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후스 전쟁 총점검

5차에 걸친 반후스 십자군

정준극 2017. 9. 9. 15:20

5차에 걸친 반후스 십자군

후스파 승리의 요인: 봐겐부르크(Wagenburg) 전술


봐겐부르크 진영의 모델. 마차로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후스파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와 싸우는데 있어서 사령관이 훌륭했던지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서 그랬는지 하여튼 전투마다 거의 모두 승리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른바 봐겐부르크(Wagenburg) 전술이었다. 독일어의 봐겐부르크라는 말은 봐겐(Wagen)과 부르크(Burg)를 합친 말로서 '마차 요새' 또는 '마차 성'이라는 뜻이다. 후스파 군대는 전투를 위해 마차를 둥근 원이나 네모 형태로 배치하였다. 마치 하나의 요새처럼 진영을 설치한 것이다. 마차의 바퀴는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마차 방어선을 뚫고 지나가기가 힘들다. 마차 하나에는 대력 16-22명이 배치되었다. 그중에서 4-8명은 궁수이고 2명은 소총사수이며 6-8명은 창이나 도리깨 같은 무기를 지닌 병사였다. 쇠도리깨는 후스파의 대표적 무기였다. 그리고 방패를 든 병사가 2명, 나머니 2명은 마부였다. 후스파의 전투는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 단계는 방어이고 둘째 단계는 반격이다. 마차 진영은 되도록이면 적군에게 가깝게 두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마차에 설치된 대포를 쏘아서 적들을 교란시켰다. 적들은 가만히 있으면 대포알에 맞아서 죽을 것이므로 아예 앞으로 나와서 전투에 참여한다. 적군은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보병보다는 기병대를 등장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기병대가 말을 타고 돌격해 오면 마차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쏘거나 총을 쏘아 쓰러트리며 더 가까이 오면 슈류탄을 던져 쓰러 트린다. 사수들은 기병대가 달려오면 먼저 말부터 쓰러트렸다. 그러면 말에 탔던 기사들도 쓰러진다.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면 마차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의 긴 창으로 찔러 죽인다. 이렇게 해서 적군의 사기가 떨어지면 두번째 단계로 들어간다. 대반격이다. 마차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과 창병들이 쏟아져 나와서 공격한다. 공격할 때에는 적진의 양날개부터 공격하고 차츰 중앙으로 조여 들어간다. 적군은 후퇴를 외칠수 밖에 없다. 뒤에 처진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므로 보병의 타겟이 된다. 후스파 군대는 포로를 잡지 않는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적군이라고 하면 하나도 남김 없이 죽이겠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무서워서 도망가기에 바뻤다.


봐겐부르크 전투. 후스파는 소총을 많이 이용했다. 높은 데서 방어하니 쉬웠다.


다시 보헤미아 왕국의 벤체슬라우스 왕이 갑자기 죽은 1419년으로 돌아가자. 벤체슬라우스가 죽자 보헤미아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나저나 벤체슬라우스 왕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물론 바바리아 출신의 소피아 왕비가 섭정을 하게 되어 그나마 겉으로는 겨우 안정을 찾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선 백성들과 상당수 귀족들은 소피아 왕비가 보헤미아 출신이 아니라 바바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싫어했다. 이 때에 헝가리 왕 겸 로마왕(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갖기 전의 호칭)인 지기스문트가 죽은 벤체슬라우스 왕의 형이랍시고 자기야 말로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할 적법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에는 보헤미아의 왕위가 후계자에 의해 계승되는 것인지 또는 선출하는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지기스문트의 보헤미아 왕위 주장은 유야무야되었고 왕비인 소피아가 섭정으로 권세를 잡게 되었다. 지기스문트로서는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양보할 입장이 아니었다. 우선 보헤미아의 반정부, 즉 후스파를 소탕하면 그 공로로 보헤미아 왕국에 대한 어떤 연고권을 가질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기스문트는 로마 교회를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었다. 교황 마르틴 5세는 지기스문트로부터 신세를 진것도 있고 해서 지기스문트를 어떻게 해서든지 돕고자 했다. 교황은 지기스문트의 의중을 알고는 1420년 3월에 칙령을 내려서 십자군을 구성하자고 주장했다. 교황은 십자군의 임무가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 추종세력과 후스 추종세력, 그리고 기타 이단들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에 따라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독일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 유럽 여러 지역에서 모집한 군대를 거느리고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데려온 군대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별로 할일도 없어서 전쟁에 나가서 모험이나 해보자고 나선 사람들이며 전쟁에 나가면 마음껏 약탈할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그것을 1차 십자군이라고 불렀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려도 모인 십자군은 이교도와의 싸움이었는데 이번 십자군은 결국 같은 가톨릭 끼리의 싸움이었다. 아무튼 1420년의 십자군을 '제1차 반후스파 십자군'(The First Anti-Hussite Crusade)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프라하 구시가지와 카를교.


