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빈도보나의 전설

비엔나 역사 대탐구 2

정준극 2016. 4. 1. 12:01

비엔나 역사 대탐구 2

 

비엔나의 도심. 인네레 슈타트의 슈테판스돔 일대를 하늘에서 내려다 본 광경


1차 대전: 1차 대전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사항은 굳이 설명치 않고자 한다. 잘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1차 대전으로 비엔나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언급코자 한다. 앙탕트(Entente) 국가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프러시아에 대항하는 군사적 연합국들이 경제 엠바고를 펴는 바람에 비엔나에는 식품과 의복에 대한 품귀현상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실제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오스트리아(정확하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하여 전쟁포고를 했지만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확산되자 엄청난 전쟁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까 다른 곳에서 빌려와야 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도 물건이 없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서민들이야 진작부터 못살았으니까 할 말이 없지만 사회의 주축이 되는 중산층은 전쟁의 여파로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여러가지 경제타개 정책을 펴냈다. 그 중의 하나가 아파트 임대료를 동결하는 것이었다. 아파트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면 돈 없는사람들은 길바닥에 나와 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아파트 임대료에 대한 1916년의 동결이 현재까지도 적용되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적당히 눈치를 보아서 임대료를 올렸던 것이다. 오스트리아가 1차 대전에서 손을 들게 된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런데 전선에서의 전투도 그렇지만 실은 이탈리아의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라는 사람이 아이디어를 낸 공중 삐라 작전이 직접적으로 주효해서라는 얘기도 있다. 다눈치오는 시인이지만 전쟁 중에 군에 입대하여 활동한 사람이다. 다눈치오의 아이디어에 의해 1918년 8월 9일 이탈리아의 비행기들이 약 40만장의 선전 삐라를 비엔나 상공에 뿌렸다. 전쟁을 끝내야 그나마 먹고 살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이 삐라 작전은 큰 영향을 끼쳐서 전쟁을 끝내는데 막중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시인 겸 작가로서 1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에 입대한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비행기에 타고 있다. 이들은 비엔나까지 날아와서 항복하라는 삐라를 뿌리는 통에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공화국 출범: 1차 대전이 종식되었다는 것은 합스부르크에 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1918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는 이름도 이상한 도이치-외스터라이히(Deutsch-Österreich), 즉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임을 선포했다. 이로써 수백년에 걸쳤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백년 동안 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시는 행정적으로 니더외스터라이히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에 별도의 행정지구로 독립하기는 했다. 즉, 비엔나는 특별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주가 되었다. 전쟁후부터 오스트리아를 장악한 좌익의 사민당이 비엔나시의 행정도 장악하게 되었다. 좌익 정부가 추진한 '붉은 비엔나'(Rot Wien)는 국제적 모델로 간주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붉은 비엔나'의 대표적인 정책은 좌익 정부의 주택 정책에 따라 다수의 공동주택(게마인데바우텐: Gemeindebauten)들을 지은 것이다.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자는 정책이었다. 칼 맑스 호프는 대표적이다. 세계에서 이만한 공동주택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엔나의 칼 맑스 호프는 '붉은 비엔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붉은 비엔나' 정책만으로 경제난국을 타개할수는 없었다. 경제난국을 타개할수 있다는 정치적인 여러 주장들이 터져 나왔다. 어떤 것은 그럴듯 했지만 대부분은 말잔치로 끝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는 중에 사민당 측에서는 1923-24년에 슈츠분트(Republikanishce Schutzbund: 공화국 방위군)를 창설하였다. 사회가 혼란하니까 자기들을 보호해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싸워줄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자 우익도 하임베르(Heimwehr: 향토방위대)를 설립하였다. 두 집단간의 투쟁은 피할수가 없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 세워진 공동주택. 칼 맑스 호프. 레드 비엔나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대단히 큰 건물이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가야 한다. 그만큼 컸다.

