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빈도보나의 전설

비엔나 역사 대탐구 1

정준극 2016. 3. 28. 16:09

비엔나 역사 대탐구 1

 

슈테판스돔

 

비엔나의 역사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이곳저곳에서 설명되었지만 그래도 흡족하지 못하여 이번에는 좀 다른 각도에서 기술코자 하니 그런줄 아시기 바라며 '또 무슨 역사 이야기냐?'면서 성가시게 생각치 마시기 바랍니다. 하기야 이렇게 다시 정리하는 것은 독자제위보다 오히려 제 자신의 복습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이점도 양해 바랍니다.

 

비엔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그러나 긴 역사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다른 도시보다도 더 영광과 오욕에 점철된 도시였다. 돌이켜보건대 오늘날의 비엔나가 역사의 기록에 올라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로마제국이 현재의 비엔나 중심지역이 되는 곳에 수비대의 병영을 설치하고서부터일 것이다. 당시에 비엔나는 숲으로 둘러싸이고 한쪽에는 도나우가 흐르는 그저 무심한 장소에 불과했지만 그후로 점차 확장되어 빈도보나(Vindobona)라는 이름으로 국경수비대가 주둔하는 곳이 되었고 나아가 민간인들도 정착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빈도보나는 점차 동서무역의 중간 거점으로서 중요한 장소가 되어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후 비엔나는 바벤버그 왕조가 통치하는 오스터마르크의 수도가 되었으며 역사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흘러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되었고 이어 1930년대에는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3제국의 지방이 되었으며 2차 대전 후에는 10년 동안 4대 전승국이 나누어서 통치하는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다가 1955년에 비로소 중립국으로서 독립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비엔나가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것은 유럽에서 거의 6백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명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경 때문에 비엔나는 유럽에서 가장 번화하고 문화와 경제활동이 가장 융성한 도시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비엔나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옛 제국의 영광스러웠던 추억만을 되새기며 지내는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옛 합스부르크의 영광은 아직도 도시 전체를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어서 과연 영원한 도시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로서 놀라운 명성을 가지고 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체르니,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쇤베르크 등등 헤아일수 없이 많은 클래식의 거장들이 이 도시와 호흡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제 비엔나의 천년 여정을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함께 다시한번 하나하나 짚어보자.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비엔나의 지붕들

 

빈도보나와 중세 초기 빈도보나라는 이름은 켈트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로마제국이 정착하기 전부터 켈트족들이 와서 살았음이 분명했다. 그후 로마제국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지금의 오스트리아도 제국의 속령에 편입하였고 이에 따라 1세기에는 지금의 비엔나 1구의 중심지역이 되는 곳에 군대 병영을 설치했었다. 호에 마르크트(Hoher Markt), 미하엘러플라츠(Michaelerplatz),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 등지에서 로마시대의 유적이 발굴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1구에서는 로마시대의 방어벽과 참호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빈도보나는 더욱 확장되어서 기원후 3세기 초에는 더 이상 국경 수비대의 병영 마을이 아니라 정착지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기원후 5세기 경까지 빈도보나에 거주했었다. 로마제국의 빈도보나는 제국의 먼 외곽에 있기 때문에 이민족들의 손쉬운 먹이가 될수 있었다. 그러다가 4세기 경부터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의 와중에 놓여있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게르만 민족이 이동하겠다는데 그러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이동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에게 빈도보나를 내어주고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그 옛날 빈도보나 일대의 로마 주거지역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아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비엔나 시내 중심지에서 발굴되는 유적들을 보면 형태가 온전하여서 비록 대화재가 있었고 전투가 벌어졌지만 자연적인 훼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손상이 없었던 것을 알수 있다.