대개의 전쟁이 그렇듯이 처음 얼마 동안은 사령관이 부하 장군들과 함께 구경이나 하면서 싸우다가 이어서 평화협상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후스 전쟁도 그런 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세는 오히려 신성로마제국 측이 불리했다. 후스파는 민생을 생각해서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후스파는 '프라하 4개 조항'(Four Articles of Prague)이라고 불리는 요구사항을 만들어서 제국 측에 내밀었다. 이 문서에 사실상 후스파의 신앙적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 번역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헤미아에서 주의 종 사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자유스럽게 올바른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 듣도록 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제들이 강론할 때에나 미사를 집전할 때에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을수가 없었다.)

2) 성만찬은 우리 구주가 말씀하시고 행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 두가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자유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일반 신도들에게는 떡만 주었고 포도주는 사제들에게 주었다. 그것을 일반 신도들도 두가지를 다 받아 먹을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3)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하여서 소유하고 있는 부유함과 세상 물질에 대한 세속적인 권력은 내려 놓아야 하고 내놓아야 한다. 사제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했던 것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하고 규칙을 따라야 한다. (사제들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산을 사제들로부터 취하여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4)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인간적인 죄악, 특히 모든 공공의 질서를 파괴한 것은 계층을 불문하고 정당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금지되어야 하고 근절되어야 한다.


이 네가지 요구사항은 사실 후스파의 교리를 압축한 것이다. 지기스문트는 이같은 네가지 요구를 하나도 들어 줄수 없다고 거부했다. 지기스문트는 교황청과 이 문제를 상의했는데 교황청은 후스의 요구사항들이 교황의 권위를 무력화시키는 편파적인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잠시나마 화해 무드였던 상황은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그러는 중에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1420년 7월 비트코프 힐(Vitkov Hill) 전투에서 패배하여 또 다시 권위가 손상되었다.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의 왕위를 주장하다가 별 소득이 없자 프라하에서 퇴각하였다. 그러나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보헤미아의 중요한 요새 겸 성인 비세흐라드(Vysehrad)와 흐라드차니(Hradcany)를 점거하고 있었다. 프라하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후스파 군대는 1420년 10월에 지기스문트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비세흐라드 성을 포위하고 공격의 기회만 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흐라드차니 요세도 포위 당했다. 지기스문트는 비세흐라드와 흐라드차니에 포위되어 있는 군대를 구원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또 다시 11월 1일 후스파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두 요새에 있던 지기스문트의 군대는 얼마 가지 못해서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서 조건부로 항복하였다. 그런 일이 있는지 얼마 후에는 사실상 보헤미아 전지역이 후스파의 손에 떨어졌다.


지기스문트 군대가 또 다시 패배한 빅토르 힐 전투


이상이 첫번째 반후스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번엔 두번째 반후스 십자군에 대한 것이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것 처럼 무슨 모임이 성립되면 당연히 그 안에서 편이 갈라져서 세력을 서로 잡으려는 습성이 있다. 후스파 봉기도 그렇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승리를 몇번 하자 후스파는 그것을 이용해서 더 발전적으로 행동할 생각은 못하고 서로 파가 갈라져서 내분을 일으키는데 주력했다. 프라하에서는 사제인 얀 첼리브스키라는 사람이 후스파의 지도자로 나섰다. 시민들 중에서 서민층을 포섭해서 권력을 잡았다. 타보르라는 새로운 지명에서 세력을 키우던 후스파는 얀 치츠카 장군의 지휘아래에 들어 있었으나 치츠카 장군이 지나치게 엄격한 행동강령을 내세우는 바람에 힘들어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두번째 반후스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1421년 8월에 독일로부터 대규모 십자군이 보헤미아로 진군해서 후스파가 장악하고 있는 차테츠(Zatec)를 공성하였다. 그러나 공성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십자군이라고 자처하는 병사들은 후스파의 반격이 두려워서 후퇴하였다. 지기스문트는 독일에서 온 십자군들이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알지 못한채 그해 말에 단독으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보헤미아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쿠트나 호라(Kutna Hora)를 탈환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은 1422년 1월에 도이치브로드(Deutschbrod)의 전투에서 얀 치츠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독일 십자군도 패하고 지기스문트가 패하자 그로부터 보헤미아는 당분간이지만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자유스러웠다. 하지만 후스파 내에서의 갈등과 분규는 오히려 재연되었다. 각 분파간에 교리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틈을 타서 서로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분규가 심해졌다. 결과, 1422년 3월에 프라하 시의회는 서민층의 지도자라고 하는 얀 첼리브스키를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한편, 타보르에서는 보다 극단적인 후스파들이 치츠카 장군이 지나치게 독단적이며 강압적이라면서 반기를 들었다.


