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후스 전쟁 총점검

보헤미아 왕국, 후스파

정준극 2017. 9. 13. 11:00

보헤미아 왕국(The Kingdom of Bohemia)


얀 후스가 활동했던 보헤미아 왕국은 어떤 나라인지 알아보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이다. 보헤미아 왕국은 체코어로는 체스케 크랄로브스트비(Ceské královstvi)라고 부른다. 독일어로는 쾨니히라이히 뵈멘(Königreich Böhmen)이다. 라틴어로는 레그눔 보헤미아에(Regnum Bohomeae)이다. 영어로는 간혹 체크 킹덤(Czech Kingdo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헤미아 왕국은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부 유럽에 있었던 군주국이다. 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의 전신이라고 보면 된다. 보헤미아 왕국은 중세로부터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나라였다. 보헤미아 왕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의 자격이 있었다. 보헤미아 왕은 보헤미아 이외에도 보헤미아 왕국령(Land of Bohemian Crown)에 속한 지역들을 통치하였다. 보헤미아 왕국령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지만 주로 모라비아, 실레지아, 루사티아(Lusatia), 작소니의 일부, 브란덴부르크, 바바리아 등지였다. 


보헤미아 왕국은 12세기에 보헤미아 공국의 프리미슬리드(Premyslid) 왕조가 설립하였다. 그후 룩셈부르그(Luxsembourg) 왕조, 야기엘로니아(Jagiellonia) 왕조에 이어 1526년부터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였고 합스부르크 이후의 합스부르크-로레인 왕조도 통치하였다. 보헤미아 왕 중에서 여러 명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는 14세기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도 역할을 했다. 보헤미아 왕국은 1806년에 합스부르크-로레인의 프란시스(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자 그 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1867년부터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에 속한 영토가 되었다. 그렇게 정세가 변하지만 보헤미아라는 명칭은 유지되어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도 와해되었지만 그 우산 아래에 있던 보헤미아 왕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보헤미아는 새로 설립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체코어(영어에서는 간혹 보헤미아어라고 함)는 1627년까지 보헤미아 왕국의 의회와 귀족들이 사용하는 주요 언어였다. 1627년이라고 하면 보헤미아 봉기가 진압된 후이다. 그후에는 독일어가 체코어와 똑같이 의회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보헤미아에는 13세기 이후부터 독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살았다. 그래서 독일어만 사용하는 지역들이 생겼다. 그후 19세기에 체코 국민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체코어를 주요 언어로 사용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왕실에서는 군주에 따라서 달랐지만 대체로 체코어, 독일어, 라틴어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프라하 구시가지와 몰다우


후스파(Hussites)


15세기에 보헤미아 왕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운동을 말하기도 하지만 체코의 개혁자인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후스파라고 한다. 체코어로는 Husite 또는 Kalisnici 라고 하는데 칼리스니치라는 말은 '성배의 사람들'(Chalice People)이라는 뜻이다. 얀 후스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보다 거의 1백년 전에 보헤미아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얀 후스는 마르틴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서 루터의 종교개혁에 크게 일조하였다. 후스파는 유럽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도록 한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의 하나였다. 후스를 따르는 무리들은 크게 우트라퀴스트파(Utraquist)와 타보르파(Taborite)의 두 지파로 나눈다. 하지만 또 다른 지파들도 있다. Adamites, Orebites, Orphans 등이다. 얀 후스는 지기스문트 헝가리 왕 겸 로마 왕이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종용하면서 안전을 보장하고 면책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참석했으나 결국은 공의회가 그를 이단으로 몰아서 화형에 처해졌다. 1415년 7월 6일의 일이었다. 이에 격분한 후스파들은 가톨릭 교회에 항거하였고 그것이 후스 전쟁(1419-1434)으로 발전하였다. 후스 전쟁이 끝난 후에 가톨릭은 우트라퀴스트파와 타보르파간의 분쟁에서 보다 온건한 우트라퀴스트파를 지원하여 보헤미아 내에서 후스파를 대표하는 지파로 만들었다. 그러나 1485년에 가톨릭과 후스파는 보헤미아에서 결국 결별하였다.


우트라퀴슴(Utraquism)


Utraquism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sub utraque specie 라는 용어에서 나왔다. '두 가지'라는 뜻이다. 우트라퀴슴은 또한 칼릭스티니슴(Calixtinism)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라틴어의 calix, 즉 잔(杯)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체코어로는 잔을 kalisnici라고 한다. 우트라퀴슴은 후스파의 기본되는 교리이다. 후스파는 네가지 교리를 내세웠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들도 떡과 포도주 두가지를 모두 받도록 해야 한다는 교리이다. 그때까지는 성만찬에서 일반 신도들은 떡만 받아 먹었으며 포도주는 성직자(사제)들만 받아 마셨다.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므로 일반 신도들도 떡은 물론 포도주도 받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우트라퀴스트(Utraquist) 또는 칼릭스타인(Kalixtines)이라고 한다. 성만찬에서 두가지 모두 받을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후스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다. 1414년에 프라하대학교(카렐대학교)의 야콥이라는 교수가 먼저 제안했다. 우트라퀴스트는 후스파 중에서 온건파에 속한다. 보다 극단적인 후스파는 타보르파이며 오르판파도 이에 속한다. 우트라퀴스트는 또한 프라하 파티()라고도 부른다. 후스 전쟁 이후에 우트라퀴스트는 결과적으로 교황청과 연합하였고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타보르파와 오르판파를 패배시켜서 보헤미아에서 후스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우트라퀴슴은 오늘날 로마 가톨릭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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