 

호에르 마르크트 3번지에 있는 로마유적박물관. 빈도보나에 대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빈도보나는 중세로부터 동서무역의 중간거점이었다. 시내 중심지역을 발굴 할 때에 비잔틴 동전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저 멀리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무역상들이 왕래하였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살바토르가쎄(Salvatorgasse) 주변의 버그호프(Berghof) 일대에서는 6세기경의 묘지들도 발굴되었다. 실제로 당시 빈도보나의 센터는 지금의 암 호프 또는 호에르 마르크트 일대가 아니라 버그호프 일대였다. 로마제국이 물러난 당시에는 롬바르드가 빈도보나 지역을 통치했고 이어 슬라브족, 아바르족, 마자르족이 관할하였다. 중세에 기록상 처음으로 비엔나에 대한 사항이 기술된 것은 881년 잘츠부르크 연대기에서이다. 당시에 마자르족과의 전투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독일의 오토 1세가 레흐펠트(Lechfeld)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물리치고 비엔나를 차지한 것은 955년이었다. 레흐펠트는 오늘날 바바리아의 아우구스부르크(Augusburg) 인근이다. 이때로부터 비엔나는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오토 1세가 마쟈르족을 물리친 레흐펠트 전투

 

바벤버그 시대 오토 1세는 지금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 바바리아 일대에서 마쟈르족을 몰아낸 후 잠시 오스트리아 일대를 통치하다가 아무래도 별도로 태수 또는 변경백을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976년에 오스타리키(Ostarrichi)의 변경백(Margraviate) 자리를 바벤버그(Babenberg) 가문에게 맡겼다. 당시 비엔나를 조금 벗어나면 곧바로 헝가리와의 국경이었다. 11세기에 이르러 비엔나는 확고하게 동서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사람들도 많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기톨릭교회로부터 관구로 설정이 되지 않으면 초라한 입장이었다. 중세에는 교회의 권세가 다른 어느 것 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스타리키의 변경백은 레오폴드 4세였다. 레오폴드 4세는 파사우의 주교와 협의를 하여 비엔나도 하나의 가톨릭 관구가 되게 하였다. 이로써 비엔나는 처음으로 도시다운 도시로서 인정을 받았다. 말하자면 주민들의 정착이 충분하게 이루어졌고 경제가 발전하며 종교와 문화가 활발해졌다는 얘기다. 그후 1155년에 하인리히(헨리) 2세가 변경백으로 있을 때에 비엔나를 아예 오스타리키의 수도로 정했다. 지금의 암 호프는 그때 마련된 바벤버그의 궁전이었다. 1156년에는 오스타리키가 공국으로 격상되었고 그때부터 오스트리아의 군주는 공작이라는 칭호를 가졌다. 하인리히 2세 시절에 지금의 프라이융에 있는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도 설립되었다. 그래서인지 비엔나에는 쇼텐이라는 이름의 지명이 더러 있다. 쇼텐링, 쇼텐토르 등등.

 

하인리히 2세가 12세기에 세운 쇼텐슈티프트와 쇼텐키르헤

 

12세기에는 유럽이 십자군 전쟁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비엔나가 큰 발전을 이루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 십자군 전쟁에 출정한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가 오스트리아를 통과해서 영국으로 돌아갈 때에 당시 오스트리아의 군주인 레오폴드 5세는 사자왕 리챠드(Richard Löwenherz)를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 비엔나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뒤른슈타인성에 감금하였다. 뒤른슈타인은 멜크 사원이 있는 봐하우 지역의 도나우 강변에 있는 마을이다. 그것이 1192년 크리스마스 이틀전의 일이었다. 레오폴드 5세는 영국으로부터 사자왕 리챠드의 몸값으로 5만 마르크(은전)를 받았다. 무게로 치면 약 10-12톤에 이르는 은이었다. 원래 레오폴드 5세는 그보다 3배나 많은 몸값을 요구했지만 영국이 더 줄 돈이 없다고 하여 사정상 3분의 1만 받았다. 그리하여 사자왕 리챠드는 1193년 3월에 석방되었다. 레오폴드 5세는 이 돈으로 오스트리아 은전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또한 비엔나 성곽을 건설했다. 오늘날 당시 설치했던 성곽의 잔해는 슈투벤토르(Stubentor) 지하철역 부근에서 찾아 볼수 있다. 그리고 비너 노이슈타트도 이 자금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레오폴드 5세는 십자군 지도자를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교황 첼레스틴 3세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레오폴드 5세는 '그까짓 파문 하려면 해 보아라'면서 태평한 척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어 사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다가 파문에 대한 사면을 받지도 못한채 기마경기를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서 죽었다. (어떤 주장에 의하면 사자왕 리챠드가 비엔나 근교의 에르드버그(Erdberg)에 감금되었다고 한다.)

