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1차 세계대전

화약고 발칸

정준극 2018. 3. 11. 18:14

화약고 발칸


1차 대전과 관련하여서 할 얘기들이 많이 있지만 모두 생략키로 하고 다만 사라예보 사건은 어떤 배경으로 일어났는지, 당시 발칸 반도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특히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서의 사태는 어떠했는지, 특히 이른바 '7월 위기'는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만 간략히 소개코자 한다. 우선 유럽의 화약고라는 발칸반도에 대하여 일고코자 한다. 발칸반도는 지리적으로 사바강과 도나우강 남쪽 지역을 말한다. 도시로보면 베오그라드 남쪽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남쪽에 있는 슬로베니아(수도: 류블랴냐)는 발칸국가로 간주하지 않고 중부유럽의 국가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발칸 반도의 남단에 있는 그리스도 발칸국가로 간주하지 않고 남부유럽 국가로 간주한다. 발칸이라고 하니까 발칸포를 연상해서 혹시 발칸포를 만들어 내는 큰 공장이 있기 때문에 발칸이라고 부르는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다. 발칸포의 발칸은 Vulcan이라고 쓴다. 불과 대장장이의 신인 불카누스(Vulcanus)에서 가져온 단어이다. 발칸반도라고 할 때의 발칸(Balkan)은 이 지역에 있는 산맥의 이름에서 가져온 단어이다. 발칸산맥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국경으로부터 시작하여 흑해까지 뻗어 있는 산맥을 말한다. 원래 발칸이라는 단어는 오토만 터키어로서 '숲이 우거진 산맥'이란 뜻이다. 현대 터키어에서 발칸이란 말은 '늪이 있는 숲'(swamp forrest)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무튼 숲이 우거진 산맥이란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발칸반도에는 고래로부터 여러 인종, 여러 나라가 서로 공존하여 왔다. 여러 인종, 여러 종교, 여러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들이 공존하다보니 좋은 일은 없고 대체로 날이면 날마다 치고 받으면서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너무나 전쟁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또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발칸 산맥. 발칸 반도라는 말은 이 산맥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발칸이라는 단어는 숲이 우거진 산이라는 뜻이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발칸 반도에는 오늘날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로서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들이 있을수도 있다. 지리적으로 북쪽부터 보면 슬로베니아가 있다. 수도는 류블랴냐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슬로베니아는 발칸국가에 포함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사람들은 슬로베니아를 중부유럽에 포함시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슬로베니아는 그렇다고 치고, 그 다음으로는 크로아티아가 있다. 우리에게는 축구를 잘 하는 나라로 알려진 나라이다. 수도는 자그레브(Zagreb)이다. 그 다음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긴 이름의 나라가 있다. 바로 이 나라가 1차 대전과 지대한 관계가 있었던 나라이다. 수도는 사라예보(Sarajevo)이다. 1984년 동계올림픽을 주최한 도시이다. 이어서 몬테네그로가 있다. 수도는 포드고리카(Podgorica)이다. 세르비아의 수도는 베오그라드(Belgrade)이다. 전에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였다. 루마니아는 중부유럽의 국가로 간주하기도 한다. 수도는 뷰카레스티(Bucharest)이다. 발칸반도의 동쪽으로 몰다바가 있다. 수도는 키시나우(Chisinau)이다. 그리고 불가리아가 있다. 1차 대전에서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섰던 나라이다. 수도는 소피아(Sofia)이다. 코소보라는 나라도 있다. 수도는 프리스티나(Pristina)이다. 마케도니아도 발칸국가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나라로 기억에 남아 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스코피예(Skopje)이다. 마지막으로 알바니아가 있다. 아드리아해를 가운데 두고 이탈리아와 마주보고 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티라나(Tirana)이다. 하여튼 다시 말하지만 넓지 않은 땅덩어리에 생각보다 많은 나라가 있다. 많은 나라가 있는 이유는 역사가 서로 다르고 민족이 서로 다르며 종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혹시 조지아(Georgia)라는 나라도 발칸국가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지아는 동구에 속한다. 흑해 동쪽에 있으며 코카사스 지방에 면하여 있는 나라이다. 국기에 십자가가 다섯개나 들어 있는 나라이다.


