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준극 2018. 3. 10. 04:01

오스트리아와 독일


세계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독일뿐이다. 스위스도 독일어를 공용어로 쓴다고 하지만 실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로망슈(Romansh)의 4개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위스를 독일어만을 사용하는 나라라고 할수는 없다. 그리고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이란 나라도 독일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지만 전국민이라고 해야 4만명을 넘지 못하고 있는 소국이니 사실상 관심 밖이다. 아무튼 세계에서 온전히 독일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 즉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참으로 신통하게도 인류 역사상 전세계를 파국으로 몰고간 대규모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좋게 말해서 주인공, 나쁘게 말해서 장본인이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가 무슨 사연이 있어서 양대 전쟁의 주역이 되었는지는 생각해 볼만한 일다.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별개의 나라였지만 나치에 의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한 나라가 되었던 일이 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였다. 이 기간에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오스트리아는 나라를 잃고 독일의 제3제국에 속한 하나의 변방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주도했지만 오스트리아도 독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좋게 말해서는 동맹, 나쁘게 말해서는 공범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온전히 오스트리아에 의해서 발단된 것이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오늘날의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었다. 두 나라가 대타협을 통해서 하나의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1차 대전을 오스트리아가 시작했지만 실제로 주도하여 전쟁을 치룬 나라는 독일이었다. 당시에 독일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프러시아가 강대하여서 1차 대전의 주축이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결국 히틀러가 일으킨 것인데 그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히틀러의 아버지라는 사람도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히틀러의 어머니라는 사람도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2차대전 중의 노르만디 상륙작전. 1944. 6. 6.


얘기가 조금 빗나가서 미안하지만 기왕에 히틀러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두어마디만 더 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장본인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사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실은 히틀러가 유태계라는 주장도 있다는 것은 알리고 싶은 내용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라는 사람이었다. 마리아 쉬클그루버(Maria Schklgruber)라는 여인의 아들이었다.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마리아 쉬클그루버가 어머니인데 아버지는 누군지 모른다. 모르는게 아니라 기록상으로 아버지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사생아였다. 알로이스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그라츠(Graz) 교구교회의 출생기록에는 아버지의 이름은 없고 어머니의 이름만 적혀 있다. 그래서 어머니의 성을 따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라고 적혀 있다. 그러다가 알로이스의 어머니 마리아 쉬클그루버가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어린 알로이스는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의 아들로 입적이 되었다. 그런데 관할교회에서 출생기록부의 기재사항을 고치면서 담당 신부인지 누군지가 히들러(Hiedler)라는 단어를 히틀러(Hitler)라고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그로부터 알로이스 히들러는 알로이스 히틀러가 되었다. 그러면 알로이스 히틀러의 친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알로이스의 어머니, 즉 아돌프 히틀러의 할머니인 마리아 쉬클그루버는 그라츠에서 살면서 어떤 유태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했다. 그 유태인 집에 레오폴드 프랑켄버거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한 때의 기분으로 참하게 생긴 마리아 쉬클그루버에게 흑심을 품고 접근해서 결국 알로이스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로이스의 아버지, 즉 아돌프 히틀러의 할아버지는 유태인이라는 얘기다. 나치는 자기들의 지도자인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얘기가 나돌자 이 문제를 짚어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그라츠의 교회라는 교회의 기록부는 모두 뒤져보았지만 레오폴드 프랑켄버거라는 이름은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치는 따라서 위대한 지도자(휘러) 아돌프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건 그렇고,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공무원이었는데 일설에는 경찰서에서 서기로 일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 암 인 구시가지의 중심부. 브라우나우 암 인의 주민들은 관광객들 또는 NGO들이 몰려와서 히틀러 생가 앞에서 데모를 하고 난리를 부리는 것을 귀찮지만 참으면서 바라보고만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로이스 히틀러는 천성이 그런것인지 또는 여복이 많은 것인지 하여튼 세번이나 결혼했다.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인인 아돌프 히틀러는 알로이스 히틀러의 세번째 부인인 클라라 푈츨(Klara Pölzl)의 소생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부모인 알로이스와 클라라는 1885년에 결혼했다. 