 

멀리 산위에 있는 고성이 사자왕 리챠드가 감금되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1221년에 비엔나는 도시라는 호칭을 받았다. 그리고 슈타펠레헤트(Stapelrecht)를 인정받았다. 슈타펠레헤트(영어로는 Staple port)는 어떤 무역상이든지 비엔나를 거쳐가는 사람에 대하여는 비엔나시가 일종의 통과세로서 일정한 양의 상품을 받을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로써 비엔나는 무역의 중개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비엔나시는 점차 부강해졌다. 비엔나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과 무역관계를 맺었고 특히 도나우 일대의 도시들과 멀리는 베니스에 이르기까지 이를테면 국제적인 무역망을 구축하였다. 이로써 바벤버그의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도 비엔나에는 자체의 주교가 없었다. 비엔나는 일찌기 레오폴드 4세 때에 가톨릭 교회의 관구가 되는 것을 인정받았지만 이를 관할할 주교는 임명받지 못했었다. 프레데릭 2세는 비엔나에 주교를 두는 문제를 교황청과 협의하였다. 한편, 바벤버그의 프레데릭 2세 이후 오스트리아는 잠시동안 보헤미아 왕인 오토카르 2세의 통치아래 들어갔었다. 오토카르 2세에 대하여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코자 하니 기다리기 바란다.

 

중세의 비엔나는 오늘날 비엔나 1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엔나를 둘러싼 성벽과 능보들, 성문들을 볼수 있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가 둘러쳐 있는 것을 볼수 있다.

 

합스부르크의 등장 1278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를 오스트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투를 벌여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를 관할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돌프 1세의 합스부르크가 비엔나, 나아가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장악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토카르의 지시를 받는 빨치산들이 활동을 하면서 합스부르크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루돌프 1세 이후 알베르트 1세가 군주로 있을 때에는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는 큰 규모의 반란이 여러번 있었다. 보헤미아의 프라하는 오토카르 2세 시절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도를 겸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비엔나는 프라하의 그늘에서 조용히 있어야 했다. 합스부르크는 비엔나의 위상을 되찾아야 했다. 알베르트 2세는 슈테판성당의 고틱 콰이어를 완성했다. 슈테판성당이 더 당당하게 보이는 교회가 되었다. 루돌프 4세는 비엔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군주이다. 그는 우선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했다. 1365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공민왕 시절로서 노국대장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그때 이미 비엔나에는 대학이 설립되어 젊은이들을 학문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루돌프 4세는 슈테판성당의 현재 고틱식 회랑을 완성하였다. 대단한 공사였다. 슈테판대성당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고틱 회랑이 얼마나 웅장한지를 잘 알것이다. 그것을 14세기에 루돌프 4세가 완성한 것이다. 루돌프 4세의 치하에서는 비엔나의 경제가 점차 확장되어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링 슈트라쎄에서 바라본 비엔나대학교 본관

 

비엔나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알베르트 2세가 알베르트 5세로서 독일왕으로 선출된 후였다. 15세기 초였다. 알베르트 2세는 1421-22년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을 내쫓은 것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후 1469년에 비엔나에는 비로소 주교가 임명되었고 슈테판스돔은 대성당(Cathedral)으로서 격상되었다. 1522년 페르디난트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에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피의 심판'(Wiener Neustädter Blutgericht) 사건이 벌어져서 페르디난트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와해되었고 비엔나는 황제의 직속 콘트롤을 받는 도시가 되었다. 1526년에는 헝가리와 보헤미아(현 체코공화국)가 합스부르크의 수중에 들어왔고 1556년부터는 비엔나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종교개혁의 여파로 비엔나에도 개신교 신도들의 세력이 많아지자 1551년에 로마 교황청의 후원으로 비엔나에 예수회 사람들이 들어와서 반개혁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예수회는 로마 가톨릭인 신성로마제국의 궁정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반개혁운동의 리더는 1600년부터 비엔나 주교로 임명된 멜키오르 클레슬(Melchior Khlesl)이었다.