발칸반도의 국가들. 2012년도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참고. 북쪽의 슬로베니아는 중부유럽으로 간주될 때도 있으며 남쪽의 그리스도 남부유럽으로 간주될 때가 있다. 터키는 영토의 일부가 발칸반도에 속해 있지만 그렇다고 발칸국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면 세르비아 왕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였나?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공화국에 걸쳐서 있었던 비교적 큰 나라였다. 1882년부터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까지 존재했던 나라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나서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18년부터 1941년에 나치가 침공해서 점령할 때까지 존재했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는 명칭은 실은 1929년부터 사용한 것이고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설립된 국가의 명칭은 '세르비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Kingdom of Slovenes, Croats and Serbs)이라는 긴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3년 전쟁 중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으로 탈바꿈하였고 구소련의 공산체계가 와해되자 유고슬라비아는 제철을 맞은 듯 여러 국가로 갈라져서 서로 독립하였다.그건 그렇고, 다시 1차 대전의 원인제공편으로 돌아가서 발칸 반도의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꺼집어내고자 한다. 1908년에 발칸반도에는 때아닌 충격적인 사건이 터진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과거 오토만 제국이 점령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한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오토만 터키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1878년 이래 통치해 왔다가 사정이 있어서 물러났던 터였다. 그러자 세르비아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와 제정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은 말도 안되는 만행이라면서 발끈했다. 범슬라브주의는 19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민족운동으로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백성들이 단결해서 정체성을 되찾자는 목적이었다. 슬라브어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의 나라들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들도 슬라브어를 사용하였다. 다만, 본래의 슬라브어와는 조금 다른 언어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를 남부 슬라브(South Slavic)이라고 불렀다. 돌이켜보면, 지나간 수세기 동안 비슬라브어 제국인 비잔틴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토만 제국, 그리고 베니스까지 남부슬라브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을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이제는 그런 세력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자각심히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때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느닷없이 합병한다고 선포하였으니 발칸의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분해서 씩씩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제정러시아가 발끈한 것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같은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라는 것도 있지만 종교가 러시아정교회로서 같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슬람교도들도 상당수 있지만 국민의 대다수는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러시아정교회였다.


1908년에 사라예보 시민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다는 포고문을 읽고 있다.


1차 대전은 1914년에 시작되었지만 바로 그 전인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반도에서는 1차 발칸전쟁이 있었다. 발칸 연맹(Balkan League)과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발칸연맹이란 것은 1912년에 발칸의 왕국들인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서로서로 양국간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그 당사국들을 말한다. 당시에 오토만 제국은 아직도 발칸 반도의 상당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기야 발칸 반도는 1900년대에 들어와서 일련의 소용돌이 상태에 있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당국에 저항하는 게릴리 활동이 활발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터키는 영토의 일부만이 발칸에 들어 있지만 젊은 터키 혁명(Young Turk Revolution)이 일어나서 혼돈 상태였다. 그리고 1908년에 비록 예견되기는 했지만 보스니아 위기(Bosnian Crisis)가 일어났다. 아무튼 이러한 와중에서 1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발칸 전쟁은 '런던 조약'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에 따라 오토만 제국의 영토는 상당히 위축되었다. 이와 함께 알바니아가 독립국가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오토만 터키가 지배했던 영토들을 획득하여서 각각 영토가 확장되었다. 그러는데 불가리아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1913년 6월에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했다. 2차 발칸 전쟁이었다. 그러나 무모한 도발이었다. 전쟁에 진 불가리아는 어렵게 차지했던 마케도니아의 영토에서 상당 부분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흑해에 면해 있는 남부 도브루자(Dobruja) 지역을 루마니아에 양보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일단락 되는 듯 했지만 실은 꺼지지 않은 불씨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칸에서의 분쟁이 결국은 세계의 강대국들을 더 커다란 전쟁으로 이끌고 들어간 것이 되었다.