그때 알로이스는 48세였고 클라라는 25세였다. 다시 말해서 클라라는 알로이스보다 23년이나 아래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딸과 같은 여자와 결혼한 것이다. 히틀러의 아버지가 히틀러의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린 1885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구한말 고종의 시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지금의 중구 정동에 설립된 해라는 것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무 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한다면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여섯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2남 4녀였다. 순서대로 보면 구스타브, 이다, 오토, 아돌프, 에드문트, 파울라이다. 그러니까 아돌프 히틀러는 알로이스와 클라라의 네번째 자녀이며 아들로서는 셋째이다. 하지만 여섯 소생 중에서 네명은 장질부사 등으로 유아사망했다. 그래서 누이동생 파울라만이 생존했는데 파울라는 전쟁이 끝나자 히틀러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창피해서 살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이름을 바꾸고 지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서북쪽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히틀러가 원래 태어난 집은 없어졌고 대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장소는 그 장소이기 때문에 기념명판이 붙어 있으며 집 앞의 길에는 파치슴을 경고하는 돌비석이 자리잡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브라우나우 암 인에 있는 히틀러 생가. 집앞 길에는 기념석이 놓여 있다. 기념석에는 FU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NIE WIEDER PASCHISMUS MILLIONEN TOTE MAHNEN 이라고 적혀 있다. 굳이 번역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파치슴이 결코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 수백만명이 죽은 것을 참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1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공연히 2차 대전의 장본인인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에 시간을 할애해서 또 다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1차 대전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잘 아는 대로 1914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음 황제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부인과 함께 제국에 속해 있는 영토인 세르비아를 순방하다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쏜 총탄에 맞아서 부부가 참변을 당하자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발발되었다. 그러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무엇이며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누구이며 또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왜 황태자라고 부르지 않고 황제 계승자 또는 간단히 대공이라고 부르는지,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제국의 황위 계승자가 누가 되었는지 등등을 간략하나마 설명코자 한다. 오스트리아의 유구한 역사에 대하여는 굳이 처음부터 현재까지 모두 설명할 능력이 되지 못하여서 1804년 대공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가 제국으로 승격된 이야기부터 시작코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오스트리아를 본거지로 삼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였다. 18세기 말에 들어와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유럽 제패의 야망을 드러내자 신성로마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던 나라들은 나폴레옹의 군화에 짓밟히게 되지나 않을까해서 전전긍긍하였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남쪽으로는 저 멀리 이집트까지, 동쪽으로는 저 멀리 모스크바까지 군기를 펄럭이고 대포를 쏘아대며 위세를 보였다. 유럽의 거의 전역이 나폴레옹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는 대변혁의 시대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프란츠) 2세는 1806년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위세에 눌려서, 그리고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마침내 7백년 역사의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스스로 내렸다. 이에 앞서 프란시스 2세는 1804년에 그동안 공국의 신분에 불과했던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격상하고 프란시스 1세로서 초대 황제가 되었다. 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이 페르디난트 1세로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사람만 좋아서 '선한 왕'이라는 별명까지 들었지만 요동치는 구라파 정세에 대응하는 능력은 부족하였다. 그래서 하다못해 국민들 사이에서는 '페르디난트, 바보 아니야?'라는 소리까지 은밀하게 나왔다. 그나저나 페르디난트 1세는 나이 들어서 은퇴할 지경이 되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내가 죽으면 네가 황제가 되거라'라고 말했지만 동생은 동생대로 '아니 나도 나이가 들어서 움직거리기도 싫은데 황제를 하라니 말도 안된다'면서 극구 사양했다. 그래서 여차여차해서 동생의 아들로서 아직 20도 안된 프란츠 요제프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서 지명하였다. 프란츠 요제프(1830-1916)는 1848년에 황제로 즉위하여 1차 대전히 한창이던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무려 68년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 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로서 통치하였다. 향년 86세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시스(프란츠)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였다. 