용맹한 얀 치츠카 장군. 그룬발트 전투


후스파들이 전투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요인 중에 하나는 폴란드로부터 수시로 지원을 받았던 것도 한 몫을 하였다. 후스파들은 폴란드에 신세를 진 것이다. 후스파 내에서 자꾸 분란만 일어나고 누구하나 뚜렷하게 지도자가 될만한 인물이 없자. 치츠카 장군은 보헤미아의 왕관을 폴란드의 블라디슬라브 2세 왕에게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보헤미아를 독일이나 헝가리 쪽에 맡기느니보다는 옆 나라인 폴란드에게 맡겨서 힘을 기르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브 2세는 그럴수가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치츠카 장군은 다시 보헤미아의 왕관을 블라디슬라브 의 사촌인 비타우투스(Vitautus)에게 맡기겠다고 제안했다. 비타우투스는 리투아니아 대공이었다. 비타우투스는 치츠카의 그런 제안을 수락하였다. 다만,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보헤미아의 후스파는 무조건 가톨릭 교회와 재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재결합이지 실제로는 무릎꿇고 들어와서 잘못 했다고 빌라는 것이었다. 치츠카로서는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시민들만 죽어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타우투스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1422년에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투스 개동을 대신해서 그의 사촌인 지기스문트 코리부트가 보헤미아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타보르파가 주도한 리투아니아 섭정 문제는 우트라퀴스트파도 인정하였고 프라하 시민들도 수락하였다. 그러나 섭정은 후스파들을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실패했다. 섭정은 타보르파와 다른 파들을 가톨릭 교회로 돌아가게 하려고 강압적인 방법도 동원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섭정에 대한 후스파들의 반발만 커졌다. 그러는 중에 로마 교황은 헝가리 왕이며 로마왕인 지기스문트로 하여금 후스파와의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1423년에 폴란드와 블라디슬라브와 보헤미아의 섭정으로 임명된 비타우투스와 '멜노협정'(Treaty of Melno)이라는 것을 체결했다. 그리고 비타우투스는 리투아니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비타우투스가 리투아니아로 돌아가자 타보르파가 중도의 우트라퀴스트를 무력공격하였다. 우트라퀴스트는 당시에 프라하를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프라거(Praguer)라고 불렸다. 한편, 타보르파는 치츠카 장군을 다시 사령관으로 초대하였다. 타보르파는 호리체(Horice) 전투에서 프라거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후 같은 후스파끼리 이렇게 싸우면 되겠느냐는 자각심이 생겨서 두 파는 휴전을 합의하였다.


후스 전쟁 때에는 벌판이나 다름 없던 곳이었다. 후스파들이 들어와서 정착하고는 타보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의 타보르 중심가


상황이 되자 로마 교황은 체면도 구기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보헤미아의 후스파들을 억누르고자 했다. 그래서 제3차 반후스 십자군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후스파 편이었는지 교황의 십자군은 또다시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 십자군에 병력을 보낸 각국의 군주들을 전투를 독려했지만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대는 이웃 사촌인 보헤미아를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독일에서 온 십자군은 후스파 군대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의견차이가 생기는 바람에 내부적으로 불화만 커졌다. 덴마크 왕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보헤미아로 가기 위해 독일로 진군하였는데 사정이 있어서 덴마크로 돌아갔다. 후스파들은 다른 나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게 되자 병력을 돌려서 모라비아를 공격하였다. 사실상 대다수 모라비아 사람들은 후스파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각 파간의 알륵과 불화로 후스파는 모라비아를 점령하지도 못한채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흐라데츠 크랄로베(Hradec Kralove)는 보헤미아의 큰 도시이다. 이 도시는 우트라퀴스트의 권한 아래에 있었으나 어느날 타보르파의 교리를 채택함으로서 우트라퀴스트에게 등을 돌렸다. 이들은 타보르파의 치츠카 장군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치츠카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흐라데츠 크랄로베의 우트라퀴스트파와 전투를 벌여 번번히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 1424년에는 프라하 인근의 리벤(Liben)에서 우트라퀴스트파와 타보르파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타보르파의 치츠카 장군이 1424년 10월에 세상을 떠나자 프로코프(Prokop the Great)가 사령관 자리를 맡았다. 한때 리투아니아 왕 블라디슬라브의 조카인 지기스문트 코리부트는 형인 블라디슬라브, 그리고 리투아니아 왕인 블라디슬라브의 사촌으로서 잠시 보헤미아의 섭정이었던 비타우타스를 의견을 무시하고 보헤미아로 와서 후스파들의 리더가 되었다.