그리스군이 오토만 터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시민들이 환호를 받으면서 전선으로 나가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은 어떻게 해서 암살을 당한 것일까?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트 대공은 부인 조피(Sophie)와 함께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군사 상황을 점검하며 군병원에 입원해 있는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6명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행동대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사라예보 방문 소식을 듣고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이들 유고슬라비아 행동대를 믈라다 보스나(Mlada Bosna)라고 불렀다. 믈라다 보스나라는 말은 '젊은 보스니아'(Young Bosnia)라는 뜻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젊은이들이 혁명의 세력이 되어서 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운동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믈라다 보스나도 그런 단체 중의 하나였다. 믈라다 보스나는 1911년 결성되었다. 목적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세르비아와 통합하여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믈라다 보스나의 키 멤버는 기브릴로 프린치프였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믈라다 보스나를 이끌고 있었다. 믈라다 보스나는 '검은 손'(Black Hand)의 지원을 받았다. '검은 손'은 '통일 아니면 죽음'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있는 단체였다. 1911년 결성되었으몀 군대와 같은 활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튼 믈라다 보스나의 멤버 여섯 명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지나갈 것으로 예상된 길거리에 포진하였다.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부인과 동승하여서 무개차를 타고 방문 목적지로 갈 예정이었다. 여섯 명 중의 한 사람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페르디난트 대공이 탄 차가 지나가자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맞추지 못하고 주변에서 터졌다. 거리에 있던 몇 사람이 부상을 당했고 자동차 몇대가 파손되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 대공이 탄 차는 현장을 간신히 빠져 나와서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 달려갔다. 믈라다 보스나의 다른 멤버들은 대공의 차가 지나가는 또 다른 길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차가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믈라다 보스나 멤버가 수류탄을 던져서 엉망이 된 현장. 다행히 페르디난트 대공의 차는 무사했다. 몇 사람이 다쳤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페르디난트 대공은 예정된 대로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한후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 사라예보 병원에는 수류탄 사건으로 부상당한 사람들도 급하게 실려 왔기 때문에 이들도 만나서 위로하였다. 그런도 돌아가는 길에 호송팀이 대공의 차를 잘못된 길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대공이 잘못된 길로 돌아오는 바로 그 길에 믈라다 보스나의 대표격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서 있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피스톨을 꺼내서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에게 총격을 가했다. 대공과 대공비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물론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런 기막힌 사건이 발생했는데 참으로 정작 놀래서 흥분할 비엔나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별로 관심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6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6월 28일에도 그랬지만 다음날인 6월 29일에도 사라예보 사건이 신문마다 대서특필 되었지만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평소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면서 초여름의 분위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시민들이야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는 중대사건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큰 충격을 받아서 급히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후속조치에 대하여 논의했다. 그리하여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 당한지 꼭 한 달후인 7월 28일, 마침내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하여 최후통첩을 보내고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다.