엘리자베트 황비가 바로 씨씨라는 애칭으로 불린 아름다운 왕비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항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씨씨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는 당연히 다음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였다.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루돌프는 천성이 놀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불만이 그렇게도 많아서인지 술, 여자, 사냥 등 그저 주색잡기에 몰두하였다. 아마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너무나 오랫동안 황제를 하는 바람에 자기는 언제 황제가 될지 모르므로 그런 의미에서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루돌프의 부인인 스테파니는 허구헌날 남편 루돌프에게 '아니, 당신 아버지는 왜 그렇게도 오래 살아요. 지겨워서 죽겠네'라면서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 루돌프는 어느날 예쁘고 순진한 마리아라는 아가씨를 만나서 아마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참사랑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인이 있고 딸도 있는 입장에서 마리아와는 이룰수 없는 사랑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여러 사연이 복잡하게 얽혀서 루돌프는 애인 마리아와 1889년에 비엔나 교외에 있는 마이엘링이란 곳에서 동반자살을 하였다. 프란츠 요제프로서는 다음 황위를 이을 후사를 찾아야 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는 남동생이 셋이 있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은 멕시코 황제인 막시밀리안이었으나 1867년에 멕시코 혁명으로 반도들에게 잡혀서 총살을 당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루돌프 황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둘째 동생인 칼 루드비히가 황위 계승의 영순위 였지만 루돌프가 죽은지 7년 후인 1896년에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칼 루드비히의 큰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다음 황위 계승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왕족과 결혼하지 않고 평민과 결혼하였다. 황제가 될 사람이 평민과 결혼한 것은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음 황위 계승자로 주저주저했지만 딱히 다른 인물이 없어서 어쩔수 없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그때 그는 33세였다. 그러나 그후 거의 20년이나 황태자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못하고 황위 계승자(Kronfolger)라는 명칭으로 지내다가 1914년, 그가 51세 때에 사라예보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비명에 횡사하였으니 황위 계승자로 오래도 있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국수주의자의 총탄에 암살당하는 장면.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라고 불러지지 않고 황위 계승자 또는 종전부터 불려오던 대공으로 불려졌다. 그 이유는 페르디난트가 왕족이 아닌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멤버들은 결혼할 때에 어느 왕실이든지 현재 유럽에 있는 왕실의 멤버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과거에 유럽에 있었던 왕실의 멤버여야 했다. 그래야 왕족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을수 있었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대공은 왕족인 아닌 여인과 결혼했다. 조피 쵸테크(Sophie Chotek)는 백작가문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1894년, 그가 31세 때에 조피 백작부인을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몇년 후에 페르디난트는 조피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트의 결혼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 하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숙부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황제는 '좀 기다려 보라'고 말하면서 좀처럼 허락해 줄 기미가 없었다. 물론 프란츠 요제프 황제로서는 루돌프 황태자가 세상을 떠났고 또한 동생 중에서 순서에 의해서 둘째 동생인 칼 루드비히를 다음 황위 계승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칼 루드비히도 189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다음 황위 계승자는 어쩔수 없이 칼 루드비히의 큰 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왕족과 결혼하지 않고 일반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 같아서 선뜻 허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페르디난트가 조피와 결혼하겠다고 아우성이므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어쩔수 없이 1899년에 두 사람의 결혼을 하락하였다. 단,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이들이 결혼해서 생산한 아들 중에서는 누구도 제국의 다음번 황위를 계승할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 조건이었다. 그 다음의 조건들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조피는 남편 페르디난트가 나중에 황제가 되더라도 황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며 또한 페르디난트 황제와 함께라면 몰라도 혼자서 외출할 때에는 황실 마차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극장에 오페라나 연극을 구경하러 가더라도 로열 박스에 앉지 못한다는 것도 조건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황제가 되면 비록 부인이지만 신하처럼 언제나 황제의 뒤에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녀. 