 

오스트로파치슴의 등장: 정치적인 갈등과 불안은 내전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1927년에 비엔나 시내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대표적으로 법무성(Justizpalast)건물이 불에 탔다. (그 내용은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설명되었다.) 이어 오스트리아 최대의 은행인 크레디트안슈탈트(Creditanstalt)가 파산을 했다. 여담이지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인 폰 트랍 해군소령도 친구의 권유에 의해서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에 투자를 했다가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말할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아무튼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 1933년에는 의회가 해산되었다. 때를 맞추어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나치당이 오스트리아에서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기침을 하면 비엔나에서는 감기에 들어야 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외상 겸 연방수상이었던 엥겔버트 돌푸스(Engelbert Dolfuss)는 '이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서 1933년에 나치당과 공산당과 사민당이 설립한 방위군(Staatsbund)을 금지하였다. 이어서 돌푸스 수상은 1934년 2월 봉기가 일어난 후에 사민당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돌푸스 수상은 정치활동을 할수 있는 유일한 기구로는 그가 창설한 '조국전선'(Vaterländische Front)만을 인정하였다. 돌푸스는 국정을 수행하는 기구로서 슈탠데슈타트(Ständestaat)를 설립했다. 국가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와 같은 기구였다. 이 기구는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서도 국정을 추진할수 있었다. 그러나 돌푸스의 정책은 나치분자들의 반발을 얻어서 결국 돌푸스는 1934년 7월 25일 그의 집무실에서 나치 청년대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비엔나의 집무실에서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 돌푸스 수상의 처참한 모습

 

1938년 3월에 나치는 오스트리아를 무혈합병하였다. 이를 안슐르스(Anschluss)라고 부른다. 합병이라는 뜻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호프부르크 궁전 앞의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서 열광하는 비엔나 시민들에게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라고 연설했다. 한편, 비엔나는 히틀러의 유태인 사냥에 적당한 장소였다. 1938년 11월 9일에는 저 유명한 크리스탈나하트(Kristalnacht)가 일어났다. 유태인 회당들, 상점들, 학교 등이 파괴되었고 애꿎은 유태인들은 나치로부터 짐승보다 더한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다. 이에 앞서 8월에는 비엔나에 '유태인 이민 중앙사무소'(KZ Oberlanzendorf Wien)가 수립되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책임자였다. 히틀러 자신은 비엔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에 자기를 푸대접했던 도시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엔나미술대학교에 두번이나 응시했지만 모두 불합격 통지를 받은 아픈 경험이 있는 도시였다. 그보다도 비엔나는 그 때까지만해도 유태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하였기 때문에 독일과는 다른 그런 상황이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합병된 이후 나라 이름을 잃었다. 오스트리아라는 국가 명칭은 사라지고 대신에 독일 동부지역이라고 불렸다. 히틀러는 새로 합병된 독일 동부지역, 즉 오스트리아의 수도를 린츠로 옮길 생각까지 했다. 린츠는 히틀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같은 도시였다. 나치는 비엔나의 행정구역을 확장하였다. 무려 91개나 되는 교외 마을들을 비엔나에 편입시키고 몇개의 구를 창설했다. 22구 그로스 엔처스도르프(Gross Enzersdorf), 23구 슈베하트(Schwechat), 24구 뫼들링(Mödling), 25구 리징(Liesing), 26구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가 이때에 생겼다. 물론 나중에는 다시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현재는 23구까지 있게 되었다. 아무튼 나치가 비엔나를 점령한 후 비엔나는 제3제국의 도시 중에서 면적이 베를린보다 더 큰 도시가 되었다.

 

헬델플라츠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라고 선언하자 운집한 비엔나 시민들은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나치식 경례로서 환호했다. 이날 약 20만명이 헬덴플라츠에 운집했다고 한다. 시민들은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히틀러의 얼굴을 보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2차 대전: 전쟁 중에 비엔나시는 악명 높은 마우타우젠 구젠(Mauthausen Gusen)강제수용소의 산하로 12개의 수용소를 설치운영하였다. 유태인은 물론, 불온분자, 공산주의자 등등을 강제로 수용하였다. 비엔나에 대한 공중폭격은 원래 영국에 거점을 둔 연합군 폭격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1943년부터는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연합군 폭격기들이 폭격을 했다. 나치는 대규모 대공포대를 비엔나의 곳곳에 설치하여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하였다. 그런 대규모 대공포대는 아우가르텐 등에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어도 철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워낙 철근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었기 때문에 만일 철거한다면 주변 건물에 영향을 줄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전쟁의 막바지에 소련군이 비엔나를 공격하고 진입하였을 때 오히려 지금까지 몇년 동안의 전쟁 때보다 더 많은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소련의 붉은 병사(적군)들이 마음대로 파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건물들이 손상되었고 많은 역사적 유물과 문화재가 약탈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은 둘째 치고라도 역사적인 건물들의 복구에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슈테판대성당,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등이다.