지루하고 힘겨운 서부전선에서의 참호전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을 당한 것은 1914년 6월 28일이었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세르비아 왕국에 대하여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그로부터 한달 후인 1914년 7월 28일이었다. 그 한달 동안 유럽의 세력들은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별별 막후교섭 및 외교전을 펼쳤다. 그 얘기는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하기로 하고 또한 4년에 걸친 전쟁의 일정을 모두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생략코자 한다. 다만, 그 전에 잠시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사라예보에서는 어떤 일들이 자행되었는지에 대하여 언급코자 한다. 사라예보 사건 이후에 그곳에서는 세르비아를 반대하는 폭동들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사라예보에서의 반세르비아 폭동을 뒤에서 부추켰다. 반세르비아 폭동은 주로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의 이슬람 소수민족인 보스니아크(Bosniaks)가 주도했다. 이들은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두 명의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을 살해했고 세르비아인들의 상점들을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사라예보 이외의 도시에서도 세르비아인에 대한 반대활동들이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관장하고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 그러했다.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약 5천 5백명이나 되는 세르비아인들을 체포해서 투옥하거나 또는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등 다른 지역의 당국에 마치 범인을 인도하는 것처럼 인도했다. 그렇게 투옥된 세르비아인 중에서 최소 7백명에서 최대 2천 2백명까지 감옥에서 고문과 학대를 이기지 못해서 죽음을 마지했다. 이와는 별도로 약 460명의 세르비아인들이 반오스트리아-헝가리 성향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주로 보스니아크인들로 구성된 특별민병대가 설립되어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일종의 인종청소에 앞장섰다. 이들을 슈츠코르푸스(Schutzkorps)라고 불렀다. 방위대라는 뜻이다. 아무튼 사라예보 사건이 있은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들은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사라예보 사건 이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에서 자행된 세르비아인에 대한 만행


암살사건 이후 한달 동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강호들이 외교를 마치 군사훈련이나 하는 것처럼 추진하였다. 누가누가 외교를 잘하느냐는 경연대회 같았다. 정부 특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협상을 벌이느라고 정신이 없는 시기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막연한 위기감과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시기를 '7월 위기'(July Crisis)라고 불렀다. 세르비아의 고위 관료들이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사건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검은 손'(Black Hand)이 뒤에 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사람들은 보스니아에서의 세르비아인들의 영향이 이번 기회에 막을 내리게 되기를 바랬다.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3일에 세르비아에게 이른바 '7월 최후통첩'(July Ultimatum)을 전달했다. 10가지 요구사항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이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사항들이었다. 세르비아를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통첩이었다. 세르비아는 최후통첩을 받고서 따져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요구조건을 들어줄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섯번째 사항만은 도저히 들어줄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조사단이 세르비아에 와서 암살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그건 말이 안되므로 들어줄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어 세르비아는 이틀후인 7월 25일에 전국민 동원령을 내렸다. 어차피 전쟁은 피할수 없으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그 다음날인 7월 24일에 세르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로부터 며칠 후인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차 대전의 도화선을 당긴 사라예보. 구시가지의 모습.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사라예보는 오늘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다음날인 7월 29일,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지하여서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침공에 대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러시아는 하루가 지난 7월 30일에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러시아가 저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전국 동원령을 취소하기를 바랬다. 사실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와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 짜르는 사촌간이었다. 서로 원수가 되어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독일은 러시아에게 동원령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만 더 기다려보았다가 그래도 러시아가 동원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7월 30일이 되었는데도 러시아는 그대로였다. 독일은 '전쟁의 위기 상태'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다시한번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어서 동원령 철회, 세르비아 지지약속 취소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독일은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에게 만일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군사적 행동을 한다면 러시아를 지지해 주지 말아 줄것을 요청했다. 다음 다음 날인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자 마침내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아무리 사촌간이지만 한번 해볼테면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당사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아직까지도 관망하고 있는 터에 독일과 러시아가 오히려 방방거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8월 4일에 전국민 동원령을 내렸다.