프로코프(Prokop the Great)에게 항복하는 실레지아의 성


3차 반후스 십자군이 무위로 돌아가자 교황도 오기가 났는지 곧이어 4차 반후스 십자군의 출정을 선포하였다. 전과 마찬가지로 독일, 헝가리, 프랑스, 영국 등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1426년 6월에 다른 나라 군대가 보헤미아를 공격하자 보헤미아 측에서는 프로코프 장군과 후스파의 리더로 선출된 지기스문트 코리부트가 앞장서서 나가 싸워서 외국 군대를 격퇴하였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얀 치츠카 장군의 죽음은 여러가지로 후스파에게 불리하였다. 로마 교황인 마르틴 5세는 치츠카 장군이 없는 후스파 군대는 쇠약해 진 군대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틴 5세는 1427년에 또 다른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마르틴 5세 교황은 영국의 헨리 보포르트 추기경을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에 대한 교황청 특사로 임명하고 십자군을 이끌도록 했다. 헨리 보포르트 추기경이 이끄는 십자군은 탁소프(Tachov: 독일어로는 Tachau) 전투에서 후스파에게 패배하였다. 후스파는 내친 김에 군대를 나누어서 독일의 이곳저곳을 여러번 침공하였다. 하지만 영구히 점령하고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1427년에 후스파 내에서 참으로 생각치도 못했던 사건이 터졌다. 보헤미아와 프라하의 총독으로 임명된 코리부트가 후스파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에게 추항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프로코프와 함께 후스파 군대의 두 사령관이었던 코리부트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후스파는 코리부트를 처형하거나 축출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코리부트에게 충성을 맹세한 휘하 장병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후스파는 1428년에 코리부트를 석방하고 전투에 참가토록했다. 코리부트는 후스파 군대의 실제지아 침공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몇년후에는 자기의 병사들을 데리고 폴란드로 돌아갔다. 사실 코리부트와 부하들은 보헤미아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교황이 만일 보헤미라를 떠나지 않는다면 폴란드를 공격하는 십자군을 소집하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순종했다.         


오늘날의 탁소프 중심가. 14세기에 융성했던 타호프는 17세기에 대화재 이후 사양길에 접어 들었다.


이렇게 해서 후스파도 타격을 입었지만 로마 교황 측의 제4차 반후스 십자군도 별소득도 없이 흐지브지 되었다. 후스파로서는 죽어라고 싸워서 대체로 이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보일 정도로 소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편, 독일의 군주들은 후스파의 지나칠 정도로 민주적인 운영이 크게 마음에 걸렸다. 독일의 자기들 나라의 백성들이 후스파를 본 따서 민주적 절치니 무어니하고 떠들어 대면 골치아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군주들은 이제 그만 싸우고 평화를 지키자는 쪽으로 의견들을 모았다. 후스파들, 특히 우트라퀴스트파의 사제들도 평화에 대하여 호의적이었다. 그리하여 1431년 3월에 신성로마제국 측과 후스파 측이 협의하여 바젤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속으로야 어떤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후스파를 이단 또는 이방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단과의 협상은 할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사정이 사정이니만치 바젤 공의회를 양해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후스파는 바젤 공의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그동안 도외시하였던 동방정교회의 대표들은 물론 이밖에도 그리스도 교리를 신봉하는 모든 종파의 대표들도 참석토록 하자고 제안했다. 기독교라는 커다란 우산 아래에 있는 종파들이 모두 모여서 후스파의 평화 협상을 공인한다면 모양새가 좋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그같은 제안을 분연히 거절했다. 죽으면 죽었지 동방정교회는 또 무엇이고 기타 종파들은 또 무엇이냐면서 분개했다. 로마 교항청은 후스파가 가톨릭 교회에 절대 복종한다면 고려는 해 볼수 있지만 그렇다고 믿지는 말라고 말했다. 후스파가 기분나뻐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후스파가 바젤이고 무어고 다 집어 치자고 하자 로마 교황은 결연하게 제5차 반후스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오늘날의 바젤 구시가지. 중앙에 대성당이 보인다.