 

비엔나 아우가르텐의 대공포대(Flak tower). 너무 단단히 지어서 이 건물을 철거하는 것도 어렵지만 만일 철거한다면 주변에 있는 아우가르텐 궁전등의 안전성이 우려되어 아직 철거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2차 대전의 유물이므로 교육적 목적에서라도 그냥 보존하자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흉물스럽기는 하다.

 

제2공화국: 전쟁이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4대국이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었다. 비엔나는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서 연합국의 통제를 받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한 구역씩 맡아서 통제했고 오늘날의 1구인 인네레 슈타트는 4개국이 공동으로 통제했다. 얼마 후에는 오스트리아에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정당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5년 4월 29일에 연합국은 팔라멘트 건물을 오스트리아 정부에 넘겨주었다. 칼 렌너(Dr Karl Renner)가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비엔나시의원을 뽑는 선거가 1945년 11월에 치루어졌다. 전체 1백석에서 좌익인 사민당이 58석의 과반수를 차지했고 우익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은 36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공산당이 6석을 차지했다. 1946년에 비엔나 시의회는 나치가 합병한후 확장했던 비엔나시의 구역을 원래대로 돌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법률은 비엔나를 통제하고 있는 4대 강대국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비토하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1954년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나치가 신설한 구(Bezirk) 중에서 두개 구만이 비엔나시에 남아 있게 되었다. 22구 도나우슈타트(Donaustadt)와 23구 리징(Liesing)이었다.

 

오스트리아국가조약이 서명된후 각국 대표단과 오스트리아 정부대표가 벨베데레 궁전의 발코니에 나와서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1955년 5월 15일, 벨베데레 궁전에서 4개 연합국은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를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오스트리아는 일단 독립국의 신분을 얻게 되자 의회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국가조약을 수정하여 오스트리아를 스위스와 마찬가지의 영세중립국으로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1955년의 벨베데레 조역은 명목상으로는 평화조약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이를 국가조약이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가 1938년 독일에 합병될 때에 국가명칭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어느어느 나라의 조약이라는 말을 쓸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후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마샬 플랜의 덕택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비엔나의 대중교통 수단도 1978년 지하철의 도입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으로서 국제기구의 유치에 진력하여 여러 국제기구들을 비엔나에 유치하였다. 그리하여 비엔나는 1970년대에 뉴욕, 제네바에 이어 세번째로 UN 기구가 많이 소재하고 있는 도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도나우 건너편에 '우노 시티'(UNO City)가 조성되었다. UNO는 United Nations Organizations(국제연합기구) 라는 말의 약자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비엔나의 스카이라인에는 큰 변화가 있기 시작했다. 도나우강 건너편에 안드로메다 타워와 밀레니움 타워와 같은 고층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함께 비엔나 중앙역(Wien Mitte) 일대에도 고층건물 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계속해서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자 일각에서는 비엔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런 명예와 자부심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래서 현재는 마구잡이 고층건물 건설이 당국의 세심한 통제를 받고 있다.

  

도나우슈타트의 고층건물군. 새로운 비엔나의 모습이다. 왼편의 안드로메다 타워. 오른쪽의 밀레니엄 타워.

 

현재 비엔나에는 1만 6천명 이상의 외교관, 또는 국제기구의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맇듯 비엔나는 외교관들이 많은 도시이다.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기 때문에 지금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전쟁 후의 비엔나에는 동서냉전의 영향으로 세계 어느 곳보다도 스파이들이 많이 활동했던 곳이었다. 영화 '제3의 사나이'를 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가질 것이다. 007 시리즈에도 비엔나가 가끔 등장한다. 그래서 비엔나에는 오스트리아 군인보다 스파이들이 더 많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아무튼 비엔나는 국제도시로서 손색이 없이 성장하게 되었다. 비엔나는 1986년까지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의 주도를 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니더 외스터라이히가 주도를 장크트 푈텐으로 이전했다. 비엔나는 한때 니더 외스터라이히주에 속했었으나 그후에는 독자적인 주와 같은 성격이 되었기 때문에 니더 외스터라이히로서는 다른 주에 주도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노시티.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 등 국제기구의 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22구 도나우슈타트의 봐그라머슈트라쎄에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우노시티를 건설하고 UN으로부터 매년 단 1 쉴링의 사용료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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