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830) 고전시대의 금자탑 로시니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13: 베르디와 바그너가 태어났다.
1816: 조반니 파이시엘리(Giovanni Paisielli)가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약 1백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지워져 있다.
1818: 아베마리아로 유명한 샤를르 구노가 태어났다.
1887: 로시니 서거 19년후, 그의 유해는 재매장을 위해 플로렌스로 옮겨졌다. 이 행사에는 6천명 이상의 군중들이 애도하며 참여했고 4개의 군악대, 3백명의 합창단이 조가를 불렀다. 합창단은 로시니의 오페라 Mose in Egitto(이집트의 모세) 중에서 기도송을 불렀다.
조아키노 로시니
모차르트는 정말 천재였던것 같다. 오페라 코믹과 오페라 세리아의 요소를 절묘하게 혼합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오페라 세미세리아(Opera semiseria)라고 불렀다. 몬테베르디에서 비롯되고 글룩에서 개화된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는 세기의 말에 새로운 추세를 등에 업게 되었다. 서정적 비극으로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비제, 마스네, 생-생 등 프랑스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등장한 인물이 로시니였다. 베니스에서 영웅적 오페라인 Tancredi(탄크레디)와 코믹 오페라인 L'Italiana in Algeri(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으로 대성공을 거둔 로시니는 Il Barbiere di Siviglia(세빌리아의 이발사)를 통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에 새로운 틀을 만들어 준 주역이었다. 비극이든지 코미디든지 음악의 형태와 언어는 같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로시니의 오페라에서 기본 단위는 아리아가 아니라 무대 장면(Scene)이었다. 그리고 각 장면은 소나타와 같은 일정한 패턴으로 구성되도록 했다. 이러한 틀 때문에 주인공이 아리아를 부를때 자기 마음대로 장식음을 붙여 노래하는 일은 사라졌다. 장식음을 쓰던 또는 카덴짜를 쓰던 모두 작곡가의 의도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로시니의 주장이었다. 바야흐로 오페라는 주인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에 의한 작품이라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음악교사로 분장한 알마비바 백작이 로지나에게 노래 레슨을 하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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