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빈도보나의 전설

로마제국의 국경요새로부터 세계의 도시로

정준극 2007. 4. 11. 14:46

로마제국의 국경요새로부터 세계의 도시로

 

호프부르크의 미하엘 문(미하엘러토르)과 그 앞의 미하엘 광장(미하엘러플라츠)

미하엘러플라츠에서의 로마시대 유적지 발굴

                            

비엔나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 보면 간혹 빈도보나(Vindobona)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빈도보나는 무슨 말이며 비엔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하나 하나 짚어 보자. 비엔나의 역사를 따져보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년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엔나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서 틀이 잡힌 것은 고대 로마제국이 비엔나에 동부 군사기지를 설치하고서부터라고 할수 있다. 그 군사기지의 이름이 빈도보나였고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거의 2천 년 전의 일이었다. 로마제국은 처음에는 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둔덕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로마제국은 빈도보나에 요새를 건설하고 빈도보나를 북방의 게르만민족과의 경계로 삼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 지자 3세기에 이르러 빈도보나는 수비대의 요새로부터 로마제국의 지방도시로서 격상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빈도보나는 다뉴브(도나우)강변에 자리잡은 지리적 요충지였으므로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빈도보나는 발틱해로부터 아드리아나해에 이르는 호박길(Amber Road)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후 중세에 이르러 바벤버그(Babenberg)왕조가 빈도보나를 오스타리키의 중심으로 삼았고 이름도 빈(Wien. 영어로 Vienna)으로 변경했다. 비엔나(빈)라는 단어는 바로 이 빈도보나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이다. 오늘날 비엔나의 중심지역인 제1구 인네레 슈타트(Innere Stadt)에 로마시대의 유적이 더러 남아있는 것은 빈도보나 덕분이다. (미하엘러플라츠, 호에 슈트라쎄, 슈테판스플라츠 등등).

 

 

 카르눈툼의 유적인 '이교도의 문'(Heidentor)

                                                              

로마제국은 빈도보나에 군단을 주둔시켜 도나우 강 인근의 부락들을 게르만족등 야만인들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했다. 로마의 제14군단이 주둔했던 장소가 카르눈툼(Karnuntum)이다. 오늘날 비엔나와 브라티슬라바의 중간 거리 쯤에 있는 장소이다. 카르눈툼에는 많은 로마인들이 살았다. 그래서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도나우 동편에서 아직까지도 로마시대의 유적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곳은 아마 카르눈툼 뿐일 것이다. 카르눈툼의 로마시대 유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개선문과 같은 '이교도의 문'(Heidentor)이다. 카르눈툼에는 원형경기장과 야외극장의 유적도 남아 있다. 오늘날 원형경기장 유적지에서는 관람객들을 위한 검투사(글레디에이터)들의 경기가 시범되고 있다. 검투사들의 격투는 로마가 본산이지만 오늘날 로마에서는 구경할수 없고 다만 카르눈툼 등 다른 나라에서 볼수 있으니 신통하다.

              

 카르눈툼의 로마시대 유적인 원형경기장에서는 검투사들의 검투 시범이 있다.

                                                                 

1구 인네레 슈타트(시내중심)의 거리에 붙여진 이름중 상당수도 오랜 과거의 유산이다. 예를 들어 잘츠토르가쎄(Salztorgasse)와 잘츠그리스(Salzgries)는 중세로부터 소금을 물물거래하던 시장터였다. 마르크-아우렐-슈트라쎄(Marc-Aurel-Strasse)는 로마제국의 철학자 황제로서 빈도보나에 와서 지내다가  카르눈툼(Carnumtum)요새에서 세상을 떠난 마르크 아우렐리우스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비엔나에도 상업과 관계가 있는 거리 이름도 많다. 볼차일레(Wollzeile)는 직물공과 모직공들이 모여 살았던 곳, 플라이슈마르크트(Fleischmarkt)는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 보그너가쎄(Bognergasse)는 활과 화살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 나글러가쎄(Naglergasse)는 바늘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 자일러슈태테(Seilersttäte)는 밧줄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고 투후라우벤(Tuchlauben)은 옷감상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외에도 시장과 관련된 지명이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많다. 노이에 마르크트, 호에르 마르크트, 콜마르크트 등등이다. 비엔나에 보험회사가 많은 것은 기본적으로 상인들의 장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식당을 말하는 바이즐(Beisl)은 이디쉬어로 집이라는 뜻이다.

                

18세기의 프라이융. 쇼텐키르헤와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수도회 수도원)이 보인다.

 

[비엔나라는 명칭의 유래]

비엔나는 영어식 표현이고 독일어로는 빈(Wien)이다. 일본 사람들은 빈(Wien)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윈(ウィン)이라고 썼다. 영국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는 습관 때문에 Wien 도 영어식으로 윈이라고 표기했던 모양이다. 빈이라는 말은 켈트어의 윈도(Windo)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윈도'는 '밝은'(Bright) 또는 '멋있는'(Fair)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켈트어의 윈도는 아일랜드어에서 휘온(Fionn)으로 발전하였으며 웰쉬어에서는 귄(Gwyn)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윈도라는 말이 원래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들은 빈이라는 명칭이 베두니아(Vedunia)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한다. 베두니아는 '숲속의 시냇물'이라는 뜻이다. 비엔나에는 비엔나숲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냇물이 여러개가 있다. 그 베두니아라는 말이 베니아(Venia)가 되었고 이어 뷔엔느(Wienne), 그리고 마침내 빈(Wien)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로마의 정착지를 켈트어로 빈도보나(Vindobona)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하얀 땅'(White base/bottom)이라는 의미었을 것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하얀 땅바닥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도나우 강변의 모래 밭이  하얗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되었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그 말이 빈도비나(Vindovina)가 되었고 이어 빈(Wien)이 되었다는 것이다. 빈도비나에서 비덴(Viden)이라는 체코어도 비롯했다고 한다. 빈은 체코어로 비덴이다.