황위 계승자(Thronfolger)로 지명된 기념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 당함으로서 야기되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세르비아 왕국에게 여러가지 조건을 내건 최후통첩을 보내는 외교적인 방법으로서 시작되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의 전투로 시작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얼마 후에는 지나간 세기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던 블록으로 나뉘어져서 확전되었다. 이제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대전쟁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제1차 세계대전은 '대전쟁'(Great War) 또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War to End All Wars)이라고도 말한다. 그 이전에 세계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이만한 대규모 전쟁은 일찍이 경험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도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간단히 1차 대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1차 대전은 기간으로 보아서 1914년 7월 28일에 시작되어서 1918년 11월 11일에 끝났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이 전쟁에 총인원 7천만명이 동원되었는데 그 중에서 6천만명은 유럽인이었다. 그러면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얼마나 나왔는가? 전투인력 9백만명과 민간인 7백만명이 희생되었다. 이 숫자에는 인종청소로 인한 희생자도 포함되어 있다. 전쟁의 결과가 이것만은 아니었다. 후유증이 대단했다. 각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말하자면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에서 혁명의 불길이 요원하게 타올랐던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후유증이 있다. 전쟁이 끝나기는 했지만 아직 라이발 국가간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결국 그러한 미제사항들은 1차 대전이 끝난 때로부터 21년 후에 2차 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바트 이슐에 있는 카이저빌라. 이곳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하는 문서, 즉 최후통첩문에 서명함으로서 1차 대전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전쟁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의 싸움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주변 나라들간의 해묵은 감정싸움이 이번 기회에 고개를 들어서 핑게만 있으면 총검을 들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여 너도나도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유럽 거의 전체가 양분되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투에 참여하였다. 한쪽은 동맹국(Central Powers)이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터키),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의 깃발 아래에 모였다. 불가리아는 1년 후인 1915년부터 참전했다. 이에 대적하는 그룹을 연합국(Allies)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세나라가 양해로서 얽혀 있었기 때문에 '3국 양해국'(Triple Entente)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엔은 이런 저런 나라들이 모두 양해국의 기치 아래에 모여들었다. 3국 양해의 당사국들은 대영제국(아일랜드 포함), 프랑스 제3공화국, 제정 러시아이다. 이 세 나라는 그 이전에 서로 비공식 양해로서 군사동맹을 약속한 일이 있다. 즉, 1894년의 프랑스-러시아 군사동맹 양해, 1904년의 영국-프랑스 양해, 1907년의 영국-러시아 양해이다. 이런 양해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에 전쟁이 터지자 전쟁 통에 자기들도 한몫하기 위해 영-불-러는 과거의 군사동맹 약속을 고려하여서 쉽게 손을 잡게 되었다. '3국 양해'에는 물론 당연히 세르비아 왕국이 가담하였으며 세르비아의 뒤를 이어 몬테네그로 왕국, 벨기에, 이탈리아 왕국,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지방에 있는 헤자즈 왕국, 포르투갈, 루마니아, 그리고 그리스까지 동참하였다. 그런가하면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17년에는 중화민국, 미국, 브라질, 시암(태국), 라이베리아가 동참하였다. 말하자면 당시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경제대국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3국 동맹의 멤버였으나(1882년 독-오-이 협정)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맹국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일본, 미국과 함께 나중에 양해국에 참여하였다. 일본은 2차 대전 때에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한패였으나 1차 대전 때에는 독일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독일이 조차하고 있는 중국의 칭따오를 공격하여서 수천명의 독일 포로들을 일본으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서부전선의 솜전투에서 영국군 참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에 유럽의 하늘에서는 이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맹주를 자처하는 나라들은 언제 군대동원령을 내려야 하는지 기회만 보고 있었다. 제정러시아가 참지 못하고 먼저 군대동원령을 내렸다. 다만, 일부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제정러시아가 일부 군대동원령을 내린 것은 7월 24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인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있었다. 그러자 제정러시아는 7월 30일에 전국에 걸친 군대동원령을 내렸다. 자기들이 분쟁 당사자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독일은 러시아에게 동원령을 철회하라고 통첩을 보냈다. 독일은 이번 전쟁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의 다툼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어째서 제정러시아가 미리부터 저 난리인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헤서 견제구를 날렸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독일이 뭔데 우리 일에 감놓아라 대추놓아라 하느냐면서 독일의 제안을 거부하였다.