 

1522년 비너 노이슈타츠에서의 '피의 심판'

 

터키의 비엔나 공성: 비엔나는 1529년에 오토만 터키의 침공을 받아 포위된 일이 있었다. 이를 제1차 비엔나 공성(Die Erste Wiener Türkenbelagerung)이라고 한다. 터키는 비엔나를 거의 함락할 정도였으나 비엔나 성곽이 그나마의 방어를 유지하게 해주었다. 그러는 중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흑사병이었다. 더구나 시간을 흘러서 겨울철에 접어 들었다. 터키군은 견디다 못해서 철수 할수 밖에 없었다. 터키가 물러간후 비엔나는 성벽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어려운 재정 중에서도 성벽강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으며 이 프로젝트는 1548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비엔나는 전에 비하여 더욱 튼튼한 성벽을 가지게 되었으며 성벽을 따라서 능보와 해자가 설치되었다. 비엔나 성벽의 외부에는 완만한 경사의 제방이 마련되었으며 성벽 밖의 마을 사이에는 건물들을 짓지 않고 넓은 공간을 두었다. 적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터키는 1683년에 또 다시 대군을 이끌고 와서 비엔나를 포위하였다. 이를 제2차 비엔나 공성이라고 부른다. 비엔나는 터키의 공격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두달이나 계속하였다. 터키군은 폴란드 왕인 얀 조비에스키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허겁지겁 퇴각하였다. 그후 오토만 터키는 사양 길에 접어 들었다.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에 따른 전투

 

18세기의 바로크 도시: 터키의 침공을 받아서 두번이나 곤욕을 치룬 비엔나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복구해야 했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새로운 건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18세기는 바야흐로 비엔나의 재건시기였고 이로써 비엔나는 바로크 도시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가장 중요한 두명의 건축가가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비엔나를 바로크 도시로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Johann Bernhard Fisdher von Erlach)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cas von Hildebrandt)였다. 폰 에얼라흐는 대표적으로 칼스키르헤, 뵈미셰 호프칸츨라이, 쇤브룬 궁전, 호프비블리오테크(국립도서관) 등을 건축했고 폰 힐데브란트는 페터스키르헤, 팔레 슈봐르첸버그, 벨베레데 등을 건축하였다. 돈많은 귀족들은 비엔나 성밖, 즉 포아슈태테(Vorstädte)라고 하는 교외에 넓은 정원을 갖춘 대저택을 짓기 시작했으니 사람들은 그런 대저택을 팔레(Palais)라고 불렀다. 그렇게 해서 생긴 팔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소개해 보면 팔레 리흐텐슈타인(Palais Liechtenstein), 팔레 모데나(Palais Modena),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 팔레 슈봐르첸버그(Palais Schwarzenberg), 그리고 유명한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이다.  이어 1704년에는 비엔나의 포아슈태테를 둘러싸는 새로운 성벽을 완성했다. 이를 리니엔발(Linienwall)이라고 불렀다.

 

바로크 도시 비엔나. 오른편이 벨베데레 궁전의 정원

 

비엔나는 역병으로 두번에 걸친 큰 소실을 보았다. 1679년과 1713년이었다. 비엔나의 인구는 역병으로 크게 감소하였으나 역병이 물러간 이후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24년에는 15만명이었으나 1790년에는 20만명으로 늘었다. 1790년에는 비엔나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최초의 공장이 설치되었다. 그후 공장들이 늘어나자 일자리를 찾아서 변방국가들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슈타트는 유태인들이 집단적으로 사는 곳이 되었다. 유태인들은 비엔나 중심지역에 게토를 이루며 살았으나 1670년에 50년이나 살던 게토를 떠나 흩어졌고 주로 레오폴드슈타트에 살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비엔나에 하수도 시설이 도입되었고 거리도 깨끗이 정돈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집주소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정부는 우편제도를 활성화하였다. 요셉 2세 치하에서는 시당국의 행정이 대폭 개혁을 이루었다. 시청에는 전문 공무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방법원 제도도 실시되었다. 그 당시에 또한 도심에 있는 공동묘지들을 정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비엔나 남쪽 짐머링에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가 설치되어 도심에 있는 묘지들을 철거하여 이곳에 집단 이장하였다.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은 이 때에 조성된 것이다.