1431년 8월에 브란덴부르크 공국의 선제후인 프레데릭 1세가 교황청 특사인 세사리니 추기경과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 국경을 넘어왔다. 며칠 후에 십자군은 도마츨리체(Domazlice)에 도착하여 공성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로부터 또 며칠 후에는 명장 프로코프가 이끄는 후스파 구원병이 도착했다. 후스파 구원병은 폴란드의 후스파 병력 6천명과 함께였으니 기세가 대단했다. 이어 벌어진 도마츨리체 전투에서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후스파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후스파 병사들이 '너희 하나님의 전사들이여'(Ye Who are Warriors of God)라는 군가를 힘차게 부르자 그 노래를 들은 교황청 군대는 걸음아 나 살려라면서 도망치기에 바뻣다고 한다. 그러니 전투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1431년 10월 15일에 바젤 공의회가 열렸다. 바젤 공의회는 교황청이 주관하는 것으로서 후스파에게 공식 초청장을 보냈다. 이단이라고 하던 후스파를 교황청의 공식회의에 초청한 것이다. 후스파는 대표를 보내겠다고 했다가 안보내겠다고 했고 다시 안보내겠다고 했다가 보내겠다고 하기를 수차례나 거듭했다. 머참내 공의회가 오픈한지 거의 넉달만인 1433년 1월에 프로코프 장군이 인솔하는 후스파 대표가 바젤에 모습을 드러냈다. 밀고 땅기는 협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던중 보헤미아에서의 상황변화로 마침내 협상이 타결되었다. 상황변화라는 것은 타보르파와 우트라퀴스트파간에 그야말로 전쟁이 다시 불붙은 것이다. 이유는 내내 주도권 다툼이었다. 우트라퀴스트파로서는 바젤 회의에 타보르파가 후스파를 대표해서 사절단을 이끌도 참석한 것이 못내 못마땅했던 것이다. 프로코프 장군은 급히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양 진영간의 건곤일척의 전투는 1434년 5월 30일에 벌어졌다. 리파니(Lipany)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타보르파의 프로코프 장군이 전사했다. 타보르파 군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누가 이기고 지냐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후스파의 약화를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폴란드에서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폴란드의 후스파는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블라디슬라브 3세가 이끄는 폴란드의 왕군이 1439년에 그로트니키 전투에서 후스파를 완전히 패배시켰다. 이로써 폴란드에서의 호전적인 후스파 운동은 막을 내렸고 나아가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후스 전쟁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리파니 전투. 후스파의 내전이었다. 우트라퀴스트파가 승리했다. 이로서 보헤미아에서의 후스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쟁이 실제적으로 끝난지 2년 후인1436년에 로마 교회와 후스파 사이에 평화협정이 모라비아의 지흘라바(Jihlava)에서 마침내 체결되었다. 모라비아에스는 이글라우(Iglau)라고 부르는 이곳은 훗날 구스타브 말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해서 지기스문트 헝가리 왕이 후스파 대표와,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를 대표해서 프라하 대주교가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내용은 네가지였다. 후스파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었다.


1. 성만찬에서는 두가지, 즉 떡과 포도주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모든 기독교인들과 또한 이 두 나라의 신앙을 지지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유스럽게 제공되어야 한다.

2. 모든 인간적인 죄는 처벌을 받아야 하며 해당기관에 의해 근절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종, 또는 자격있는 집사들에 의해 자유스럽게 그리고 성실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4. 사제들은 세상적인 물질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후스 전쟁 이후 보헤미아 후스파의 주류는 우트라퀴스트파가 되었다. 타보르파는 리파니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타보르파의 중심지인 타보르는 우트라퀴스트파가 넘겨 받게 되었고 타보르에 있는 후스파 교회는 우트라퀴스트의 교리와 전례를 따르게 되었다. 후스파의 봉기는 독일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후스파의 봉기가 있는지 80여년이 지난 때에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1517년의 일이다. 훗날 우트라퀴스트파는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의 교리를 상당부분 채택하였다. 보헤미아의 후스파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로부터 50년 후에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개신교(Protestant)라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불려졌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왼쪽부터 얀 후스, 존 위클리프, 마르틴 루터, 존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