 

링슈트라쎄의 위용


빈(비엔나)은 헝가리어로 베츠(Bécs)라고 하며 보스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에서는 베츠(Beč)라고 부른다. 또한 오토만 터키어로도 베츠(Beç)라고 한다. 이 단어들은 빈도보나라는 켈트어와는 상관이 없으며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아바르(Avar) 요새의 이름이 베츠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바르는 헝가리 남부지역에 살았던 민족을 말한다. 슬로베니아에서는 빈을 두나이(Dunaj)라고 한다. 슬라브어로 다뉴브(도나우)를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도나우를 안고 있는 큰 도시인 빈을 기왕에 두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트 도나우와 새로 물길을 만든 도나우가 흐르는 비엔나 교외의 도나우슈타트. 슬라브어로는 비엔나를 두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슬라브어로 도나우를 말한다.

도나우카날의 유람선인 빈도보나호

 

 

야소미어고트 대공(Markgraf Jasomirgott)

Heintich II...Pfalzgraf bein Rhein(1140-1141), Markgraf von Osterreich(1141-1156), Herzog von Bayern(1143-1156), Herzog von Osterreich(1156-1177)

 

1156년 바벤버그 왕조의 하인리히2세인 야소미어고트(Jaromirgott) 대공 때에 비엔나에 비로소 궁전이 건설되어 명실공히 왕국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1구의 암 호프가 그곳이다. 암 호프는 궁전(호프)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암 호프의 광장을 플라츠 암 호프(Platz am Hof)라고 부르는데 이는 야소미어고트 대공이 비엔나를 바벤버거 왕조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을 기념하여서 붙인 명칭이다. 이로써 비엔나는 유럽의 새로운 중심지로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오늘날 슈테판성당 정문으로부터 바로 광장 건너편에 위치한 야소미어고트슈트라쎄(Jaromirgottstrasse)는 야소미어고트대공이 입버릇처럼 말한 Ja so mir Gott helfe(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다)라는 표현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거리이다. 

                

야소미어고트 슈트라쎄. 2008.

                                         

 

야소미어고트대공으로 인하여 비엔나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자 유럽의 유명한 음유시인들이 비엔나궁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탄호이저(Tannhäuser. 13세기의 음유시인)는 비엔나 궁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음유시인이었다. 짐작컨대 이때로부터 비엔나의 유서깊은 음악예술이 영글기 시작했다고 본다. 비엔나의 암 호프에 있는 야소미어고트 궁전은 유럽사교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십자군들도 성지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는 비엔나를 거쳐가는 일이 통상이었는데 그때마나 암 호프의 궁전에서 잠시 머물렀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싸(Barbarossa)황제는 성지로 가기 전에 비엔나에 들려 십자군전쟁을 준비했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는 돌아가는 길에 스파이 혐의로 레오폴드 5세에 의해 비엔나 서쪽 80km 떨어져 있는 뒤른슈타인(Dürnstein)성에 감금되었다가 막대한 금액의 몸값을 내고 석방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사자왕 리챠드가 현재 비엔나의 에르드버그(Erdberg) 지하철 역이 있는 곳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사족이지만 영국의 리챠드 왕을 사자왕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용맹한 리챠드왕'(Richard the Lionheart)이라고 해야 한다. 영어의 Lionheart는 사자처럼 '용맹하다'는 뜻이다.

 

뒤른슈타인의 겨울.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는 산 위의 고성이 사자왕 리챠드가 레오폴드 5세에게 잡혀 있던 곳이라고 한다.

 

한편, 사자왕 리챠드의 몸값은 은화 5만 마르크였다고 한다. 이 금액은 은 12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3톤짜리 트럭 4대에 은을 가득 실은 분량이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5세 대공은 이 몸값으로 비엔나의 도심을 확장하는 공사비의 일부로 충당했다. 그리고 비너 노이슈타트도 사자왕 리챠드로부터 받은 몸값의 일부를 사용해서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비엔나의 발전에 영국인들, 특히 영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기여가 컸다고 할수 있다. 영국의 유태인들이 리챠드 왕의 몸값을 가장 많이 기부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도심지의 확장과 함께 비엔나는 번창일로를 걸었다. 후담이지만 레오폴드5세는 십자군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십자군들을 학대하였다. 그래서 급기야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당시 파문은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레오폴드5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마후 레오폴드5세는 마상무술경기를 하던중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참회하고 면죄받을 시간도 없었다.

 

쇼텐슈티프트의 외벽에 설치되어 있는 야소미어고트 기념상                                                                


1246년, 바벤버그왕조의 프리드리히2세 대공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약 12년동안 군주가 없는 공위(空位)시대로 지냈다. 그러다가 1273년부터 명목상의 로마왕으로 즉위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1세(1218-1291)가 1278년에 오스트리아, 슈티리아, 카린티아를 통치하고 있던 보헤미아의 오토카르(Ottokar)2세를 퇴치하고 오스트리아, 슈티리아, 카린티아의 군주(공작)에 올랐다. 이로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왕조가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이때로부터 합스부르크왕조의 중심지로서 비엔나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오토카르와 오타크링의 오타크(Ottak)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독일 슈파이어대성당에 있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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