 

비엔나 남쪽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 윗쪽 교회가 오트 바그너가 설계한 루에거교회이며 그 앞에 조그만 원형처럼 생긴 곳이 역대 대통령 묘소이다. 조금 아래로 내려와서 왼편에 나무가 많이 서 있는 곳이 음악가 묘역이다.

 

나폴레옹 전쟁: 19세기 초반에 역사적으로 가장 중대한 사건은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비엔나는 나폴레옹에 의해 두번이나 점령 당했었다. 1805년과 1809년이었다. 첫번째 점령은 싱겁게도 전투도 없이 이루어졌다. 프랑스군 장군들이 비엔나로 들어갈수 있는 유일한 다리인 타보르브뤼케(Taborbrücke)를 건너와서 오스트리아 장군들에게 '전쟁은 이미 끝났으니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장군들은 그 말을 믿고서 군대를 해산하였다. 프랑스 군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비엔나에 입성하였다. 상당수의 비엔나 시민들은 오히려 나폴레옹 군대의 입성을 환영하였다. 아마 전제 군주주의에 대한 반발과 당시 유럽에서 움트고 있던 공화사상에 동조해서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점령은 극심한 전투를 겪은 후에야 가능했다. 나폴레옹군은 아슈페른(Aspern)에서 샤를르 대공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대단한 타격을 받았다. 물론 오스트리아군도 말 못할 타격을 받았지만 아무튼 프랑스군은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두어 달 후에 나폴레옹군은 다시 비엔나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바그람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나우를 건널수 있었다.

 

아슈페른 전투에서 전사한 오스트리아 장병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사자가 애통해 하고 있다.

 

비엔나 회의:  1812년, 나폴레옹은 내친 김에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으나 춥고 배고파서 철수할수 밖에 없었고 그때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아 돌이킬수 없는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차이코브스키의 '1812년 서곡'은 그 당시의 상황을 그린 불후의 명곡이다. 그후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배하자 비엔나에서는 1814년 9월 18일부터 이듬해인 1815년 6월 9일까지 이른바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가 열려서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판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를 협의하였다. 비엔나 회의에 참석한 열국의 대표들은 회의에는 관심이 없고 밤이면 밤마다 연회에 열중하였다. 메테르니히 재상이 회의를 오스트리아에 유리하게 이끄느라고 각국 대표들의 정신을 빼놓는 파티에 파티를 열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를 두고 위트에 넘친 리뉴의 공자 샤를르 조셉(Charles Joseph)이 '회의는 춤만 추지만 진전은 아무것도 없다'(Le congres danse beaucoup, mais il ne marche pas)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회의는 춤춘다'(Der Kongress tanzt)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아무튼 '비엔나 회의'로 인해서 비엔나는 많은 재정을 탕진해야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롱내지 풍자의 소리가 돌아다녔다.

 

러시아의 알렉산더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빌헬름은 모든 것을 고마워했다

덴마크의 프데레딕은 모두를 위해서 말했다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은 모두를 위해서 마셨다

뷔르템버그의 프레데릭은 모두를 위해서 먹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 황제는 모두를 위해서 돈만 지불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비엔나 회의'(Wiener Kongress).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는 문제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산업화에 매진하였다. 비엔나도 여러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엔나는 유럽에서도 철도가 가장 발달한 도시로서 인정을 받았다.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은 멀리 비엔나에도 곧바로 영향을 주었다. 3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장기집권하던 메테르니히 수상이 사임했다.

 

라트하우스(시청)에서 칼 루에거 시장이 주최한 무도회. 지금도 그렇지만 19세기에 비엔나는 무도회의 도시였다.

 

