. 정말 대규모였다. 당시 전체 마을 인구가 3천명이 조금 넘었던 것을 고려하면 주민들이 거의 모두 연극에 참여한 셈이다. 물론 대부분이 군중 역할이었지만 말이다. 1634년에 처음 시작한 ‘고난 연극’은 약속대로 매 10년 단위로 공연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부터는 편의상 1650년, 1660년, 1670년 식으로 매 10년 단위의 마지막 해에 연극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즉, 끝자리 숫자가 0으로 끝나는 해를 말한다. 가장 최근의 공연은 2010년이었다.

 

오버라머가우에서의 '고난 연극'의 한 장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1930년.

 

‘고난 연극’의 프로그램은 매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1 주일에 두세번 정도씩 진행한다. 2010년에는 5월 15일 주일에 시작하여 10월 3일 주일에 마지막 회를 공연하였다. 아무튼 이제 오버라머가우의 ‘고난 연극’은 매 10년이 시작되는 해에 5개월 기간으로 공연되고 있다. 다음번 공연은 2020년이므로 그 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면서 많이 찾아온다. 매 10년마다 공연을 갖지만 예외도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1922년에 공연을 했고 1934년에는 처음 ‘고난 연극’을 공연하겠다고 약속한지 3백주년을 기념하여서 특별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984년에는 ‘고난 연극’ 350주년 기념으로 공연을 가졌다. 예정된 해에 공연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1770년에는 로마 교황청과 바바리아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요셉의 종교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오버라머가우에서의 ‘고난 연극’이 금지된바 있다. 1780년에는 연극의 타이틀을 ‘신구약 성서 이야기’로 바꾸도록 했다. 새로운 선제후인 샤를르 테오도레는 ‘고난 연극’의 내용 중 상당부분이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는 점을 들어 공연을 금지했다. 1830년에는 독일의 가톨릭 교회가 바바리아에서의 모든 ‘고난 연극’을 중지토록 했다. 다만, 오버라머가우만 살아 남았다. 1940년에는 제2차 대전으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1950년에 공연 허락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미국점령군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오버라머가우의 고난 극장. 언제나 관객들로 넘쳐 난다.

 

‘고난 연극’이라고 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내용만 연극으로 공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표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지만 이밖에도 구약과 신약에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들도 행사의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예를 들면,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터 왕비의 청탁을 받아서 유태인들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는 이야기,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간 이야기,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Nehushtan이라고 함)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준 이야기 등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게 죽임을 당한 이야기,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낸 이야기,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이야기 등도 프로그램에 포함된다. 구약의 이야기와 신약의 이야기를 두루 섭렵함은 구약과 신약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프로그램의 형태는 대본이 마련된 연극, 뮤지컬, 합창, 해설자가 별도로 있는 무언극 등이다.

 

1871년 '고난 연극'의 한 장면.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연극이다.

 

수많은 주민들이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 각지로부터 이 연극을 보기 위해 일부러 오버라머가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독일 국내와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에서 온다. 독일의 루터교단은 오버라머가우 방문을 아예 고정 프로그램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한 해에 연인원 40-50만 명이 찾아온다. 가장 많이 찾아온 경우는 53만 명이었다. 주로 단체 방문자들이다. 여행사 또는 교회를 포함한 종교단체가 주관하여 단체로 찾아와서 보통 1주일 이상씩 체류한다. 그럴 경우, 교통비를 제외하고 약 3천불이 든다. ‘고난 연극’의 공연 시간은 통상 일곱 시간이다. 그러므로 중간에 식사를 하는 시간이 배려된다. ‘고난 연극’은 시작한 후 처음 몇 회까지 무료였지만 1790년 이후로 입장료를 받는다.

 

오버라머가우의 교구교회. 초창기에는 이 교회에서 고난 연극을 공연하였다.

 

1634년에 첫 ‘고난 연극’은 오버라머가우 교구교회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너무 좁았다. 교회묘지로 사용했던 공터에서 공연키로 했다. 이곳은 30년 전쟁 이후 페스트로 사망한 주민들이 주로 묻힌 곳이어서 의미가 심장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공동묘지 공터도 너무 비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인근에 공지가 있어서 그곳에 무대를 세우고 연극을 공연했다. ‘고난 연극’ 전용극장이 생긴 것은 1890년이었다. 1900년의 공연은 새로 건축한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4천명이 관람할수 있는 규모였다. 1930년과 1934년의 공연을 위해 시설을 확장하였다. 비록 건물 자체는 볼품 없고 불편하지만 음향과 무대를 볼수 있는 시각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1990년 공연이 끝난 후에는 실내와 현관부분의 개축공사가 있었다. 지금은 극장의 마루 밑에서 히팅을 하는 시스템까지 갖추었다. 오늘날 오버라머가우의 ‘고난 연극’ 극장은 4천 7백명을 수용할 수 있다.