독일군의 서부전선 전투


독일은 프랑스가 혹시나 러시아편을 들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프랑스에게 사람이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하면 안되니 전쟁이 일어나면 중립으로 있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독일은 자체적으로 대단한 군사전략을 세워서 추진키로 했다. '아우프마르슈 2 서부'(Aufmarsch II West) 작전이란 것이었다. 아우프마르슈라는 단어는 퍼레이드를 말한다. 군사력을 과시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만한 군사력이 있으니 함무로 덤비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성 작전이었다. '아우르마르슈 2 서부' 작전에 의해서 독일의 국가 군사력의 80%를 서부전선에 배치할 계획이다. '아우프마르슈 1 동부'라는 작전도 수립했다. 동부에서 러시아와 싸우게 될 것 같으면 군사력의 60%를 서부전선에 배치하고 나머지 40%만 동부전선에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어째서 동부전선에는 40%만을 배치하느냐하면 당시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동부전선으로 수송할 철도의 인프라가 최대로 40%까지만 가능기 때문이었다. 독일이 프랑스에게 중립으로 있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프랑스는 아무런 회신도 주지 않았다. 대신에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는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즉, 프랑스는 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을 현재의 위치에서 후방으로 10km 이동하라고 지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 예비군에 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독일은 프랑스가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온다고 믿어서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서 전국 예비군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아우프마르슈 2 서부' 작전을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즉, 전체 병력의 60%를 서부전선으로 배치토록 했다.


서부전선은 참호전쟁이었다. 긴 전선을 따라서 양측에 참호가 만들어졌다.


영국의 태도가 문제였다. 영국이 프랑스편을 들어 줄지, 또는 독일편을 들어줄지에 따라 전세가 확 바뀌기 때문이다. 독일은 만일 영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서부전선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므로 병력을 대거 동부전선에 배치하여 러시아와 건곤일척의 한판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러는데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를 설명하자면 또 한참 걸리므로 생략한다. 잘못된 정보라는 것은 영국이 중립으로 남아 있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공격을 당하지 않는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으로 있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빌헬름 2세는 몰트케(Moltke) 장군에개 당장 가능한한 모든 병력을 동부전선에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몰트케 장군은 영특한 인물이었다. 독일의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옮기면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만일 프랑스가 뒷북을 치고 달려든다면 큰 낭패가 될 것'을 설명하면서 설득했다. 영국의 조지 5세와 빌헬름 2세도 역시 사촌간이었다. 빌헬름 2세는 설마 사촌인 조지 5세가 자기와 대적하여 전쟁에 참여할 것으로는 믿지 않았다. 또 다른 사촌인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는 '사촌이 밥 먹여 주는가?'라면서 전쟁준비에 한창인데 그것은 걱정하면서 영국에 대하여는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몰트케 장군은 만일 있을수도 있는 프랑스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프랑스 북부의 룩셈부르크부터 점령해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와 맞붙는 것은 아무래도 양측에 상당한 피해를 줄것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독일로서는 동부전선에도 병력을 분산해야 하므로 아무래도 프랑스와의 전면전은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빌헬름 2세는 몰트케 장군에게 룩셈부르크를 침공하면 사람들이 약한 나라를 무참히 짓밟는다고 비난할 것이니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몰트케 장군을 구약성서 에스더에 나오는 모르드개(Mordechai)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무런 연관이 없다.)


1차 대전은 유례가 없는 화학전이기도 했다. 방독면은 필수였다.


그러는데 영국의 조지 5세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전보 한장을 보냈다. 무언가 오해가 있어서 잘못 알고 있는 듯한데 영국은 중립으로 있지 않을 것이며 전쟁이 확산되면 본토(유럽)로 건너가서 대영제국의 명예를 걸고 한바탕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황한 빌헬름 2세는 그때까지의 주장을 굽혀서 몰트케 장군에게 '장군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침공했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대하여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독일군은 룩셈부르크를 점거한 후에 벨기에를 거쳐서 프랑스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벨기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면서 독일에게 벨기에의 국경을 한발작이라도 넘어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할수 없이 독일은 벨기에에 대하여도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은 독일에게 벨기에는 중립으로 있을 것이니 가만히 놓아두라고 요구했으나 독일이 듣지 않았다. 마침내 영국은 독일에 대하여 8월 4일 선전포고를 했다. 사촌이고 무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의 전쟁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어느 지역에서 독일, 프랑스, 영국군이 크리스마스에 휴전에 합의하여 참호에서 나와서 캐롤을 부르고 축하주를 나누고 있다.




'합스부르크 > 1차 세계대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스트리아와 독일  (0) 2018.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