프란츠 요셉의 치적: 비엔나는 1850년경부터 확장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외부 성벽인 리니엔발(Linienwall)의 안쪽에 있는 지역을 모두 비엔나 시로 편입하였다. 포아슈태테는 2구(레오폴드슈타트)와 9구(알저그룬트)가 되었다. 옛 중심지는 1구 인네레 슈타트(Innere Stadt)가 되었다. 1858년에는 성벽이나 요새, 또는 능보들이 확장되어가는 비엔나 시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게 되어 철거되었다. 내부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링슈트라쎄(Ring Strasse)가 조성되었다. 링슈트라쎄를 따라서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슈타츠오퍼(Staatsoper), 팔라멘트(parlament), 라트하우스(Rathaus),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 뵈르제(Borse), 국립미술관(Kunsthhistorisches Museum), 자연사박물관(Naturhhistorisches Museum), 그리고 헬덴플라츠를 안고서 노이에 부르크(Neue Burg)가 들어섰고 슈타츠오퍼를 중심으로 다른 쪽으로는 브리스톨 호텔, 그랜드 호텔, 임페리알 호텔, 무직페어라인 게보이데 등등이 들어섰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관을 이루는 거리이다. 비엔나의 대대적인 확장개혁은 1873년 만국박람회로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만국박람회가 끝나자마자 비엔나에는 증권대파동이 일어나서 국가경제가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로써 프란츠 요셉 황제가 주도한 '기반조성시기'(Gründerzeit)는 막을 내렸다.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는 < 형태의 길이 링 슈트라쎄이다. 링슈트라쎄를 따라서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팔라멘트(의사당), 쿤스트히스토리셰스 무제움(미술사박물관), 나투르히스토리셰스 무제움(자연사박물관), 라트하우스(시청),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증권거래소(뵈르제), 로사우어 병영 등이 줄을 이어 세워졌다. 아마 세계에서도 이런 건축 유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한편, 1830년에 도나우 대홍수가 있었다. 말도 못하는 수해를 겪었다. 홍수 방지를 위해서 도나우를 어떻게 해보자는 의론이 분분했다. 그리하여 1860년대에 가서 도나우 정비 사업이 이루어졌다. 도나우의 여러 지류들을 정비하고 하나의 곧바른 도나우를 만들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도나우의 지류는 운하(도나우카날)로 만들었다. 사실은 운하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도나우 지류를 정비한 것인데 아무튼 오늘날에도 운하로 불리고 있다. 이 시기에 비엔나의 인구는 이민자들이 늘어서 대폭 증가했다. 1869년 이래 해마다 인구조사가 이루어졌고 1910년의 조사결과는 무려 2백 3만명이었다. 비엔나시는 1890년에 두번째 확장 도시계획을 시행하였다. 리니엔발 바깥 쪽에 있던 마을들, 즉 포아오르테(Vororte)라고 불리던 지역을 거의 모두 비엔나시로 편입한 것이다. 그래서 11구 짐머링과 19구 되블링이 비엔나시가 되었다. 10구 화보리텐은 이미 1874년에 4구 뷔덴을 분구할 때에  설립되어서 이번 편입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또한 2구 레오폴드슈타트도 1900년에 분구가 되어서 북부지역은 20구 브리기테나우가 되었다. 이어 1904년에는 플로리드스도르프가 비엔나의 21번째 구가 되었다. 이 기간에 칼 루에거(Karl Kueger)가 비엔나 시장으로 대단한 활약을 했다. 여러 치적 중에서 한두가지만 말하자면, 우선 비엔나의 상수도를 저 멀리 산악지대로부터 끌어온 것이다. 그리고 비엔나 주변에 초원지대와 삼림지대를 보존하여 풍광을 더하게 만들었다. 칼 루에거 시장에 대한 인기는 대단히 높았다. 여기에 그는 반유태주의를 은근히 내세워서 더 인기를 끌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비엔나는 아르 누보, 즉 유겐트슈틸(Jugendstill)의 시기에 접어 들었다. 오토 바그너라는 뛰어난 건축가가 유겐트슈틸을 주도하였다. 그를 비롯한 새로운 이념의 여러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이른바 제체시온(Secession)을 구성하였다. 분리주의자라는 뜻이다. 칼스플라츠 인근의 양배추 처럼 생긴 지붕을 가진 집이 이들의 본부인 제체시온이다.

 

비엔나에 새로운 예술사조를 불러 일으킨 제체시온. 칼스플라츠에서 나슈마르크로 가는 길에 있다.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스가 있다. 프리스라는 말은 소벽이라고 번역되었으며  처마 복공과 평방(平枋) 사이의 공간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방의 천정과 벽 사이의 작은 공간을 말한다. 그곳에 그림을 그렸다.

제체시온 지하 전시실의 벽에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주제로 삼은 그림. 베토벤 프리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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