 

오버라머가우에 최근 완성된 '그리스도 고난 극장'

 

‘고난 연극’의 극본을 보면 과거에는 반유태주의적인 요소가 눈에 띠었다. 히틀러도 오버라머가우의 ‘고난 연극’에 나타난 반유태적 정서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오버라머가우 관계자와 유태인 기관이 서로 협의하여 반유태적 요소를 삭제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유태인들의 견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인으로 활동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태인으로서 살았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새로운 연극의 대본을 보면, 예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 올때에 한 손에 토라(Torah)를 들고 ‘셰마 이스라엘’(Shema Yisrael)이라는 기도문을 낭송하며 이에 따라 무대 위의 대중들도 ‘셰마 이스라엘’에 응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셰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뜻으로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기도할 때에 이 구절을 먼저 암송한다. 이는 신명기 6장 4절에 기록된바 ‘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유태인들은 자녀들에게 유태교를 가르칠 때에도 이 구절부터 암송토록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슬람교도들이 회의를 시작한다든지, 식사를 시작한다든지 등등 무슨 일을 처음 시작할 때에 '비스밀라'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고난 연극’에서 예수께서 ‘셰마 이스라엘’을 소리쳐 암송토록 한 것은 유태교의 관습을 존중한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누면서 키두쉬(Kiddush)라고 축복하고 또한 떡을 떼어 주면서 하모치(Hamotzi)라고 축복한다. 이는 유태인들이 안식일이나 또는 중요한 절기에 포도주와 떡에 대하여 축복을 내리는 용어이다. 이를 비추어 보아 ‘고난 연극’은 예수께서 모든 일에 유태인으로서의 관습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밖에도 과거의 극본에 비하여 수정된 내용들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일부 제사장들의 이름을 신약시대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면 드메트리오스, 알렉산더, 바키데스 등이다.

- 예수께서 채찍을 들어 쫓아낸 성전 장사꾼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다.

- 랍비를 제외하였으며 랍비의 역할은 다른 사람이 맡도록 했다.

- 사람들이 예수를 랍비 예수아(Rabbi Yeshua)라고 부르도록 했다.

- 예수는 연극에서 간혹 히브리어를 직접 사용하도록 했다.

- 유태인들은 자기들끼리 예수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유태주의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 빌라도는 더욱 폭군처럼 표현되었다. 대사에서도 그런 점을 알수 있다.

- 빌라도의 궁전 밖에 있는 군중들 중에는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들어 있도록 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분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외침도 들리도록 했다.

- 마태복음 27장 25절에 나오는 말씀인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는 삭제하였다. 그리고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라고 말했다는 것도 삭제하였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히브리어로 포도주와 떡에 축복을 내리는 것으로 만들었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오버라머가우 마을 전경. 코펠 산에서 내려다 봄.

 

1934년의 '고난 연극'은 이 연극을 시작한 때로부터 300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행사였다. 1934년은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은지 1년이 지난 때였다. 나치는 '고난 연극'의 내용이 유태인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해서 은근히 고무하였다. 그리고 나치는 1934년의 '고난 연극' 포스터에 Deutschland ruft dich!(독일은 그대를 부른다!)라는 표어를 넣게 하였다. '고난 연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표어였지만 나치의 표어였기 때문에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어 나치는 단체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독일의 각 지역에서 오버라머가우의 '고난 연극'을 보러 오도록 했다.  특히 Kraft durch Freude(기쁨을 통한 힘)라는 타이틀의 프로그램에 가입하면 단체여행에서 교통비, 연극 입장료, 숙박비 등을 할인해 주기까지 했다. 히틀러도 일부러 오버라머가우의 '고난 연극'을 보러 왔었다. 그는 연극을 보고 난후 아마 이 행사를 반유태인 프로그램에 포함키로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치는 이 연극을 겉으로는 '농민들의 드라마'라고 규정하고 민속적인 의미를 가미하여 '대지의 힘에 의해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고 선전했다.

 

오버라머가우는 목각 성상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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