그러자 독일은 그러지 않아도 러시아가 이런 저런 일로 못마땅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고서 8월 1일에 러시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러시아는 이번 기회에 독일을 재기불능으로 만들고 싶었다. 옛날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까지 점령해서 만행을 저질렀던 일도 이번에 설욕코자 했다. 러시아는 독일과의 동부전선에서 병력면에서 우세를 보였다. 그러자 러시아는 3국 양해국인 프랑스에게 서쪽에서 독일을 옥죄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마침내 저 유명한 서부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서부전선. 고난의 전선이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유감이 많았다. 근자에만 보더라도 약 40년 전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하여 프랑스 제2제국의 막을 내려야 했고 알사스 로레인 지방을 독일에게 양보해야 했다. 프랑스가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독일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서부전선을 구축한 것은 독일로부터 빼앗긴 알사스 로레인을 되찾으려는 심정에서였다. 그래서 프랑스는 8월 1일에 전국에 걸쳐 군대동원령을 내려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자 독일은 선제공격의 중요성을 내세워서 8월 3일에 프랑스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를 가르는 국경지역은 엄중한 방책이 세워졌다. 개미새끼 한마리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였다. 독일은 프랑스를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서 공략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략하였다. 그러자 해협 건너에 있는 영국이 위협을 느끼고 8월 4일에 독일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했다. 명목은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독일은 처음에는 승승장구했으나 마르느(Marne) 전투에서 제지를 당했다. 이른바 서부전선의 시작이었다. 서부전선에는 어느 편을 가를 것 없이 한없이 긴 참호(트렌치)가 만들어졌다. 참호전투는 비참한 것이었다. 참호에서의 전투는 1917년에 이르기까지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유지되었다. 그래서 1차 대전을 참호전쟁이라고까지 불렀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무력화시키면서 서진하였으나 독일이 개입하면서 탄넨버그(Tannenberg) 전투와 마주리아 호수(Masurian Lakes)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진격을 저지하여 더 이상의 진전은 되지 않았다. 이어서 1914년 11월에는 오토만 제국이 센트랄 파워스편에 가입하였다. 오토만 터키는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시나이 반도에서 전선을 구축했다. 1915년에는 이탈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 편이 아니라 영-불-러의 편으로 들어갔고 이어 1916년에는 불가리아가 센트랄 파워스편에 가담했다. 그러자 그해에 루마니아가 양해국 편으로 들어갔고 1917년에는 미국이 뜻한바 있어서 참전했다. 바야흐로 세계대전이었다.


서부전선의 참호(트렌치). 참호의 생활은 참혹한 것이었다. 눈비가 오면 더 했다.


그러는데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1917년 3월에 제정러시아 정부가 와해되었다. 이어서 11월에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나라가 말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독일-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는 센트랄 파워스와 브레스트 리토브스크(Brest-Litovsk)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이고 무어고 그만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대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독일은 서부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1918년 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도 승리를 장담하며 공격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은 독일의 공격을 물리치고 오히려 독일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을 살같이 흘러서 1918년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8년 11월 4일에 연합국과의 휴전에 합의했다. 독일도 뒤따라서 11월 11일에 휴전에 합의했다. 독일은 더구나 국내적으로 혁명이니 무어니해서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실상 어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결국 이들 휴전으로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그리고 오토만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유럽의 국경선은 다시 그려졌다. 민족자결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서 유럽에는 아홉개나 되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거나 또는 회복되었다. 독일은 세계의 이곳저곳에 식민지를 여러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 이들은 거의 모두 승전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쟁의 후속조치를 위해 1919년에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렸다. 4대 강대국, 즉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는 여러 후속 조약을 통해서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이것저것 허리가 휠 정도의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한편, 1920년에는 미국의 제안으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결성되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했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국제연맹의 목적은 얼마가지 못해서 휴지처럼 되었다. 왜냐하면 독일이 주도한 2차 대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네바에서의 국제연맹 회의.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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